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35번째로 공부하는,성인의 통공에 관한 전례해석을 원래는 수정하여서,수정하기 전의 입력날자 7월15일을 그대로 두고서,완성할 계획이었지만,예상외로 내용이 방대해져서(긴 글을 싫어하는 신세대들을 대상으로) 따로 하나 더 작성중이네요.내친 김에 이 글은 수정해서 다시 재발행했고요!! 오늘 7월 24일에 하나 더 만들어지는 글에서는,마침 연중16주간 수요일,오늘의 미사에서 등장하는 마태오복음13장-씨뿌리는 사람비유가 나오는 성서말씀을 위주로 성인의 통공을 설명할 생각입니다.

 

 

 

서른 다섯 번째로 공부하는 전례해석에서,오늘의 키워드는 "성인의 통공"이다.

 

 

 

개신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가장 낯선 교리가 바로 성인의 통공이다.사도신경에도 나오는 성인의 통공,그동안 당신이 아무 생각없이 앵무새처럼 고백해온,성령을 믿으며,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

 

당신은 정말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정말 당신은,영원한 삶을 믿는가? 정말 성인의 통공을 믿는가? 도대체 성인의 통공이 무엇인가?

 

?????? !!!!!!!!  웁스 OOOOOOPS!!!

 

 

그래서 교리공부가 필요합니다 !!!여기 클릭 ☞서공석신부가 읽어야 할 현대의 교리교육 (Catechesi tradendae),요한바오로2세

 

 

 

 

그런데,신앙인들 대부분이 심지어는 신부님들조차 모르는 진리의 문제로서,정말 중요한 사실이,성인의 통공이란,풀어놓고 보니,살아계신 하느님으로서의 성령이 활동한다는 증거다.이렇게 3번째 위격이신 하느님 성령께서는,성스럽고 거룩하신 귀신이라서,악랄하게 인간사를 좌지우지하며 교란시키는 악령과는 달리,절대로 자기 존재를 나타내지 않는 상태로,쥐도새도 모르게 움직이시며,그야말로 신출귀몰하는 귀신처럼 행동하시는 분이시다.자세한 내용은 여기 클릭 ☞로마서-최초 교리서,사도행전(루카의 증언),토리노의 수의(아마포)

 

우리 신앙인들에게,전혀 자신의 정체를 들러내지 않는 분,성령의 활동!!!

 

3위의 하느님이신,성부,성자,성령....이 3분 중에서 가장 난해하며 우리 신앙의 핵심이신 분,오늘은,성 보나벤투라의 축일 7월15일(프란치스코회 정식으로 발족-하나의 수도회로 체계화하신 분,훗날 이냐시오성인에게 영감을 주어서 예수회를 만들도록 도운 분,성인의 통공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있는 성인의 축일)이다.날라리신자를 포함해서,대부분의 한국 천주교신자들이 성 프란치스코는 누구인가 알지만 오늘의 주인공이신 이 성 보나벤투라는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이 분의 삶을 통해서 특별하게 성인의 통공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시간으로 활용해보자.

 

특히 프란치스코성인과 이 보나벤투라성인의 관계가 정말 극적인 성령의 활동의 결과에 속한다!그 당시 새로운 밀레니엄시대였던 이 AD1000년도 무렵이란,2013년도인 현재,막 삼천년기를 들어서는 싯점인 지금과 같은 혼돈의 시대였다.자세한 내용은 여기 클릭 쓰러져가는 교회를 살려라-그레고리오7세 교황◆그레고리오개혁(1050-1080)구본식신부

 

 

이 글에서는 성인의통공을 개괄적으로 공부하는 내용이니,반드시 필요한 정보로서,프란치스코회와 프란치스코성인위주로 공부합니다.보나벤투라성인의 영성을 중심으로,그 분이 수도회규칙을 완성하여,오늘날까지 꾸준하게 이어지는 프란치스코성인의 길이 무엇인지, 성인의 통공이란 무엇인지,포스팅 따로 완성했으니,이동해서 읽어주세요 클릭 ☞씨 뿌리는 사람,좋은 땅-탈출기(16장,이집트탈출후 광야살이 양식 만나)

 

 

 

 

보나벤투라(Bonaventure,1217?-1274년)- 축일 7월15일, 1218년경 이탈리아 바뇨레아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얻어 자기가 속해 있는 수도회의 학생들을 훌륭하게 가르쳤다. 프란치스꼬회의 총장이 되어 지혜롭고 사려 깊게 회를 다스렸다. 알바노의 추기경이 된 후 1274년 리옹에서 세상을 떠났다. 철학과 신학 분야에서 권위 있는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굿뉴스 오늘의 성인에서 발췌 - 그는 1238년에 작은 형제회 수도자가 되어 영국의 유명한 헤일스의 알렉산데르 문하에서 공부하려고 파리(Paris)로 갔으며, 그로부터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다. 그는 1248-1255년까지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과 성서를 가르쳤는데, 그의 강의는 새로운 탁발 수도자를 반대하던 교수들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생 아무르의 빌리암을 비롯한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 논쟁에 뛰어들어서,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남겼다. 마침내 1256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생-아무르를 단죄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켰다. 탁발 수도회가 파리에서 다시 부흥될 때 그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와 함께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와 비슷한 초창기에 성 보나벤투라는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피선되었고, 수도회의 내부 분쟁자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하였으며, 온건한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극단주의 그룹을 단죄하였다. 1260년 나르본(Narbonne)에서 열린 수도회의 총회에서 그는 오랫동안 수도회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는 회칙에 대한 회헌을 선포하였다. 그는 1265년 요크의 대주교좌를 거절하였고, 1271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의 선출을 적극 지지하였다. 1273년 그는 알바노(Albano)의 교구장 추기경이 되었으며, 다음 해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로마(Roma)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토의하려는 리옹(Lyon) 공의회의 의사일정을 짜도록 그를 위촉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기 중인 7월 15일에 리옹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프란치스코(Francis,1181/1182?-1226년,축일 10월4일) 성인이 누구인지,프란치스코회가 무엇인지는 이 포스팅 하단에 자세한 내용이 나오는-프란체스코와 작은형제들(왜관의 베네딕토수도원홈페이지)이란 제목의 자료 놓치지 마시라.


 

 

성 보나벤투라(1217?-1274년,스승인 프란치스코의 청빈의 삶을 살며,그 삶을 통해서 세상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들로 구성되어,세속의권력과 재물욕으로 타락한 제도권으로부터 박해의 대상이 된 상태,자생적으로 만들어진 탁발승 프란치스코회가, 교도권의 승인을 얻도록 발벗고 돌아다니며,교황님의 승인을 정식으로 얻어서 당당히 수도회로 승격시켰던 인물) → →

 

파도바의 안토니오(Anthony 1195-1231 축일 6월13일) 시기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프란치스코성인과 보나벤투라성인의 딱 중간에 위치한 이 성 안토니오는 이탈리아지역,로마중심을 벗어나서 전 대륙으로 확장되는 프란치스코회의 위력을 보인 성인이다.특히 히스페닉계카톨릭에서 가장 흠모하는 분이며,내가 살고 있는 텍사스에도 그 분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도시가 있고,그분의 속명에 속하는 페르난도란 이름의 성당은 유명한 관광지인 알라모와 리버워크 옆에 위치해서,이 성당에 미사 한번 참석하려면 주차 고민을 먼저 할만큼,시민의 사랑을 받는 주교좌성당이다.

 

포르투갈 리스본(Lisbo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페르난도(Fernandus)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성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포르투갈 국왕 알폰소 2세의 궁중기사의 아들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신앙심 깊은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리스본 주교좌성당 부속학교에서 교육을 받다가 15세 되는 해에 집 근처에 있던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212년에는 자신을 찾아오는 친구와 친척들을 피하기 위해 다시 쿠임브라(Coimbra)에 있는 성 십자가 참사 수도회로 옮겨 8년 동안 공부와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 후 1219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220년 1월 16일 모르코에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순교자들의 유해가 성 십자가 성당으로 옮겨져 왔는데, 이때 자신도 순교자가 되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그 해 코임브라의 작은 형제회로 옮겨 안토니우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곧바로 아프리카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그의 소망대로 무어인들에게 설교하기 위하여 모르코로 파견되었으나, 도착 직후 병으로 인하여 되돌아와야만 했다.

