이 포스팅은 그동안 제가 공부하는 용도로 만들어서 비공개상태였다가 새로운 포스팅으로 그리스를 연구하는 글과 함께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공개로 변경했네요.그래서 이 자료는 모두 구글서치로 모아놓은 남의 글(위키백과,브리테니카사전)입니다. 제 개인의견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완전히 객관적인 자료인 백과사전식 민족연구인 셈입니다.

 

1부 - 동유럽(러시아 포함),폴란드(슬라브족)역사

2부 - 중세사회 : 서유럽의 카톨릭역사(신성로마제국)

3부 - 동로마와 서로마,분열의 역사(동방정교회란 무엇인가?)

4부 - 인종문제의 뿌리,동서의 갈등,분열,증오,전쟁,홀로코스트(대학살)

 

 

 

1부,동유럽(러시아 포함),폴란드(슬라브족)역사

 

 

폴란드 역사 - 원래 지금의 폴란드 땅에는 게르만족들이 살고 있었다. 10세기 경, 폴라니에족을 중심으로 나라가 형성되어 민족과 국토의 명칭이 생겨났다. 966년 가톨릭을 받아들이며 피아스트 왕조가 성립되었고 크라쿠프가 정치적 중심지로 발전했다. 200여년의 공국 분할 시대를 거쳐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루었다. 1385년, 피아스트 왕조에 이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연합 왕조인 야기에오 왕조가 탄생하였다.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파, 발트해로 통하는 길이 열리며 16세기에는 유럽의 곡창 지대로 최대 전성기를 맞았다.

 

 

1573년 야기에오 왕조가 끝나고, 귀족들이 국왕을 선출하는 일종의 귀족 공화정이 등장하였고 1596년에 수도를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이전했다.

 

투르크, 스웨덴과 전쟁 등으로 국력이 쇠퇴, 프로이센, 제정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이 점진적으로 폴란드를 침입해 1795년 폴란드를 분할하여, 나폴레옹에 의한 바르샤바 공국 시대(1807~1815) 외에는 1795년부터 1918년까지 3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의 맞서 1830년 독립을 위한 혁명 정부를 조직하여 혁명으로 이어졌으나 제정 러시아의 탄압과 사상적 내분으로 독립투쟁은 실패했다.이후 1차 세계 대전 중 월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1918년 독립하였다. 그 뒤 바르바니파르토 소장이 지휘하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킨다.1939년 나치 독일과 소련의 침략(제2차 세계 대전)을 받고 서부지역은 나치 독일에, 동부는 소련에 분할 점령되었다가 1945년 해방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서쪽의 옛 독일 영토를 새로 획득하였지만 그보다 더 넓은 동쪽 영토를 소련에게 빼앗겼다. 대전이 끝난 직후 1945년 6월 노동자당 즉 공산당과 사회당이 중심이 되어 통일 정부를 세웠지만,1947년 총선 결과 노동자당의 압승으로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었다.1948년에는 노동자당과 사회당이 합병해서 통일노동당이 되고,1952년에는 인민공화국 헌법이 채택되었다.냉전을 거치며 소비에트 연방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었다.

 

1956년의 정변으로 당제1서기에 복귀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민족공산주의자로 친소파(親蘇派)를 몰아내고 정치범을 석방했으나 1970년의 노동자·학생 폭동으로 기에레크가 서기장으로 취임하여 친소 노선으로 바뀌었다.1976년 6월 24일 물가폭동 등으로 다시 노동자·학생이 봉기했으나 정치 권력의 변동은 없었다.그러나, 경제 실정과 지도층의 부패로 노동자 파업 투쟁이 일어났고,1981년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 노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민주화를 이루며 1990년 레흐 바웬사가 첫 민선 대통령이 되었다.1999년에 NATO, 2004년에 유럽 연합에 각각 가입하였다. 폴란드와 러시아는 MD 문제로 인해 최악의 사태를 맞았으나, 11월 20일에 폴란드 총리는 러시아와의 관계 복원이 최우선 과제라고 발표했다

 

 

 

바웬사 - 폴란드 국내외에서 수백만 명의 폴란드 노동자들을 이끄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인정되었으며, 198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목수의 아들인 바웬사는 초등학교와 직업학교 교육만 받고, 1967년 그다인스크에 있는 대규모 레닌 조선소에서 전기공으로 일했다. 1970년 식량폭동 당시 바웬사는 그곳에서 거리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경찰의 총에 맞고 쓰러지는 것을 목격했다. 1976년 폴란드 공산정부에 대항한 시위가 발생했을 때, 바웬사는 반정부 노동조합 활동가로 부상했고 그 일로 해고되었다.

 

1980년 8월 14일 레닌 조선소에서 식료품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을 때, 바웬사는 조선소 담벽을 타고 넘어가 내부 노동자들과 합류했다. 이때 바웬사는 경영진과 협상할 파업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3일 후 경영자측은 파업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른 그다인스크 공장의 파업노동자들이 바웬사에게 동맹을 호소하며 파업을 계속해 달라고 청하자 즉시 동의했다.

 

바웬사는 그다인스크-소포트-그디니아 지역의 공장들을 묶는 공장간 파업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위원회는 파업권과 노동조합결성권 등의 과감한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돌입했다.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공산 당국은 노동자들의 주요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8월 31일 바웬사와 폴란드 초대 부총리 야지엘스키는 노동자들에게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조직을 결성할 수 있는 권리를 양보한다는 내용의 협정에 서명했다.

 

이 기념비적인 협정이 체결된 데 따른 호응으로 1,000만 명 가량의 폴란드 노동자와 농민이 반(半)자치적인 조합에 가입함에 따라 공장간 파업위원회는 연대자유노조로 이름을 바꾸고, 전국적인 노동조합조직으로 탈바꿈했으며 바웬사는 의장 겸 대변인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폴란드 정부는 연대자유노조를 공인했다. 바웬사는 소련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연대자유노조와 정부가 마찰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그러나 연대자유노조가 얻은 것은 일시적이었다.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 정부는 계엄령을 발표하고, 연대자유노조를 불법화했으며, 바웬사를 포함한 연대자유노조의 지도자들을 대부분 체포했다. 바웬사는 이때 거의 1년 동안 구금되었다. 1983년 바웬사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폴란드 정부는 이를 비판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망명객이 될 것을 두려워한 바웬사는 폴란드에 남아 있고, 대신 부인 다누타가 오슬로로 가서 노벨상을 받았다.

 

 

 

2부,중세사회 : 서유럽의 카톨릭역사(신성로마제국)

 

 

독일사 개괄 獨逸史 history of Germany - 현 독일지역에 게르만족이 건설하여 내려오는 국가의 역사.

 

국가 독일의 기원은 독일의 제부족을 하나로 통합한 프랑크 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에서 시작된다. 메로빙거 왕조로 시작한 프랑크 왕국은 이후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로 분열되었고, 911년 동프랑크는 콘라트1세를 독립된 독일의 왕으로 세웠다. 콘라트1세, 하인리히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1세는 로마 황제 대관을 얻어 신성로마제국을 탄생시켰다.

 

이후 독일 황제와 로마 교황 사이의 갈등, 주변 영방 국가와의 갈등, 중앙과 지방 제후간의 갈등으로 독일은 오랜 시간 정치적 혼란기에 직면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제국 국민들의 불만도 함께 폭발했고, 독일은 농민전쟁·기사전쟁·30년전쟁 등을 겪었다. 독일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전쟁을 치른 뒤 1806년 결국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후 39개 주권 국가로 구성된 독일 연방으로 다시 태어났다가, 1871년 1월 빌헬름 1세를 황제로 한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큰 손실을 입었다. 1945년 항복한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졌다가, 1990년 10월 분단 41년 만에 하나로 통일되었다.

 

중세시대(911∼1250년)의 독일 - 동프랑크의 카롤링거 왕통이 단절되자 독일 내 부족장들은 프랑켄 부족장 콘라트1세(911∼918 재위)를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선출된 왕이라는 정치적 조건 때문에 각 지방과 부족의 특권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이러한 지방분권주의는 이후 독일 역사의 구조적 특징이 되었다.새로이 성립된 왕국은 동부의 마자르족을 비롯한 이민족의 위협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콘라트 1세의 뒤를 이어 작센의 하인리히1세(919∼936 재위)가 다시 왕으로 선출되었다.그는 안으로는 로트링겐(로렌)을 동프랑크의 영토로 삼아 국내의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마자르족을 토벌하여 외부의 위협을 중단시켰다.

 

하인리히의 아들 오토1세(936∼973 재위)는 독일 내의 모든 부족으로부터 차출된 기병군으로 955년 아우크스부르크 부근 레히펠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크게 무찔렀다 . 이로써 독일이 동부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마자르족 대토벌은 서방에 있어서 오토 1세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는 962년 교황 요한네스 12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제관을 받았다.

 

작센 왕조 뒤에 성립된 잘리어와 슈타우펜의 두 왕조 치하에서 독일의 관심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풍요로운 이탈리아 경영에 모아졌다. 잘리어왕조의 콘라트2세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은 부르군트 왕국을 봉건적 주종관계에 예속하고 교황청 문제에 깊이 개입했다. 그러나 독일황제는 이탈리아 경영에 지나친 정력을 소모한 결과 국내 각 부족을 등에 업은 제후들의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한편 독일의 상황은 10세기초부터 시작된 교회의 자정(自淨) 노력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로마 교황청은 교회에 대한 세속권력의 간섭을 철저하게 배격했으며 독일 내의 대주교들은 독일황제의 성직자 서임권(敍任權)을 거부하고 교황으로부터 직접 임명을 받았다. 이로써 교회와 세속권력 간의 갈등이 일어났고 독일은 극도의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양자간의 갈등은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1073∼80 재위)와 황제 하인리히4세(1084∼1105/06 재위) 간의 서임권 투쟁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교회의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대처(帶妻) 행위를 금지한 그레고리우스는 세속권력에 의한 성직서임을 철저히 금지했다. 하인리히는 반항하는 국내 제후를 토벌하기 시작했으나 남독일의 제후들은 그레고리우스와 긴밀하게 동맹했다. 마침내 교황이 하인리히를 파문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하인리히가 교황에 굴복한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은 파문을 취소했다. 이후에도 황제권과 교황권의 투쟁은 거의 20년간 계속되다가 교권과 속권을 엄격히 분리하는 보름스협약(1122)으로 일단락되었다.