   그 후 1221년의 아시시(Assisi)의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에서 개최된 작은 형제회 총회에 참석했다가 쿠임브라에서 조용히 은둔하며 고행 생활을 하던 그는 포를리(Forli) 근처의 몬테파올로(Montepaolo) 운둔소로 가게 되었다. 어느 날 쿠임브라 관구장인 그란치아노(Granziano) 신부와 함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를리로 갔는데, 마침 미사에서 강론할 마땅한 사람이 없어 안토니우스가 맡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설교가로서의 큰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그는 가타리파가 성행하던 북부 이탈리아 지방과 알비파(Albigenses)가 성행하던 남부 프랑스에서 설교하라는 명을 받고 활발한 활동을 시작해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뛰어난 설교와 화술은 불같았고, 설득력이 있었으며 모여든 군중들을 매료시켰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군중들은 구름처럼 운집하였다. 그는 작은 형제회의 첫 번째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설교직에 더욱 헌신하기 위하여 공식적인 직책에서 면제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고해성사를 주는 신부로서의 그의 성공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중 1226년 10월 프란치스코 성인이 사망하자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듬해 에밀리아(Emilia) 관구의 관구장 대리로 선출되었으나, 설교에 전념하기 위해 1230년에 사임한 뒤 파도바 수도원에 정착하면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파도바 전체를 완전히 개종시킨 그의 설교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채무자,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는 일을 비롯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고 이단자를 개종시키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였다.

   1231년 그는 수종 등을 겸한 열병으로 잠시 요양할 목적으로 캄포 산 피에로(Campo San Piero)로 갔으나, 병이 심해져 파도바로 되돌아오는 길에 베로나(Verona)의 아르첼라(Arcella)에 있는 클라라 수녀회에서 운명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그의 유해는 현재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이례적으로 바로 다음 해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46년에는 비오 12세(Pius XII)로부터 교회학자, 복음적인 박사로 선언되었다.


→→ →성 안토니우스의 수많은 기적 이야기와 설교 능력은 가톨릭 교회의 전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를 능가할 만한 설교가가 나오기는 힘들 정도로 높이 평가해왔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안토니우스를 일컬어 ‘이단자들을 부수는 망치’, ‘살아있는 계약의 궤’라고 하였으며,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 안토니우스 성인에게 기도하면 곧바로 찾는다는 전설이 생겼다. 이는 어느 수련자가 허락없이 성인의 시편집을 가져갔다가 성인이 발현하여 돌려달라고 해서 그 시편집을 돌려주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일생 그들을 위해 헌신했던 성인의 이름을 따서 19세기에 '안토니우스 성인의 빵'이라는 구호단체가 설립되어 오늘날까지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를 그림으로 그릴 때에는 팔에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한 방문자가 안토니우스 성인이 탈혼 중에 일어난 이 일을 기록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1491-1556년,축일  예수회 설립) →필독하시라 클릭 ☞로욜라의 이냐시오(분별력 기르기),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 찬미가

 

 

→ 살레시오 (Francis de Sales1567-1622년, 축일 1월 24일) 근대의 성인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 또는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영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들 중의 한 분으로 일컬어지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독창적 방식으로 교회의 정통적 영성을 가르치고 생활하며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성성(聖性)에의 보편적 성소의 선각자였다. 성인(聖人)으로 불린 이는 일부 소수의 특전 받은 사람이 아니고 주어진 각 생활 상태에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중요한 교의는 그 후 약 400년 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밝히고 공식으로 천명하게 되는 진리('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39~42항 참조)이다.여기 클릭 ☞   

 

돈 보스코(John Bosco 1815-1888년,축일 1월31일 ) 살레시오회 설립

 

→→→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이어지는 성령의 활동 - 내가 하느님의 아들인지 못믿겠거든,내가 한 일을 보고 믿어라!! 성령께서 나를 돕고 있다는 증거를 보고도 못 믿는 것은 구원받지 못할 신세란 뜻,이제 그만 잠깨어,일어나거라,여기 클릭 ☞새교황님 프란체스코는 누구인가(못믿겠거든 내가 한 일을 보고 믿어라)-요한복음 5장,14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교회헌장(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성 보나벤뚜라
 
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 편집부
 
 
1. 성 보나벤뚜라의 생애
 
성 보나벤뚜라의 중부 이딸리아 박뇨 레지오에서 1217/1221년에 탄생하였다. 성인께서 태어난 지 일년이 채 되지 않아서 매우 심하게 아팠다. 그때 마침 성프란치스꼬께서 보나벤뚜라 성인이 살고 있는 도시를 지나가게 되었다. 성인의 어머니께서는 아기를 안고 성프란치스꼬가 지나갈 때 아픈 아기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성프란치스꼬께서 그 아기를 보자마자 단지 “Oh! Bona ventura”라고 말하였다. 이 뜻은 “오! 참 좋은 행운이여”라는 뜻이다. 그러자 아기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아기의 이름은 보나벤뚜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후 보나벤뚜라 성인은 17세에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다. 그후 빠리대학에서 수학하고 다시 그곳에서 강의하였다. 37세에 프란치스꼬 수도회 총장이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1271-1276)는 그 당시 일어났던 어려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해졌다. 그 어려운 문제들 중에서 특히 성직자의 규율문제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지에서의 곤란한 일 그리고 동방교회를 로마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일들이었다.

이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황은 제2차 리용 공의회(1274)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위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하여 그 시대의 권위있는 학자들을 불렀다. 교황께서 부른 학자들 중에는 보나벤뚜라 성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은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나 리용 공의회를 하면서 보나벤뚜라 성인은 운명하였다.

이제 보나벤뚜라 성인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자. 성인에 대해서 크게 4가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교회 학자로서의 성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가 프란치스꼬회 들어갈 때는 청년이었다.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한 후 그는 빠리대학에서 열정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매우 착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기에 빠리대학 교수였던 알렉산더는 “보나벤뚜라는 원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알렉산더 교수 수하에서 보나벤뚜라는 지혜와 완덕에 있어서 날로 진보하였다. 그는 27살부터 자기가 공부하던 빠리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강의를 하였다. 우리 교회에서 보나벤뚜라를 세라핌적인 학자라고 한다. 이는 그가 “지혜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말하였고 또 그렇게 생활했기 때문이다.

보나벤뚜라는 “우리 지능을 밝히는 빛이 우리 마을까지 감동을 시키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 빛이다.”라고 말하였다. 자기가 하느님의 사랑을 불태우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위대한 학자로서 그는 우쭐거리지도 않고 작은 형제처럼 겸손하게 살았다.

어느날 그는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할머니가 “보나벤뚜라가 이렇게 큰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하느님께서 잘 알고 있으니 죽은 후에 틀림없이 천당에 가게되어 하느님의 가장 앞자리에 앉으실 것입니다.”하고 말하자 보나벤뚜라는 “나보다 할머니가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한다.
 
2) 대 성인으로서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가 사람들의 정신을 지혜롭게 밝혀주며 마음을 훈계하고 하느님의 사랑에까지 이르도록 하였다. 어느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뚜라를 찾아와서 “어디에서, 어떻게 그런 지혜를 배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보나벤뚜라는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나의 지혜의 샘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또 다시 어느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뚜라를 찾아갔는데 마침 그때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꼬 성인의 전기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보고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인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성인을 방해선 안되지!”하며 발길을 돌렸다는 일화도 있다. 보나벤뚜라는 자신의 삶이기도 한 완덕으로 가는 길에 대하여 가르치는 많은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3) 프란치스꼬 수도회 총장으로서의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는 빠리 대학에서 오랫동안 가르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약관 37세에 수도회 총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성 프란치스꼬가 돌아가신지 3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프란치스꼬 성인이 세운 수도회는 날로 발전하고 커져만 갔다. 보나벤뚜라를 일컬어 “제2의 창설자”라 불릴 정도로 수도회의 조직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특히 프란치스꼬 성인이 만든 회칙을 시대 상황에 맞게끔 형제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작은 형제회의 첫회헌 “나르보나 회헌”(Narbona)을 만들었다.
 