 

잘리어 왕조 최후의 황제 하인리히5세가 후계자 없이 죽은 뒤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 왕조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붉은 수염왕)는 정치적 안정을 이룩한 뒤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동으로는 슬라브 땅에 진출하고 남으로는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평야를 차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사자공의 협력 거부로 프리드리히1세는 레냐노전투에서 패배하고 롬바르디아 점령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탈리아 지배권을 겨냥하는 독일황제와 로마 교황의 대립, 국내 교회와 제후의 타협과 상충 속에 독일의 중앙권력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러는 가운데서도 독일인은 동방에 진출했고, ' 독일기사단'(튜튼 기사단)의 프로이센 개척은 프로이센 왕국의 기원이 되었다.

 

 

 

 

3부,동로마와 서로마,분열의 역사(동방정교회란 무엇인가?)

 

 

로마제정말기 - 로마시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고대 제국의 역사.세베루스 왕조(193~235)

 

 

이민족의 침입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벌어진 내란에서 도나우 주둔군이 193년에 추대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197). 트리폴리 출신인 그는 동부인과 자신의 세력기반인 군대를 우대한 반면 이탈리아인과 원로원을 무시했다. 그는 군대를 증강하고 병사의 봉급을 인상하며 상여금을 많이 주어 군대를 특권계급으로 만들었다. 또 그는 관료제를 강화해 중앙권력을 강화함으로써 관료층인 에퀴테스를 우대하는 동시에 지방자치를 더욱 압박했다. 이러한 조치로 지출이 크게 늘어나자 그는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물렸다. 그의 황제권은 사실상 군대에 의존해 있었으며, 세습에서 황제의 정통성을 찾으려 한 그는 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211년 그가 죽자 뒤를 이은 큰아들 카라칼라(211~217 재위)는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으나 재정이 계속 궁핍해져 악성 인플레를 낳았다. 그는 또한 제국의 거의 모든 주민에게 시민권을 확대해 제국의 통합을 강화했으나, 동시에 시민권의 가치를 줄이고 군대 충원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동방정복을 꿈꾸고 원정을 나갔다가 부하인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의 지령을 받은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마크리누스가 황제에 올랐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곧 세베루스 가문의 반란으로 218년 살해당했다. 그뒤 황제가 된 세베루스 가문의 바시아누스는 그가 모시던 신(神)의 이름을 딴 엘라가발루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4세였던 그는 로마인에게 낯선 신을 광적으로 숭배하고 지나친 낭비를 했기 때문에 결국 미움을 사 222년에 살해당했고 이로써 세베루스 왕조는 끊어졌다.

 

3세기의 종교와 문화

 

로마의 전통 종교는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거의 변하지 않았으나 활력을 잃어갔다 .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너무 '정치적'이고 거대한 신보다 유용하고 지역적인 군소 신들에 대한 믿음이 존속·강화되었고, 황제 숭배가 전통 종교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하지만 3세기의 가장 독특한 현상은 당시 음울한 분위기에 걸맞게 내세를 지향하는 동방 종교들이 세력을 넓히고, 모든 신을 하나의 절대신으로 통합하는 경향이 종교적 열정과 더불어 나타난 것이었다. 한편 그리스도교는 1~2세기에 주로 유대인 사이에서 서서히 확산되어갔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신비에 싸여 있고 하층 계급들이 주로 믿으며 특정한 종족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를 이해할 수 없고 비천하며 위험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1세기말에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에도 상당히 널리 퍼졌고, 2세기에는 지식인들 사이에도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국 정부는 그리스도교를 탄압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네로 이후 플라비우스 왕조 치세 때는 그리스도교를 범죄로 보는 관념이 자리잡았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최초로 체계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한편 문학은 쇠퇴기로 접어들었고, 2세기에 부활한 그리스 문학과 학문이 법률 분야를 제외한 모든 영역을 지배했다. 철학은 종교적 신비주의에 크게 기울어 신(新)플라톤 철학이 등장했고 그리스도교 신학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군사적 혼란과 제국의 해체(235~270)

 

세베루스 알렉산드르가 죽은 뒤부터 클라우디우스 2세에 이르는 기간은 제위 찬탈과 이민족(barbariano) 침입으로 점철되었다. 최초의 본격적인 군인황제 막시미누스(235~238 재위) 때부터 이른바 군인황제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에는 원로원이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함께, 그리고 다음에는 13세인 고르디아누스 3세를 황제에 지명했으며 고르디아누스가 살해당한 뒤에는 군인 2명이 차례로 제위에 올랐다. 그뒤 253~268년에는 원로원 의원인 발레리아누스와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260~268 재위)가 통치했다. 갈리에누스는 재위 기간 내내 야만족의 침입을 막아야만 했으나 몇 가지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을 군대에서 배제했고, 에퀴테스에게 군지휘권과 속주 총독직의 대부분을 맡겼으며,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강력한 새 기병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막기 위해 그리스의 종교와 신플라톤 철학을 적극 후원한 탓에 많은 반감을 사 268년 암살당했다. 그를 죽이고 새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2세(268~270 재위)는 이민족을 2차례 격파했으나 270년 전염병으로 죽었다. 이 시대에는 제국이 지닌 주된 결함 가운데 하나인 제위계승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 군대가 정계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질적인 개혁이 필요했고 갈리에누스는 그 점을 알았으나 개혁을 추진하기에는 너무 힘이 약했다.

 

한편 이 시대에는 이민족의 대규모 침략이 행해졌다. 게르만족은 본거지였던 스웨덴에서 남동쪽으로 이동해 로마로 쳐들어왔으며 특히 서부에서는 히스파니아(스페인)까지 침범했다. 그 틈을 타서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포스투무스는 갈리아를 장악하고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했다. 동부에서는 사산 왕조가 흥기해 로마는 카라칼라 때 얻었던 메소포타미아를 잃고 유프라테스 강으로 물러서야 했다. 이때 팔미라 군주였던 오다이나투스는 저항 세력을 조직해 사산조를 이란으로 다시 몰아내고 페르시아를 상대로 계속 싸우면서 팔미라 왕국을 세웠다. 그가 267년 살해당하자 아들인 바발라투스가 어머니 제노비아를 섭정으로 하여 뒤를 이었는데, 그녀는 갈리에누스와 클라우디우스 2세가 죽은 틈을 타 270년 이집트와 소아시아 일부를 침략했고 이듬해에는 아들을 황제로 선포했다. 272년 아우렐리아누스가 동부 속주들을 다시 제국에 통합했으나 메소포타미아를 되찾지는 못했다.

 

이러한 외침과 내란은 경제와 사회를 위기에 빠뜨렸다. 많은 지역이 황폐화했고 강도와 해적이 들끓었으며 전염병으로 인구가 줄어들었다. 제국은 빈곤에 빠졌다. 그와 함께 자치시도 어려움에 부딪혀 영역이 축소되었고 상업이 쇠퇴했으며 농업과 수공업도 사회의 혼란과 세금부담의 증대로 피해를 입었다. 황제들은 어려운 상황을 알고 있었으나 당장 물적·인적 자원을 끌어대기 위해 강력한 강제수단을 동원해 후기 제정을 군사독재정으로 만들었다. 한편 도시 중산층은 몰락해갔고 얼마 안 가 도시 관리(官吏)의 도주(逃走)를 강제로 막아야 할 필요까지 생겼다. 원로원 의원들은 정치적 권력을 잃었으나 사회적 위신은 유지했고 그들이 지닌 대농장을 더욱 넓혀갔으며 도시를 떠나 농촌에 있는 별장으로 옮겨갔다. 에퀴테스는 이제 관료층으로서 지배적인 지위에 올랐다. 하층계급은 공식적으로는 국가의 보호를 받았으나, 사회가 전반적으로 가난해짐에 따른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국가는 재정적인 필요에 따라 농민을 토지에, 수공업자를 작업장에, 상인을 장사에 묶어두려 했으므로 사회 전체가 화석화(化石化)되었다.

 

 

제국의 회복과 전제정의 성립(270~337)

 

 

클라우디우스 2세가 죽은 뒤 270~284년에는 일리리아 출신의 황제들이 제국을 다스렸는데, 그들은 훌륭한 장군으로서 제국의 균형을 되살리려 애썼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한 이민족을 격퇴시키고 팔미라 왕국을 점령하는 한편,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갈리아 제국을 패퇴시킴으로써 제국을 다시 통일시켰다. 그는 또한 제국 안에서도 질서를 회복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애썼다. 그는 이따금 공식적으로 '주인이자 신'(dominus et deus)으로 불렸는데, 원수정은 이제 완전히 전제정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는 275년에 살해당했고 뒤를 이은 원로원 의원 타키투스는 불과 2~3개월 제위에 있었다. 그뒤에는 역시 일리리아 출신인 프로부스가 제위에 올라 갈리아에서 침입자를 물리치고 경제회복에 힘썼지만 282년 암살당했다. 다음에 황제가 된 카루스는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죽었고 그의 아들 카리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패해 죽음을 당했다.

 

 

284년에 동부 주둔군이 황제로 선포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개혁을 통해 후기 제정을 확립했다. 그는 막시미아누스를 공동 황제(Augustus)로,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를 부황제(Caesar)로 지명했다. 이들 황제는 제각기 군대를 이끌고 할당된 지역을 방어하게 되어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와 브리튼을, 갈레리우스는 도나우 지역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부를 책임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모든 결정권은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있었다. 그는 황제들을 신격화함으로써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으며 황제 4명으로 이루어진 체제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보장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퇴위했고 바로 그날 두 부황제가 제위에 오르는 동시에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새로운 부황제로 지명되었다.