4) 알바노의 추기경으로서의 보나벤뚜라
 
성교회는 교회에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보나벤뚜라의 지혜와 성덕을 높이 사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보나벤뚜라는 그 직책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회칙의 정신에 따라 순명할 수밖에 없었다. 추기경 임명장을 가지고 왔던 전달자는 보나벤뚜라를 부엌에서 만났다고 한다.1274년 추기경으로써 제2차 리용 공의회에 참석 중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2. 성 보나벤뚜라의 연보
 
작은 형제회는 사부 성 프란치스꼬 이래로 별처럼 빛나는 많은 성인을 배출하였다. 비록 드러남이 없는 숨겨진 생활 속에서도 그분들이 끼친 성덕의 향기는 작은 형제회를 더 향기로운 단체로 만들고 있다.뭇별들 가운데서 샛별만이 다른 별들이 모두 잠든 새벽까지 찬란한 빛을 잃지 않는 것처럼 보나벤뚜라 성인은 작은 형제회 안에서 시대의 흐름에도 구애됨이 없이 빛나는 샛별과 같은 존재이다.

그분의 겸허한 수도자로서, 학자로서, 총장으로서 서로 조화시키기 힘든 상반된 면모를 훌륭히 결합시켜 후세의 모범이 되었으니 비록 총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아래서도 작은 형제로서의 모습을 조금도 손상함이 없이 겸손과 고행으로 일관된 생활을 하셨으며, 자칫하면 학문을 업신여기기 쉬운 작은 형제들의 생활에서도 수많은 저술과 강의로서 수도생활의 활력은 물론 교회 신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는데, 특히 토마스 일변도의 사변 위주로 흐르는 중세 신학에 정적 사랑의 훈기를 불어넣음으로 경화되기 쉬운 교회에 넘치는 생명감을 불어넣었다.

학자인 성인은 철학자로서 보다 신학자로서 더 유명하니 단테의 신곡 천국편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등한 자격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신비 신학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되고 있다. 그의 체계에서 철학적인 요소만 추출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철학의 목적과 신학의 목적 사이에 일련의 연속성을 제시하기 위하여 노력했으며 철학이 비록 제한을 받는 상태이긴 해도 독자적인 자유성으로 진실을 추구하고 있으며 철학이 가져오는 지식은 인간의 마음을 가없이 상승시켜 진리에 이르게 하는 무대로 보았다.

그는 성 프란치스꼬와 같이 신비적인 방법에 의하여 성취된 하느님께 대한 지식만이 생명을 낳아 참된 지식으로 보았다. 총장으로써 그는 너무나 어렵고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으니 초창기에 적은 수였던 형제회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급히 성장함에 따라 예기치 못했던 많은 어려움 들이 야기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요아킴 원장의 사건인데 그의 과격한 신비적 이단사상에 많은 형제들이 동조하고 심지어는 전임 총장이었던 파르마의 요한까지 여기에 동조하자 형제회가 분열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탁월한 덕행을 겸비하고 그 성덕을 인정하는 전임 총장을 단죄한다는 것은 크게 난처한 일이었으나 성인은 과감히 단죄함으로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르보나 회헌을 작성하여 형제회의 기초를 굳혔으며 당시 여러 가지로 나돌고 있던 사부 프란치스꼬의 전기로 인한 분쟁을 일소하기 위하여 새로운 전기를 만들기로 하고 아씨시와 라베르나에 몸소 가셔서 아직 생존중인 사부님의 동료들을 만나 그분들의 진술을 참고해서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부님의 전기를 만들었다. 여기서 성인은 현대 역사가들이 사용하는 방법, 즉 연대기적인 형태로 서술하기보다는 사부님의 영적인 초상화를 그림으로서 모든 이에게 성덕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제까지 수도자로서 학자로서 총장으로서 성 보나벤뚜라의 면모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오늘날 어느 시대에 비길 수 없을 만큼 고전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는데 그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탁월한 이유중의 하나는 비록 오늘 우리가 지닌 지혜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며 찰나적이며 편리한 것보다는 영성적인 것의 우위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라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 성 보나벤뚜라를 고찰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믿으며 성인의 생애와 사상 이해에 다소나마 보탬이 될까하여 아래에 성인의 연보를 간략하게 기재하다.
 
1217  이탈리아 박뇨 레지오에서 출생
1226  소년시기에 병이 들었으나 그의 어머니가 프란치스꼬에게 전구하여 병이 회복됨
1235-1243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 득할 때까지 수학함
1243  파리에 있는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고 로마관구에 등록함 수도원에서 알렉산더 할레스 문하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그의 사망 후 (1245) 오도네 문하에서 연구를 계속함
1250-1252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룸바르두스이 명제집” 저술
1253-1257 파리대학에서 교수생활을 계속하면서 그의 사상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작품인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3편의 토론집을 완성함
1254-1257 작은 형제회 신학교의 책임자가 됨
  로마에서 교황 알렉산더 4세가 참석한 회의에서 프란치스꼬회 총장으로 선출됨
1257.4  작은 형제회 첫회헌 작성(파리에서)
1259  프랑스 관구 총회 개최
  라베르나산에서 “영혼의 여정” 저술
1260  라르보네 총회(나르보네 회헌 작성)
  성녀 글라라 귀천
1261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거주
1262  “성 스테파노의 발견” 강론
1263  빠도바의 성 안또니오 귀천
1265  클레멘스 4세가 대주교로 임명했으나 사양함
  파리에서 총회 개회(여기서 유명한 “성 프란치스꼬에 대하여” 강론) 
1267  독서 강화집 “십계명에 대하여” 저술
1268  독서 강화집 “성령칠은에 대하여” 저술
1270  스페인과 독일에서 체류
1272  로마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대관식에 참석 리용총회 참석
1273  독서 강화집 “창조의 여섯째날” 저술
  후에 인노첸시오 5세가 된 도미니꼬회의 뻬드로네프란타샤와 후에 요한 21세가 된 빼뜨로 히스파뇨와 함께 알바뇨의 주교겸 추기경으로 임명됨
1274  총회 개최 여기서 예로시모 형제가 총장으로 선출됨.
  제4차 리용 공의회 참석
1274.7.15 공의회 도중 귀천
  리용의 프란치스꼬 수도원에서 거행된 장례식은 교황이 주례하고 공의회에 참석했던 모든 고부들이 참석
1482  교황 식스또 4세는 칙서 "천상 고향 예루살렘""으로 보나벤뚜라를 성인품에 올림
1587  교황 식스또 5세는 칙서 "환호하는 예루살렘"으로 보나벤뚜에게 "교회박사" 의 칭호를 내림
 

 

프란치스꼬회
 
프란체스코와 그의 형제들
 
1. 프란체스코는 아씨시를 생각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매우 오래된 이 로마의 도시는 12세기 후반부에 뻬루지아(Perugia) 정면의 스폴레또(Spoleto)라는 제국 공작의 영지에 속한 쿠네오(cuneo, 이태리 북부의 도시)를 설립하였다. 반면,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뻬루지아는 교황의 권위 하에 있었다. 황제의 권위이든 교황의 권위이든 하나의 참된 권위의 부재(不在)로 인해 아씨시에서 귀족들과 서민 계층에 속한 귀족이 아닌 소위 ‘더 작은 자들’(minori) 간에 잦은 대립이 일어났다. 1203년에 귀족계급과 백성 간에 최초로 평화가 정착되었다. 당시 아씨시의 경제 상황과 생활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 도시 공동체에 필요한 일련의 활동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예컨대, 시장, 기술자들, 많은 공증인, 화폐 교역,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정신을 가진 상인들이 있었다. 또한 소외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다. 도시들에는 중세 초기 내내 농촌에 존재했던 가난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가난이 생겨났다. 농촌에서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 어떤 먹을거리를 찾았던 반면, 도시에서 극빈자는 구제수단을 발견하지 못했다. 극단적인 경우, 나병환자들과 같이 불쌍한 사람들은 직접 시민사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제외되었다.
 