 

세습 원칙을 무시한 점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커다란 모험을 한 셈이었다. 그 자신이 확립한 황제 신격화의 절대군주정은 권력세습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곧 드러나게 되었듯이 군대와 대중들도 세습 원칙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보다 효율적인 속주 행정을 위해 속주의 수를 크게 늘려 그 대부분을 민사권만을 행사하는 에퀴테스 출신의 총독에게 맡겼다. 심지어는 이탈리아도 속주와 비슷한 여러 단위로 나누었고, 4 황제가 각기 자기 지역에서 집무함에 따라 로마는 실질적인 수도에서 격하되어 이탈리아가 누려온 여러 특권을 모조리 박탈당했다. 도시는 자치권을 잃었으며 세금은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징수되었다. 속주는 여러 개씩 묶여 관구(diocese)를 이루었다. 중앙정부에서는 관리들이 많이 늘어 관료제가 더욱 깊이 뿌리내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또한 변경 강화에 노력을 기울여 병력을 늘리고 황제 직속군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기동타격군을 창설했다. 그 부대는 대부분 총독이 아니라 군사권을 가진 지휘관에게 맡겨졌으며, 주로 군인 자제와 이민족으로 군사를 충원했다. 이와 같은 군대의 강화는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해주었다. 그러나 전쟁과 개혁 및 관료제의 팽창은 재정을 압박했으며 인플레이션은 재정 위기를 더 심각하게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구와 재산 상태를 상세하게 조사하고 세제를 개혁해 공평한 과세와 징세로 국가수입을 늘릴 수 있었다. 또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양화(良貨)를 주조하고 가격제한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정부는 국민을 출생지에 묶어놓아 사회이동을 금했다. 반면에 원로원 의원들은 대토지 소유자로서, 그리고 기사계급은 관료로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치세의 말기에 그리스도교를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그리스도교는 그전에도 몇 차례 박해를 받았지만 일시적으로 움츠러들었을 뿐 계속 발전해왔다. 그러나 4두제정(四頭帝政)의 종교적 기반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가 확산되는 것은 마침내 갈레리우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갈레리우스는 다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마음을 움직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유례없는 박해를 자행했다. 그 박해는 동부에서 더 강력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제국의 백성이 더이상 그리스도교를 맹목적으로 증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말살하지는 못했다.

 

305년에 끝난 첫번째 4두제정에 이어 들어선 2번째 4두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갈리아와 브리튼의 군대는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는 즉각 로마에서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하고 아버지를 다시 황제로 복귀시켰으며 세베루스를 제거했다. 이에 로마는 308년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에 맞세워 황제로 선포한 리키니우스와 아프리카에서 반란을 일으킨 도미티우스 알렉산드르를 포함해 7명의 황제를 갖게 되었다. 뒤이어 복잡한 내란이 벌어졌으나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동맹을 맺은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였다. 이 둘은 316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죽자 세습 원칙을 되살려 각기 아들을 부황제로 임명했지만 세습제는 하나의 황제만을 요구했다. 대립이 불가피해 324년 둘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을 모두 장악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 싸울 때 십자가가 하늘에서 빛나는 환영(幻影)을 보고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우대정책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세력은 급속히 팽창해갔다. 교회는 이제 수많은 특혜를 부여받은 반면 이교는 냉대와 억압을 당했다. 그러나 교회는 곧 황제의 세속권력에게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특히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설을 의문시하는 아리우스파 이단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고, 공의회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탄핵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정통과 아리우스파 사이에서 여러 차례 마음을 바꾸었으므로 아리우스파 이단은 사라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노선을 따라 개혁을 계속했으며 행정수도이자 '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했다. 337년 5월 22일에 죽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4세기의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그의 3아들이 제국을 분할해 다스렸으나 그 가운데 2명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 353년에는 콘스탄티우스가 제국을 통합했다. 그의 치세에 로마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 대항했으나 페르시아를 격퇴시키지 못했다. 또한 황제의 사촌 율리아누스의 활약으로 갈리아는 방어했으나 도나우 지역을 평정하지는 못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주로 종교문제에 관심을 두었는데 그의 간섭은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를 낳았다. 하지만 그는 아리우스파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이는 교회에 불리한 것이었다. 361년 그가 죽자 율리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마지막 황제로서 뒤를 이었다. 이교(異敎)를 믿은 율리아누스는 이교신앙을 되살리고 그리스도교를 약화시키려 했으며, 자유로운 원수정을 복귀시키려고 애썼으나 페르시아를 공격하다가 패해 전사했다. 그의 뒤를 이은 요비아누스는 그리스도교도로서 페르시아와 화약을 맺고 종교에 대해 관용정책을 폈다. 그러나 364년 갑자기 죽었다.

 

 

새로 황제가 된 발렌티니아누스는 동생 발렌스를 공동황제로 지명해 제국을 서부와 동부로 분리했는데, 제국이 실제로 분리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서부를 맡은 발렌티니아누스는 이민족을 물리치고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하는 등 대외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고 하층계급 보호정책을 폈다. 그러나 국가의 필요 때문에 사회의 화석화 추세를 가속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동부를 다스린 발렌스는 무능했고, 광신적인 아리우스파로서 이교도와 정통 그리스도교를 탄압해 반발을 샀으며, 도나우 지역으로 침입해온 서고트족과 동고트족과의 전투에서 378년 죽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375년 갑자기 죽자 그의 아들인 16세의 그라티아누스가 뒤를 이었다. 그는 379년에 발렌스의 후임으로 테오도시우스를 동부 황제로 선포하고 고트족과 프랑크족을 제국 안의 영토 안에서 살도록 허용했다. 테오도시우스는 곧 그라티아누스를 압도해 주도권을 잡고서 아리우스파와 이교도를 척결하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었다. 이단과 이교에 대한 이러한 탄압은 서부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틈타 갈리아와 브리튼의 군대는 383년 지휘관인 막시무스를 황제로 선포한 뒤 그라티아누스를 살해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막시무스를 황제로 인정했으나 388년 막시무스가 테오도시우스를 공격하다 죽었으므로 제국 모두를 테오도시우스가 지배하게 되었다. 몇 년 뒤 이교 세력이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가 갑자기 죽은 뒤 그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부와 서부를 물려받았다. 이로써 동·서 로마의 분리는 결정적인 사실이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대외적으로는 로마에 안정을 가져다 주었으나 대내적으로는 별로 개혁을 단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국의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세금 부담이 더욱 늘고 경제는 줄곧 쇠퇴해갔으며 전제정이 더 강화되었다. 심지어 군대는 지휘관들까지도 주로 이민족으로 구성되었다.