프란체스코는 그 도시의 상인 계층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에 속하는 매우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rdone)는 아씨시에 상점을 하나 소유하였고, 고급 옷감을 취급하는 포목상을 하였다. 그는 고급 천을 수입하기 위해서 자주 프랑스를 들락거렸고, 수입한 천들을 다시 많은 이윤을 남기고 판매하였다. 결국 그는 이윤 추구를 원하는 상업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대리인이었다. 만약 프란체스코의 부친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면, 그의 모친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불확실할 정도로 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가문에서 프란체스코는 1181-1182년경 어느 날 세상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을 때, 그가 장남으로 출생하였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부친이 없을 때 그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부친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아기 이름을 프란체스코로 바꾸었다. ‘프란체스코’는 그 당시 말로 ‘프랑스인’을 의미하였다. 우리는 그의 유년기와 문화적 양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부친의 계획으로 프란체스코는 성년이 되면 매우 번창한 가내 상업을 맡아 경영하도록 예정되었다. 그는 점차 훌륭한 상인이 될 정도로 부친의 정력적이고 유능한 협력자로 성장하였다.
 
그렇지만 이 실업가는 회심, 다시 말해 가치 기준의 완전한 변화를 체험한다. 프란체스코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근본적인 심리적 변화를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나, 프란체스코 형제에게 그렇게 참회를 시작하게 하셨다. 내가 죄 중에 있을 때,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견디기 힘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인도하셨고, 나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내가 그들을 떠날 때, 나에게 불쾌하게 보였던 것이 영혼과 육체의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 후 나는 잠시 머문 다음 세상을 포기하였다.” 나병환자들과의 만남은 그의 회심에 있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이전의 시기를 죄의 시기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그는 유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자신의 삶 전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돌려버렸다.
 
그의 회심의 결정적 동기는 나병환자들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된 것처럼 묘사된다. 그 결과 프란체스코는 중세의 전형적인 의미로 이해된 “세상”을 포기한다. 프란체스코 자신을 통해서 그렇듯 간결하게 서술된 이 회심에 대해 그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가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은 프란체스코 양심의 내밀한 침묵 속에 감추어져 있다.
 
‘죄 중에 있다’는 것은 현세의 쾌락들과 연결된 삶을 사는 것을 뜻하며, 그리스도를 잊는 것을 함축한다. 전설에 의하면, 프란체스코는 유능한 상인이었지만, 자기 부친보다 더 쾌활하고 자유분방했다. 그는 아씨시에서 친구들의 무리와 함께 밤낮으로 무위도식하며 벌어들인 돈을 연회와 오락으로 모두 탕진하면서 노래 부르고 즐기기를 좋아했다. 그러자 그의 부모는 상인의 아들인 그가 마치 위대한 군주의 자손인양 사치스런 생활을 한다고 자주 그를 힐책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부유하였고 또 아들을 매우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었다. 프란체스코는 화려한 옷을 즐겨 입었고, 그의 생활양식은 “기사도적”이었다.

 

 

결국 그는 젊은 상인이었지만, 사업 능력이 있고 호사와 사치를 사랑하는, 그리고 관대와 관용과 품위로 자신을 빛나게 했던 생활양식에 빠졌던 젊은이였다. 프란체스코는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고 뛰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지닌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부로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꿈들은 가능했다. 왜냐하면 그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번창하여 단지 사회적인 수준에서만 그 가문을 귀족계급과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젊은 상인의 기사도적 야심이 실현될 수 있는 구체적인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프란체스코가 20살의 나이로 1202년에 있었던 꼴레스트라다(Collestrada) 전투에 참여한 것은 공적을 쌓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패하여 프란체스코는 당시 적지인 뻬루지아의 감옥에서 1년간 갇혀있었다. 그는 통상 귀족계급에 속해있던 기사들 사이에서 전투하였다. 이제 그도 비로소 귀족이 되는 순간에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1203과 1204년 사이에 풀려나 이전과 같은 야심들을 품은 채 아씨시로 되돌아왔다. 군사 원정을 위해 뿔뤼아(Puglia)로 가려는 생각으로 동료들을 찾고 있던 백작 젠틸레(Gentile)에 의해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시간이 왔다고 느꼈다. 원정대가 출동하게 된 동기는 이태리 남부의 광폭한 무정부상태에 대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염려 때문이었다. 값비싼 전쟁용 갑옷으로 완전하게 무장한 프란체스코는 밤에 하느님의 개입으로 보이는 매우 아름다운 꿈을 꾸게 된다. 1205년경 그의 나이 23세에 이제 그의 인생에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었다. 물론 그는 군사원정을 떠났지만, 하루 이틀 행군한 후 스폴레또(Spoleto) 근처에서 병이 났으며, 다시 꿈에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2. 아씨시로 되돌아 온 그는 평범한 일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는 과묵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영적 발전의 시작이었다. 그는 자기 양심 안에 은밀히 남아있었던 깊은 내적 결핍을 느꼈는데, 이는 그를 회개에로 이끌었다. 그것은 기사도적 관용에서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로운 관대함으로의 전이(轉移)였다.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변화의 분명한 표지 하나는 그 당시에 그가 했던 로마의 성 베드로 성전에로의 성지순례였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복음적 가난에 대한 그의 열망이 무르익어갔고, 따라서 그는 아씨시의 주교 귀도(Guido)에게 조언을 구하러 갔다. 기도를 통해서 해답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기도 중에 모든 가치 기준의 전환을 체험하였다. 프란체스코가 아씨시 교외에서 말을 타고가면서 한 나병환자를 만났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용기를 내 자연적인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말에서 내려 그에게 자선을 하였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며칠이 지난 다음 프란체스코는 상당한 돈을 가지고 나병환자들의 거주지로 갔다. 거기서 그들을 모아 그들 각자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각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그것은 그의 회심의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에게 있어 회심의 결과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언어로 참회자가 되기 위하여 세속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는 한 동굴로 은거하면서 첫 번째 경험을 하게 된다. 거기 머무는 동안 도시 사람들의 의혹과 당혹만큼이나 그에게 고민과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런 불안정한 상태에서 그는 어떤 신비 체험을 하는데, 곧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고상에 대한 체험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이 성인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기도하러 들어갔는데, 거기 있는 십자고상이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프란체스코, 내 집이 무너져가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가서 그것을 복구하여라.” 프란체스코는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어 실제로 무너졌고 또 다시 무너질 기미가 있었던 그 성당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부친 상점의 고급 직물에 대한 배당 몫을 팔아 그 성당을 즉시 복구하였고 또 그 성당 담당 사제에게 돈을 넘겨주었다. 폴리뇨(Foligno)에서 프란체스코가 행한 직물과 말의 판매는 그의 부친을 불안하게 하였고, 걱정이 된 그는 아들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처음에 프란체스코는 숨었지만, 후에 실성한 사람처럼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아씨시로 되돌아 왔다.
 
프란체스코에게 있어 이 경험은 불의 시련과도 같았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부친은 아들을 도시의 집정관들에게 데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프란체스코의 경우 교회의 권한 하에 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는 그를 심판할 권한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베르나르도네는 자기 아들을 주교의 법정에 소환하였다. 프란체스코는 거기에 출두하였고, 주교는 아직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을 부친에게 되돌려주라고 명령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이에 복종하여 그가 재판을 받았던 산타 루피나(Santa Rufina) 광장 한가운데서 판매하고 남은 돈 뿐만 아니라,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부친에게 양도하면서 주위에 서있던 군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이제부터 앞으로 나는 더 이상 ‘내 아버지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가 아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고 싶소.” 성난 부친은 돈과 옷을 걷어 그것들을 집으로 가져갔다. 주교는 감동하여 프란체스코를 팔로 감싸 자기 외투로 그를 덮어주었다. 이 철저한 포기로써 프란체스코는 사회의 한 계층에서 또 다른 계층으로의 전이, 다시 말해서 “더 중요한 이들”의 계층에서 “더 작은 자들” 혹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의 계층으로의 이동을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절대로 성직자나 사제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시 잘 보호된 사회계급으로 편입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심지어 보장된 매일의 양식을 소유한 수도승조차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이런 삶의 양식들을 크게 존경하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카타리파와 발도파 운동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그들을 절대로 비판하지 않았다. 스스로 사회의 변방인 가운데 하나이며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난한 이, 나병환자들 가운데 한 나병환자라고 생각하였던 프란체스코는 결코 그 누구도 비판할 수 없었다. 이웃사랑과 애덕이 부족한 부자를 거슬러서도 역시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프란체스코는 수도승도 사제도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뿐더러 더군다나 이단자이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충실한 아들이기를 원했다. 하느님과 사람들에 의해서 선택된 순간에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일해야 했다. 자신의 길을 발견한 프란체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돌아가 자기 손으로 그 성당을 복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은수자의 복장(검은 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두르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은)을 하고서 아씨시를 돌며 돌들을 구하였다. 그의 부친은 길에서 아들을 만날 때마다 욕을 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프란체스코는 문전걸식을 하며 성 다미아노 성당 복구를 위해 손일을 하면서 힘든 2년을 보냈다.
 