 

 

4세기 동안에 황제가 지닌 권력은 이론상 절대적이었고 황제에 대한 신격화가 그것을 뒷받침했지만, 사실은 군사적 승리만이 황제의 지위를 정당화할 수 있었고 관료제가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고 있었다. 전쟁과 관료제가 민생을 압박하고 경제가 쇠퇴한 데다 세금 부담이 무거워지자 하층계급 사이에서는 불만이 팽배해져 유력한 자의 보호를 구하는 성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성향은 중세의 봉건제를 예견케 하는 사적인 의존관계를 확산시켰다. 한편 주교들은 그리스도교 세력이 강화되면서 점점 더 큰 권력을 소유하게 되어, 약자에 대한 보호를 둘러싸고 계속 유력자들과 경쟁을 벌여 5세기에는 세속적인 통치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독립적인 중소 농민이 무거운 세금 부담과 대토지 소유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몰락해갔다. 그들은 자기 땅을 팔아넘기거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유력자에게 땅을 넘긴 뒤 소작인으로 전락해 땅에 매임으로써 자유를 구속당했다. 농촌의 상황은 중세 농노제를 지향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동·서 로마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이민족의 침략에 큰 영향을 받은 서로마에서는 도시가 쇠퇴하고 사회가 농촌화하는 성향이 분명했던 반면, 침략의 영향을 덜 받은 동로마에서는 도시가 보존되고 농민들도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확산이 이교문학의 번창을 가로막지는 못했으나 이교문학은 대부분 과거에 매달려 고전작가나 옛 의식(儀式)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데 그쳤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제국의 행정단위를 바탕으로 조직을 갖추었는데 각 도시에는 주교가, 각 속주의 수도에는 대주교가, 그리고 아주 큰 도시에는 총주교가 자리잡았다. 한편 교회는 엄청나게 부유해졌고 세속 당국의 사법권에서 제외되는 불입권(不入權)을 획득했다. 황제는 종교문제에 간섭할 권리를 주장했으나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서로마 교회는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이 분리되어야 하며 교권이 더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보여준 황제교황주의가 우세했다. 이교는 탄압을 받았지만 주로 농촌지역에서 5세기까지도 존속했다. 정통 그리스도교는 강력한 이단에 대해 승리했으나 다른 이단들이 계속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고트족은 아리우스파로 개종함으로써 침략 이후에 다가올 갈등을 예고했다. 이집트에서는 3세기말에 수도원이 탄생했는데, 수도원은 금욕적 성격이 누그러지면서 다른 곳으로 퍼져나갔다. 교회 문학은 4세기에 뚜렷한 발전을 보였다. 특히 서로마 교회에서는 교부(敎父)라 부르던 성 암브로시우스와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서로마 제국의 몰락(395경~500)과 게르만족의 이동

 

 

테오도시우스가 죽은 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를 통치했다. 그는 반달족의 피가 섞인 유능한 장군 스틸리코에게 자신을 도와 서로마를 통치하게 하고 아르카디우스가 맡은 동로마와 서로마의 통합을 떠맡겼다. 스틸리코는 그의 개입을 거부하는 동로마에 여러 차례 간섭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동·서로마 제국의 분리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게르만족이 물밀듯이 제국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402년 스틸리코에게 저지당했던 서고트족의 알라리크는 곧 다시 침략해 410년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을 자행한 뒤 남쪽으로 진격했으며, 그뒤를 이어 아타울프스는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로 쳐들어갔다.

 

 한편 406년 12월 31일에는 게르만의 여러 부족이 얼어붙은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로 침입했고 409~415년에는 그들 대부분이 히스파니아로 건너갔다. 이무렵 갈리아로 들어간 서고트족은 호노리우스의 요청으로 반달족을 공격하기 위해 히스파니아로 건너갔다. 그동안 로마 장군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를 어느 정도 평정한 뒤 421년에 공동황제로 선포되었다. 얼마 뒤 그가 죽고 나서 423년에 그의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호노리우스의 뒤를 이어 455년까지 통치했다.

 

 

5세기 초반에는 로마 장군 아이티우스가 소규모 군대를 지휘하여 이민족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여러 속주에 자리잡은 이민족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브리튼은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에게 넘어갔고, 히스파니아는 수에비족·서고트족이 왕국을 건설했다. 반달족은 428년 히스파니아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로마, 시칠리아, 비잔틴 제국의 서로마를 위협했다. 450년에는 훈족이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침략했으나 이미 서부에 자리잡은 이민족의 도움을 받은 아이티우스에게 격퇴당했다.