 
3. 성 다미아노 성당 복구를 마치자마자 또 다른 사건 하나가 프란체스코에게 결정적인 길을 지시하였다. 어느 날 프란체스코는 미사 복음에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하신 예수의 다음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지니지 마시오. 길을 떠날 때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시오.”(마태 10,9-10) 이 말씀은 철저한 가난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위한 내용과 방법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은수자의 복장을 벗고 보다 더 가난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가죽 띠 대신 끈으로 허리를 동이고 지팡이와 샌들을 포기하였다. 이렇게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새롭고 결정적인 단계를 시작하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회개를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몇몇 사람들이 그의 모범을 따르려는 충동을 느꼈다. 그들 가운데 첫 번째는 뀐따발레(Quintavalle) 출신의 베르나르도로서 그는 아씨시의 부유하고 유력한 고관이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두 번째 동료 삐에뜨로 까따니(Pietro Cattani)가 합세하였다. 베르나르도는 평신도였고, 삐에뜨로는 사제였다. 이 세 사람은 ‘거룩한 복음의 형태에 따라’(secundum formam sancti Evangelii) 살려고 하였다. 수도승 수도회와 비교할 때 이것은 하나의 새로움이었다. 수도승생활의 모토인 ‘초기 교회의 형태’(ecclesiae primitivae forma) 앞에 ‘거룩한 복음의 형태에 따라’ 사는 것은 참으로 새로운 면을 지니고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시대의 깊은 열망들에 응답하였고 또 교계제도에 대한 적대적인 동시대의 일탈들을 피하면서 특별하고 보다 현실적인 방식으로 철저하게 가난을 살았다.
 
당분간 이들에게는 잠을 잘 곳조차 없었다. 그들은 ‘싼타 마리아 델뤼 안젤리’(Santa Maria degli Angeli)라고 불렸던 버려진 허름한 경당 옆에 그들이 직접 지은 한 오두막을 피난처로 삼았다. 이 가난한 거처에서 두 명의 새로운 동료들, 평신도 에지디오(Egidio)와 예전에 성 다미아노 성당 관리 사제였던 실베스트로(Silvestro)가 그들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모두 아씨시 출신들로서 이 도시를 중심으로 설교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다른 도시에 설교하러 가기 위해 아씨시를 떠났다. 프란체스코와 에지디오는 안코나(Ancona)를 향해, 그리고 베르나르도와 삐에뜨로는 또 다른 미지의 지역을 향해서 떠났다. 그들이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돌아왔을 때, 또 다른 세 명의 동료들, 사바띠노(Sabatino), 모리꼬(Morico), 죠반니 데 까뻴라(Giovanni de Capella)가 그들과 합류하였다. 그 당시 베르나르도가 피렌쩨 (Firenze)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두 번째 파견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물었고, 그들은 “아씨시 출신의 참회자들”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의 회는 아직 수도회라고 언급되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아씨시로 되돌아왔을 때, 예기치 못한 일에 직면하였다. 숫자가 더 불어나면서 공간이 부족했고, 그들의 생계 문제가 더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프란체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발견한 해결책은 바로 탁발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을 경우에만 자선에 호소하였고, 보통 자신의 손으로 일하였다. 이제 12명에 달한 형제 공동체의 삶은 다음과 같았다. 즉, 그들 자신을 위한 기도와 노동과 가난의 삶, 다른 사람들의 영적이고 물질적인 필요들을 돌보는 봉사의 삶, 교회에 다니고 사제들을 존경하고 공적이든 사적이든 사람들을 권면하는 도시에서의 삶이었다.
 
프란체스코와 그의 동료들은 교황으로부터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하는데 필요한 승인과 권한을 얻기 위하여 로마 여행길에 오른다. 프란체스코는 로마에서 리더로서 행동하였고, 먼저 추기경들에게, 그런 다음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그들 삶의 양식을 제시하였다. 교황은 프란체스코적 삶의 계획을 구두로 승인하였다. 이 때가 1210년 봄이었다. 프란체스코 형제회의 이 초기 단계에서 이미 하나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곧 사회의 일상생활에의 참여와 관상생활의 고유한 병존이다. 하루의 대부분이 노동과 참회에의 권고,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삶에 바쳐졌다.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동 이외의 시간은 관상에 바쳐졌다.

 

 

이런 작은 자의 삶 안에서 몇 가지 요소들이 부각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전적이고 절대적인 가난이다. 이러한 가난으로 하나의 사회적 신분에서 또 다른 신분으로 건너갔다. 둘째는 이런 변화된 사회계층에 대한 외적인 표지인 복장이었다. 중세 때는 복장은 신분을 드러내 주는 중요한 표지였다. 또 다른 현저한 요소는 로마 교회의 성무일도에 따른 공동기도였다. 프란체스코는 문화를 지나치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문맹자들, 비천한 자들, 그리고 모두에게 종속된 자들이었다.” 12세기에 ‘비천한 자’(idiota)는 ‘문화의 결핍’, 특히 ‘교회적인 문화의 결핍’을 의미하였다. 프란체스코와 동료들에 의해 적용되고 실천된 손노동의 경우는 그러한 사실에 밀접히 연결되었다. 그들은 어떤 기술도 몰랐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하나가 수공업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한가함을 피하고 좋은 표양을 주기 위한 것만큼 보수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도시에서 일거리가 없을 경우에만, 탁발이 정당화되었다.
 
그 당시 프란체스코에게 공동체 생활을 하기 위하여 리보또르또(Rivotorto) 보다는 더 크고 안정된 장소를 물색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는 주교와 산 루피노(San Rufino)의 참사회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그들에게서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여 결국 수비아꼬 산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소유인 ‘싼타 마리아 델뤼 안젤리’(Santa Maria degli Angeli) 혹은 ‘뽀르찌운꼴라’(Porziuncola)를 다시 생각하였다. 아빠스는 큰 호의를 보여주었다. 그는 공동체 참사회를 소집하여 거의 파괴되어 붕괴될 지경에 놓인 ‘싼타 마리아’ 성당(아씨시에서 가장 초라한 성당)을 무상으로 그들에게 양도하였다. 그러나 소유권이 그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아빠스는 수도원 소유를 인정하는 행위로서 그들이 매년 물고기 한 광주리를 자기에게 가져오도록 계약을 체결하였다. ‘뽀르찌운꼴라’는 프란체스코가 형제들을 위해 생각했던 최상의 조건에서 생활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그것은 철저한 가난과 관상적 침묵을 실천할 수 있게 하였고 또 도시 근교에 위치하고 있어 그들이 일하고 설교하는 것을 쉽게 해주었다.
 
11,12세기 종교심의 특징적인 면모들 가운데 하나는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이다. 여성들은 더 이상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어 공적으로 활동하였다. 여성들은 이제 교회생활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게 되었다. 성녀 글라라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녀는 프란체스코의 초기 동료들 가운데 하나인 사촌 루피노를 통해 자신도 그들의 단체에 합류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프란체스코에게 전하였다. 글라라는 프란체스코보다 11년 뒤인 1193-1194년 사이에 출생하였다. 그녀는 타고난 기질상 종교적인 삶으로 기울어졌고, 모범적인 경건함을 보여주었다. 18세에 그녀 나이 또래의 소녀들 사이에서 세련미와 우아함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프란체스코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들의 만남은 은밀히 이루어졌는데, 이는 그들의 가족들 때문이었다. 많은 대화 후에 프란체스코는 그녀가 자기 부르심을 따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집에서 도망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212년 성지주일 밤에 그녀는 집에서 나와 급히 2km 정도 떨어져 있던 뽀르찌운꼴라의 싼타 마리아를 향하였다.

 

 

거기서 밤기도를 하고 있었던 형제들이 그녀를 맞아들였다. 프란체스코는 자기 손으로 그녀의 두발을 잘랐고, 그녀에게 수도복을 입혀주었다. 그들은 처음에 그녀를 아씨시에서 약 4km 떨어진 바스띠아(Bastia)의 베네딕도 수녀원으로 보냈고, 후에 또 다른 베네딕도 수녀원(Sant'Angelo di Panso)으로 이전시켰다. 머지않아 다른 젊은이들과 또한 그들의 친척들 역시 그녀에게로 와서 합류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자기가 직접 복구했던 성 다미아노 성당에 안정된 거처를 그들에게 주려고 생각하였다.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여성들은 그 순간부터 참회과 기도와 노동의 삶에 전념하기 위한 안전한 장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떠돌이 생활을 할 수 없었고, 일거리를 찾으러 외출할 수도 또 설교를 하거나 참회를 권고할 수도 없었다. 프란체스코와 형제들은 복음적이고 프란체스코적인 삶의 양식을 조금씩 가르치면서 그들을 돌보았다.
 
 
4. 한편 작은 형제들의 생활은 그럭저럭 지속되었다. 1216년에 뻬루지아(Perugia)에 온 비트리(Vitry)의 주교 야고보는 당시 그곳에 작은 형제들의 수효가 많이 불어났으며, 그들은 영혼들을 회개시키려는 갈망으로 불탔고, 낮에는 시내에서 노동을 하고 밤에는 그들의 은둔지에서 기도하는데 전념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 당시 그들의 공동체는 롬바르디아(Lombardia), 토스까나(Toscana), 뿔리아(Puglia), 시칠리아(Sicilia) 등지에 퍼져 있었다. 비트리의 주교에 의하면, 그들은 일년에 한 번, 즉 성령강림 축일에 모두 함께 모여 그 해 발생했던 내·외부의 문제들을 논의하였다.
 
프란체스코의 형제단은 초기에는 프란체스코가 기초를 놓고 인노첸시오 3세가 구두로 승인한 빈약한 규칙을 토대로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소자들이 증가하면서 수도회로 발전되었고, 제도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프란체스코는 오스티아(Ostia)의 주교 우골리노(Ugolino) 추기경을 후원자로 삼았다. 깊은 영성가라기 보다는 오히려 활동가였던 이 인물은 후에 그레고리오 9세란 이름으로 교황이 되고 그 신생 수도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오스티아의 우골리노는 인노첸시오 3세와 함께 궁정 실무와 국제 관계를 가르치는 명문 학교에서 양성되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우골리노를 신뢰하여 외교관으로 등용하였고 그의 후계자 호노리오 3세 역시 이러한 직무에서 그를 지지하였다. 우골리노는 피렌체에서 프란체스코를 만났고, 그와 죽을 때까지 지속된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었다. 바야흐로 제도적인 윤곽 아래 작은 형제회가 최소한의 구조를 갖추고 있던 때었다. 즉, 지역 장상들이 생겨나고 관구들로 체계적으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확장을 위해 이탈리아를 벗어나기로 결정되었다. 그 당시 작은 형제들은 롬바르디아에서 시칠리아까지 퍼져있었다. 1217년, 영국, 프랑스, 독일, 팔레스티나 등지로 형제들이 파견되었다. 프란체스코 자신이 프랑스로 가기로 결심함으로써 모범을 보여주었다. 프란체스코는 사제였던 실베스트로 수사를 동반하였다. 아레쪼(Arezzo)로 가는 길에 피렌체에 당도하였는데, 이 도시에 카타리파들도 도착하였다. 바로 이로 인해 거기서 프란체스코를 매우 친절하게 맞이했던 우골리노 추기경을 만나게 되었다.
 
여행 동기를 전해들은 추기경은 즉시 여행을 단념하라고 권고하였다. 프랑스로 가는 것을 단념시기키 위해 우골리노가 제시한 이유는 이렇다. 즉, 유럽 주교들이 로마 교황청 내부에서 그 수도회의 선익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란체스코는 아씨시로 되돌아가야했다. 우골리노와의 만남은 이후 프란체스코의 삶에 있어 결정적인 것이었다. 교황 자신이 그 수도회를 이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프란체스코는 “추기경 보호자”란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고, 우골리노에게 이 역할을 맡아달라고 특별히 청하였다. 동시에 프란체스코는 1218년 성령강림 총회에도 참석해 달라고 추기경을 초대하였다. 그러나 추기경은 그 수도회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수도회 내부의 변화는 오히려 형제들 자신의 저항, 적어도 프란체스코의 이상에 반대하였던 그들 가운데 몇몇의 저항에서 비롯되었다. 이제는 수적으로 불어난 수도회 안에서 초기의 소규모 형제 공동체 상태를 제대로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많은 사제들이 수도회로 편입되었고, 형제들은 아씨시와는 상황이 전혀 다른 사회 환경에서 생활하고 일하게 되었다. 프란체스코와 교황청의 만남은 한 인간이자 이상가였던 프란체스코에게는 훨씬 더 비극적이었다.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즉 1216년부터 1226년까지 다시 비극적인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 시기에 프란체스코는 육체적인 고통에다 심리적인 고통을 당하였다.
 
이런 와중에 작은 형제들은 유럽 전역으로 흩어졌다. 독일에서는 이단자들 때문에 이탈리아로 되돌아가야 했고, 영국에서는 추방당했다. 더욱 비극적인 일은 스페인을 거쳐 마로꼬(Marocco)에 갔던 형제들이 처한 운명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순교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수도회 안에 보다 정확하고 유기적인 구조가 얼마나 필요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하나의 규칙이 부과되었다. 이 규칙은 수도회의 삶을 토대 놓았고, 그리스도교 안에 고유의 위치를 수도회에 부여해 주었다. 보다 중대한 장애는 수 세기에 걸친 교회 전통에 집착해 있던 많은 수도승들과 참사회원들, 그리고 사제들에 의해서 나타났다. 그들은 이 새로움을 거부하였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전통을 깨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5. 하나의 규칙에 대한 요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프란체스코는 비록 법적인 규정에는 친숙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규칙을 제정하는 일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생애 말년에 이 일로 인해 괴로움을 당했지만, 규칙을 작성하기 전에 팔레스티나(성지)로 여행할 기회를 가졌다.
 
동방에서 신앙 전파 활동의 결과인 순교가 그를 매료시켰던 것 같다. 프란체스코는 팔레스티나로 떠나기로 결심하였지만, 자신의 어께에 하나의 거대한 수도회가 달려 있다는 점을 알았다. 그래서 자기가 없는 동안 마테오와 그레고리오 두 형제에게 수도회에 대한 책임을 맡기고 성지로 떠났다. 당시 팔레스티나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실패 이후, 호노리오 3세는 뻴라지오 갈바니(Pelagio Galvani) 추기경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추기경은 상황을 평정하는데 실패하면서 이집트의 다미에따(Damietta) 요새를 공격하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팔레스티나에서 이슬람의 힘을 분산시키려고 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삐에뜨로 까따니(Pietro Cattani)와 함께 이 이집트 도시에 도착했음이 분명하다. 거기서 그는 1217년 총회에 의해서 동방으로 파견되었던 엘리아 수사를 만났다. 엘리아는 주석학과 신학에 뛰어난 유명한 인물 사삐라(Sapira) 출신 체사리오를 수도회에 입회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프란체스코가 동방에 머물렀던 기간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다미에따의 정복과 퇴각 날짜들인 1218년 5월 9일에서 1219년 8월 29일 사이였던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충분한 기간이었다. 왜냐하면 프란체스코가 아씨시와 이탈리아에 남겨둔 그의 대리자들이 일련의 무질서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는 순명을 거스른 스테파노 수사의 악행에 대해 보고를 받고서 이탈리아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여성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았던 필립보 론고(Filippo Longo)는 매우 과도한 열성으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권을 교황에게 청하였다. 그리고 요한(Giovanni de Capella)은 남녀 나병환자들을 위한 수도회를 설립하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교황청에 승인을 요청하였다. 1220년 초 프란체스코가 이탈리아로 되돌아오자 모든 상황은 즉시 정상을 되찾아갔다. 당시 프란체스코는 호노리오 3세에게 가서 수도회의 보호자로서 우골리노 추기경의 임무에 제도적인 형식을 부여해 달라고 청하였다. 프란체스코의 청원은 다음 두 가지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즉, 한편으론 그의 부재시에 일어날 수 있는 돌출행동들을 피하고, 또 다른 한편으론 규칙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준비하고 총회들에서 조금씩 채택한 모든 결정사항들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성서를 토대로 풍부하게 하도록 사삐라 출신 체사레아에게 위임하였다. 이로써 그는 규범들과 규정들에 영적인 토대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는 많은 형제들의 자발적이고 신선한 생명력을 말살하는 불행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즈음 프란체스코는 수도회에 대한 법적인 통치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다. 1220년 9월 29일 성 미카엘 총회에서 그는 사임 의사를 밝혔다. 모든 사람이 크게 놀란 가운데 프란체스코는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앞으로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여기 비에뜨로 까따니(Pietro Cattani)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그에게 순명할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모두의 동요 속에서 삐에뜨로 앞에 무릎을 꿇고 순명을 표현하였다. 그는 작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이가 되고자 했다.
 