 

 

454년과 455년에 아이티우스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차례로 죽은 뒤에는 게르만족 출신 장군이 정권을 장악했고 황제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476년 게르만 출신인 오도아케르 장군이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위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막을 내렸다.

 

 

한편 그러는 사이 아프리카에는 반달족 왕국이, 히스파니아·갈리아·루아르 지역에는 서고트족 왕국이, 그 북쪽으로는 살리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 왕국이 자리를 잡았으며 5세기말에는 강력한 두 왕국이 새롭게 들어섰다. 갈리아에서는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해 주교의 지지를 얻어 활발한 정복에 나서 큰 영토를 차지하고 프랑크 왕국을 건설했다. 한편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테오도리쿠스)는 동로마 황제 제노의 요청에 의해 오도아케르를 이탈리아에서 쫓아낸 뒤 494년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고트족이 차지한 북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옛 제국의 제도를 유지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프랑크 왕국이 지중해까지 팽창하는 것을 막고 동고트 왕국을 론 강 유역까지 팽창시켰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동고트 왕국은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이탈리아 재정복으로 멸망했다.

 

로마 제국의 몰락은 일반 국민의 낮은 생산 및 생활수준에 비해 고대 세계로서는 너무나 무거운 상부구조와 세금을 들 수 있다. 군대는 많은 유지비가 필요한 반면 규모는 충분하지 못했고 심지어 인구도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이민족의 대규모 침략이었다. 여기서 서로마는 몰락한 반면 동로마는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 동로마는 부유하고 인구도 조밀했으며 국가구조도 서로마보다 건전했다. 서로마는 소작인을 착취하는 대토지 소유자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고, 국민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없이 무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로마는 또한 외부로부터 별로 위협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방어하기도 쉬웠다. 반면 서로마는 국경을 가지고 있어서 엄청난 비용이 드는 대규모 군대의 유지와 수많은 요새가 필요했고, 일단 변경이 침략당하자 핵심지역인 갈리아와 이탈리아는 걷잡을 수 없는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Macropaedia| 李演圭 참조집필

 

 

 

4부,인종문제,동서의 갈등,분열,증오,전쟁,홀로코스티(대학살)

 

 

 

 

 

훈족(Hun) - 370년경 유럽 남동부를 침략해 이후 140여년 동안 유럽 남동부와 중부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유목민족.4세기 중엽 이후 볼가 강 동쪽에서 모습을 나타내, 볼가 강과 돈 강 사이의 평원지대를 지배하던 알라니족을 무너뜨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돈 강과 드네스트르 강 사이에 있던 동고트 제국을 정복했다. 376년경에는 대략 지금의 루마니아 지역에 살고 있던 서고트족을 정복했으며 이로써 로마 제국의 도나우 강 국경지역에까지 세력을 뻗게 되었다.

 

훈족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기록은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가 395년경에 쓴 기록들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농경(農耕) 방법조차 몰랐던 원시적인 유목민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착해서 살 수 있는 집도 없었으며 왕도 없었는데, 이들 내부의 각 소집단들은, 암미아누스의 표현대로라면, 영장(靈長 primate)들의 지도를 받았다. 4세기에 훈족 전체를 통괄해 지배하던 지도자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훈족은 전사(戰士)로서 유럽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마상(馬上) 사수(射手)들이었으며, 완벽한 승마술, 잔인한 공격과 예측을 불허하는 반격 능력, 그리고 전략적인 기동성 등으로 어떤 싸움에서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서고트족이 멸망한 후 반세기 동안 이들은 중앙 유럽의 수많은 게르만족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로마 제국과도 맞서 싸웠다. 432년에 이르러 훈족 내부의 여러 소집단들의 지도력은 한 명의 왕 루아(또는 루길라)에게 집중되었다. 434년 루아 왕이 죽자 두 조카 블레다아틸라가 왕권을 계승했다. 두 지도자는 마르구스에서 동로마 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는데, 이 협정의 결과 로마는 기존에 훈족에게 바쳤던 공물의 2배를 바쳐야 했다. 그러나 아마도 로마 제국이 협정에 조인된 액수를 다 채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441년 아틸라는 로마 제국의 도나우 강 국경 지역을 공략해 콘스탄티노플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445년경 아틸라는 블레다를 살해했으며, 447년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동로마 제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그는 발칸 지역을 정벌하고 그리스의 테르모필라이까지 남진(南進)했다. 암미아누스가 살던 당시 이래로 훈족은 로마 제국과의 협정과, 로마 제국에 대한 약탈, 그리고 로마 제국에 포로를 팔아 넘기는 등의 방법을 통해 막대한 양의 금(金)을 모으게 되었다. 이러한 부(富)의 유입 결과 훈족 사회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군사적 지배권은 아틸라 가문에서 대대로 계승했고, 아틸라 자신은 전쟁시에나 평화시에나 절대적인 독재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차출된 사람들'(logades)을 이용해 거대한 제국을 다스렸는데, 이들은 정부에서 일하는 동시에 아틸라에게 굴복한 종속 민족들에게서 음식과 공물을 거두어 들이는 역할을 했다.