이 근본적인 이유에 질병이라는 부차적인 이유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성지에서 얻은 질병으로 인해 몹시 병약한 상태로 되돌아왔다. 두 가지 중병에 걸렸었는데, 말라리아가 가장 심각했다. 또 다른 병은 트라코마(tracoma)의 결막염으로 그를 점차 실명(失明)에로 이끌었다. 1221년 삐에뜨로 수사의 조기 사망 이후 수도회의 총대리였던 엘리아 수사와 우골리노 추기경은 프란체스코의 병 때문에 몹시 걱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프란체스코를 당시 안과치료로 유명한 리에띠(Rieti)로 데려갔다. 거기 의사는 눈에서 눈까풀에까지 살에 뜨거운 쇠를 삽입하는 일명 ‘부식법’(뜸술)이라고 하는 치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에게 고통을 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규칙 작성에 대한 심리적 고통이 그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규칙의 골자는 호노리오 3세에 의해서 주어졌는데, 이는 수련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그의 교서 Cum secundum를 통해서이다. 프란체스코는 규칙의 공식화를 억지로 받아들여야 했는데, 이는 초기 아씨시의 소규모 형제 공동체가 서방 전체로 확산되고 있던 수도회로 변하는 현실을 받아들였던 것과 같다. 마침내 프란체스코는 사삐라의 체사리오의 도움으로 작성한 규칙서를 1221년 총회에 제출하였다. 이 규칙서는 창설자의 이상에 따른 순수 프란체스코적 핵심 요소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타협이 가능한 텍스트는 아니었다. 일주일간 지속된 총회에서 이에 대해 논의하였지만, 총회는 어떤 결론 없이 막을 내렸다. 프란체스코는 이 규칙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였지만, 교황청에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규칙서는 다른 텍스트들만큼 아름답고 복음적이지는 않지만, 보다 영적이고 법적인 텍스트이다.
 
이 규칙서는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교황과 추기경들은 이 규칙서에 대해 당혹스러워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프란체스코는 형제들과 상의하여 그것을 다시 작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기록된 두 번째 규칙서가 생겨났다. 이 규칙서는 첫 번째 것 보다 훨씬 더 간략하다. 결국 1223년 9월 29일 교황 호노리오 3세는 Solet annuere라는 교서를 통해서 이 규칙서를 승인하였다.
 
프란체스코의 건강은 계속해서 악화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몹시 엄격한 금욕적 수행을 계속해 나갔다. 1224년 봄에 프란체스코는 관상에 바쳐진 은수생활의 시기를 보내기 위해서 소수의 형제들과 함께 베르나(Verna)의 산으로 이전하였다. 이 은수생활은 신비 체험들로 가득 찼고 그에게 매우 깊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서 프란체스코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았다. 때는 1224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었다.
 
 
6. 그의 건강 상태는 더욱더 악화되었다. 말라리아가 악화되었고, 만성 결막염으로 인해 그는 완전히 실명하였다. 그러자 4명의 형제가 그를 간호하였다. 그들은 1224년 말경에 혹은 1225년 초에 프란체스코를 아씨시로 옮겼다. 프란체스코의 생애 마지막 2년은 질병과 고통으로 인한 계속되는 순교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프란체스코는 매우 아름다운 두 개의 글을 적었으니, 곧 ‘유언’(Il Testamento)과 ‘태양의 찬가’이다.
 
‘유언’은 프란체스코가 설립한 수도회의 영적인 쇠퇴를 피하려는 그의 염려를 담고 있다. 프란체스코는 형제들이 완덕을 향한 열정을 상실하고 단지 승인된 규칙의 규정들만을 준수하는 것에 만족하게 될까봐 몹시 우려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자신의 상속자에게 증여하는 것처럼 ‘유언’은 프란체스코가 자기 형제들에게 남겨 준 정신이다. 그러나 또한 사제들에 대한 충실, 노동, 생활방식에 있어서의 가난, 형제들이 유지해야 하는 영혼의 상태, 그리고 로마 교황청에 어떤 종류의 특권도 청하지 말라는 격려이기도 하다. 결국 규칙과 유산으로 받은 ‘유언’을 수정하지 말라는 하나의 권고인 셈이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유언’에 담긴 예견들로 만족하지 않고 다음 두 가지 권고를 덧붙였다. 즉, 보르찌운꼴라(Porziuncola)의 공동체를 모델로 삼으라는 것과 자신의 후계자로 정해진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코가 뽀르찌운꼴라를 위해서 남긴 규정들은 그것을 다른 모든 공동체들의 모범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수도회가 규칙을 넘어 그 정신, 즉 복음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다. 프란체스코의 전 생애의 대미(大尾)와도 같은 ‘태양의 찬가’는 영성사의 보물로서 끝의 두 절은 그가 죽을 무렵 지은 것이다.
 
죽음이 그에게 임박해 오고 있었다. 말라리아와 실명(失明)에다가 다리에 수종과 종기가 겹쳤다. 프란체스코는 형제들을 자기 주위로 불러 그들 앞에서 베르나르도를 축복하여 후계자로 삼고 그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 줄 것을 형제들에게 당부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자기를 맨땅 - 그가 “태양의 찬가”에서 찬양하였던 ‘어머니이신 땅’ - 위에 눕혀주기를 원했다. 때는 1226년 10월 3일에서 4일 밤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상에서 아버지라고 불렀던 유일한 하느님께 자기 생명을 넘겨드렸다. 그때 그의 나의 44세였다. 아씨시의 모든 시민들과 성직자들이 프란체스코의 시신을 거두러 갔고,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서 행렬을 하여 그의 시신을 성 다미아노 수도원으로 운구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창문 높이로 시신을 들어 올려 1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다. 봉쇄의 규정 때문에 살아 있는 그를 볼 수 없었던 글라라와 수녀들이 이제 죽은 프란체스코를 관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프란체스코가 죽은 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된 우골리노 추기경은 아씨시에서 그를 시성하였다.
 
이 모든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은 유감스럽게도 프란체스코에 의해 복음적 근본주의로 조명된 작은 형제들의 회를 동요시키는 심각한 위기를 막지는 못했다. 갈등의 뿌리는 규범과 충동, 규칙과 ‘유언’ 간의 갈등에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유언’이 하나의 새로운 규칙이 아니라 단지 승인된 유일한 규칙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보조 수단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죽자 그의 인격에서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적 매력도 그와 함께 사라지고 대립이 일어났다. 프란체스코가 죽은 지 4년이 되자 그레고리오 9세는 1230년 Quo elongati라는 교서를 통해 ‘유언’은 법적 효력을 갖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이로써 한 세기 이상 이 수도회를 고통스럽게 하였던 복잡하고 힘든 프란체스코회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프란치스코회의 본래 이상은 무엇이었으며, 창설자의 ‘유언’의 중요성과 의미는 무엇인가? 카이에탄 에세르(Kajetan Esser)가 이미 이 질문에 대답하였다. 에세르에 의하면, 작은 형제들의 공동체는 그 시초부터 세상을 포기한 그리스도교인들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의 근본 요소는 순수하게 그리스도교적 형태를 지니고 있다. 형제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복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공동체 안에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그저 형제들일 뿐이다. 이 공동체는 사회의 모든 계층에 개방되어 있다. 성 프란체스코 주위로 모인 형제단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결속력을 갖고 있었지만, 점차 장상, 총회, 장상들의 방문, 끝으로 규칙이 나타나게 되었다. 프란체스코회의 삶의 양식과 더불어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이 태동하였다. 프란체스코회 삶의 첫 걸음은 하느님 나라 선포에 밀접하게 결부된 참회에로의 부르심 안에 있다. 이러한 참회는 복음적 의미로 하나의 ‘메타노이아’(metanoia) 혹은 정신과 삶의 변화이다. 하느님 나라 선포는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동료들을 순회설교로 이끌었다. 설교는 절대적인 가난에 기초한 삶의 증거를 동반하였다. 이 가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적인 삶의 한 형태로서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생계유지의 불확실성은 이 새로운 공동체의 한 구성요소였다.
 