 

451년 아틸라는 갈리아 지역을 공격했으나 카탈라우니아 평야 전투(또는 마우리카 전투)에서 로마-서고트족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이 싸움에서의 패배는 아틸라의 최초이자 유일한 패배였다. 452년 훈족은 이탈리아를 침략해 여러 도시들을 차지했으나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453년 아틸라가 죽자 여러 명의 아들이 제국을 분할해 갑자기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이후 이들은 반란을 일으킨 종속왕국들과 끊임없는 소모전을 벌였으며, 결국 455년 판노니아의 네다오 강 대전투에서 게피다이, 동고트, 헤룰리, 기타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연합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동로마 제국 정부는 이후 훈족들과의 접경지역인 국경지대들을 폐쇄했으며, 훈족들은 역사속에서 아무런 주요한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점차로 사회적·정치적인 통일성마저도 상실해갔다. 5, 6세기에 인도와 이란을 침략한 헤프탈족과 일찍이 중국인에게 알려진 흉노족이 훈족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들과 훈족과의 관계는 지금도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고트(Goth)- 필리머(Filimer)의 두 아들→ 발티(Balthi), 아말(Amal)

 

-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로마 제국을 수백 년간 괴롭혔다. 6세기 중엽 고트족의 역사가 요르다네스가 기록한 전설에 따르면, 고트족은 원래 스칸디나비아 남부에 살던 부족으로 베리그 왕을 따라 3척의 배를 타고 발트 해 남쪽 해안으로 건너가 그곳에 살던 반달족과 다른 게르만족을 물리치고 정착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당시 고트족의 특징이 둥근 방패와 짧은 칼, 그리고 왕에 대한 복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르다네스는 또 그후 고트족이 필리메르 왕을 따라 비수아강 지역에서 남쪽으로 이주했으며, 온갖 모험을 겪은 뒤 흑해에 다다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트족의 이러한 이동은 2세기 후반에 일어났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통치하던(161~180) 로마제국의 도나우 강 쪽 국경을 게르만 일족이 강하게 압박한 것은 고트족이 북쪽에서 밀고 내려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트족은 3세기에 끊임없이 로마 제국의 소아시아 지방과 발칸 반도를 침략했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다스리던 시기(270~275)에는 로마인들도 도나우 강 건너편의 다키아(오늘날의 루마니아) 지방을 고트족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후 도나우 강과 드네스트르 강 사이에서 살던 고트족을 서고트족,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살던 고트족을 동고트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트족은 다른 게르만족보다 더 진보된 정치적 조직을 발전시켜, 왕을 정점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4세기경에는 로마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서로 적대하던 시기도 있었으나, 평화의 시기에는 문화적인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트족의 귀족들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고트족 사람들은 로마의 도로망을 잘 알고 있었다. 4세기 중엽, 울필라스를 필두로 고트족의 개종이 시작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거의 모든 고트족이 그리스도 교도가 되었다. 그들은 아리우스파(이단종파)를 옹호하던 콘스탄티우스 2세의 치세중에 아리우스파 전도사들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그 뒤로도 계속 아리우스파의 교리를 신봉했다. 이러한 상황은 고트족이 로마 제국으로 이동해 들어간 뒤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동고트족, 서고트족

 

고트족의 개종 -  conversion of the Goths 고트족이 그리스도교(아리우스주의)로 개종한 과정. 이는 교회사와 유럽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최초의 개종은 고트인들이 소아시아를 침공하여 끌고온 포로들의 전도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카파도키아의 대(大) 바실리우스에 따르면, 259~268년에 로마의 교황이었던 디오니시우스가 카파도키아에서 사로잡혀간 포로들을 구해내기 위하여 몇 사람을 파견했다고 한다. 또한 바실리우스가 데살로니카의 감독인 아스콜리우스에게 보낸 편지는 고트인들이 카파도키아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으리라는 확신을 뒷받침해 주고, 또 유티케스라고 하는 사람이 고트인들 중에 있으면서 그들을 개종시킨 포로들 가운데 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 쓴 글에서 야만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영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글들로 미루어 볼 때 고트족을 포함하여 말한 것으로 보인다. 프로코피우스 역시 크리미아 지방의 고트족에 관해 언급하면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치세기에 그들은 황제에게 최근 사망한 그들의 감독을 대신할 다른 감독을 보내달라고 청원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들을 전반적으로 종합해 볼 때, 3세기 중엽에 이미 유크신에 접경한 고트인들 사이에는 정통 그리스도교의 전승이 계속되었음이 분명한 것 같다.

 

4세기 중엽 울필라스를 필두로 고트족의 개종이 시작되었다. 울필라스 시대 이전에는 도나우 이북의 고트인들 중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이 있었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울필라스가 동족 가운데서 그리스도교 선교사로 일하면서 심한 박해를 받았으므로, 콘스탄티우스는 348년경 울필라스가 그의 아리우스파 개종자들과 함께 로마 제국의 영내로 입국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한편 울필라스의 시대를 전후하여 도나우 북방의 고트인들에게 또 다른 방향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례도 있었다.

 

울필라스의 고트족이 로마의 속주로 들어온지 거의 30년 후에 거대한 무리의 서고트족이 도나우를 넘어 이동해 왔다. 그들이 어떻게 아리우스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는지 또한 그들과 울필라스 사이에 어떤 뚜렷한 관련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Posted by T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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