‘유언’의 중요성과 고유한 의미는 무엇인가? 에세르에 의하면, ‘유언’은 성 프란체스코의 마지막 의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규칙서의 정신을 터득시키고 그 준수를 보장하기 위해 쓰여졌다. ‘유언’이 담고 있는 새로운 생각은 특권을 청하는 것과 규칙서를 비평하는 것에 대한 금지이다. ‘유언’의 중요성은 특별히 그것이 초기 프란체스코회 삶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에 있다. 결국 ‘유언’은 프란체스코의 높은 이상을 보여준다.
 
어쨌든 작은 형제들의 뼈아픈 부침(浮沈)이 13세기에 이 수도회의 위대한 공로들을 망각하게 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프란체스코회원들은 중세 전체에서 중국에까지 진출했던 가장 대담하고 주도적인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의 설교와 영적지도 덕분에 그들은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별히 재속 3회를 통해서 그러하였다. 그들은 백성들과의 밀접한 관계로 평신도 영성의 잠재적인 씨앗들을 발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도시의 가정들 안으로 프란체스코회의 전형적인 신심들을 도입하였다. 즉, 구유, 십자가의 길, 성체성사에 대한 사랑, 성모 마리아 신심, 아씨시의 전대사 등등. 그들은 유럽의 지적인 삶에서, 특별히 신학에서 도미니꼬회원들과 경쟁하였다. 그들은 옥스퍼드, 파리, 쾰른에서 대학 강좌를 개설하였는데, 그 강좌들은 즉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성 보나벤뚜라와 알레스(Ales)의 알렉산드로와 같은 스승들을 배출하였다.

 

 

그레치오의 첫 성탄구유
 
이재성
 
이재성 보나벤투라수사는 프란치스코회 소속 부산 봉래동성당에 거주.

 

[경향잡지, 1996년 12월호]
 

 

 

그레치오(Greccio)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리에티(Rieti) 계곡의 라제로네(Lacerone) 산자락에 자리한 중세의 마을인데, 지금도 중세 때 마을의 모습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인구는 약 150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다.이 그레치오에 평상시에도 많은 순례객들이 몰려들지만, 특히 12월 하순에 접어들면 해마다 전세계에서 수많은 순례객들이 더욱 모여드는데, 이유는 이곳이 성 프란치스코가 1223년에 그리스도교 역사상 처음으로 말구유를 만들어 그리스도의 탄생을 재연한 곳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성 프란치스코가 말구유를 만들어 그리스도의 탄생을 재현한 곳은 이 마을에서 약 2km 남짓 떨어져 있는 한적한 곳으로, 숲으로 둘러싸인 깎아지른 듯한 바위 위였다. (성 프란치스코가 좋아했던 것들은 한적한 곳과 숲과 바위였는데, 이 조건에 그레치오는 딱 맞아떨어진다.) 성 프란치스코의 사후에 즉시 이 바위 위에 소성당이 지어졌고, 이어서 그 둘레에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원이 건립되었으며, 지금도 한쪽에 당시에 세운 건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참나무 숲도 그대로 남아있는데, 여러 문헌에 나와 있는 당시의 정경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리에티 계곡의 들판을 한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8월의 한여름에 안개가 바위에 걸리면서 펼쳐지는 계곡의 아름다움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장관이다. 성인은 아름다운 경관을 찾아다니신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곳은 수도원을 통과해야만 오를 수 있는 여러 바위들이 줄지어 있는데, 자연히 순례객들에게는 그곳 출입이 봉쇄되어 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바의 세계는 가난의 거울에 비치는 그런 세계다. 분명히 성인도 이곳에 오르셨을 것이다.
 
사실 전면 좌측에 다 허물어져가는 성(城)의 낡은 탑이 있는데, 이 탑이 1792년 이곳에 프란치스코회 성당이 생기기 전까지는 가장 높은 탑이었다. 성인의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이 장소로 향했던 것은 이 탑이 성인에게는 ‘가난 속의 풍요’로 비쳤기 때문이다(토마스 첼라노가 쓴 “아시시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 2생애, 35번, 이하 첼라노). 그래서 그랬는지 이곳에서 성인의 설교가 전에는 없었던 풍요로운 수확을 거두었다. 그레치오 주민들도 성 프란치스코가 쉼없이 부르는 찬미의 노래를 어렵지 않게 따라 불렀다.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도 이 마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처럼 작은 성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회개한 적이 없습니다”(페루지아 전기 34번). 당시에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형제들은 늘 하던 대로 밤이 되면 찬미의 기도를 바쳤고, 이 성에 사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밤만 되면 밖으로 나와서 형제들을 따라서 찬미의 기도를 바쳤다고 전기작가들은 전한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도 “주님은 찬미를 받으소서.” 하였다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가 말구유를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재현하려 했던 사실을 성 보나벤투라는 그의 저서 “Vita Major” 10장 7번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죽기 3년 전에 그레치오 근방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예식을 거행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 시도가 자칫 새로운 것만을 찾는다는 책망으로 이어질 수가 있어서 그는 우선 교황청의 허락을 받았다.
 
“그곳에는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그를 자주 불러 일을 시켰다. 이번에도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성탄 전야 보름 전에 그를 불러 말했다. 그레치오에서 우리 주님의 축제를 지내고 싶으면, 빨리 가서 내가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준비하시오”(첼라노, 1생애, 84번).
 
요한은 착하고 믿음이 있었으므로 급히 달려가 성인이 말씀하신 자리에 성인께서 분부하신 대로 모두 준비하였다. (이 요한의 유해는 소성당 한쪽에 지금도 잘 안치되어 있다.)
 
어떠한 연유로 성인은 이렇게 연극 연출만이 아니라 무대장치까지도 도맡아서 법석을 피우고, 교황청의 허락을 받으면서까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재현하려 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연극의 가시적 효과를 통해서 천상의 기쁨을 뜨겁게 맛보려는 것이었다. 육화의 겸손과 수난을 상상이 아닌 육신의 오감으로 직접 느끼며 천상세계로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육화적 접근은 후에 프란치스코회 전통의 핵이 되었다. “아가가 겪은 그 불편함을 보고 싶고, 또한 아기가 어떻게 구유에 누워있었는지, 그리고 소와 당나귀를 옆에 두고 어떤 모양으로 짚북데기 위에 누워있었는지를 내 눈으로 그대로 보고 싶습니다”(상동). 프란치스코회 전통에서 이러한 육화적 접근은 성탄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 죽음으로 이어지며 이어서 성체에까지 이른다.
 
그렇게 해서 성인은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들까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랐다. “그는 믿는 이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하느님께 진정으로 바치도록 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가장 실제에 가깝게 재현하기를 바랐다”(Vita Major, 10장 7번). 성인은 신앙의 신비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매체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나뭇가지를 들고 그것을 바이올린의 활로 삼아서 천상세계를 연주했던 프란치스코가 아닌가! 그 결과 그레치오는 프란치스칸 베들레헴이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인성과 가난을 드높인 곳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아가 예수 탄생의 장면을 재현하려는 성인의 마음 뒤에는 안달맞을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애틋함이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거기에는 성숙한 청년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 죽음이 가져다주는 하느님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어린 아기 예수의 소 여물통과 짚북데기, 소 외양간 등 가난한 단순함을 통해서 다가오는 신비로운 하느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린이의 단순성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라면 모든 인간은 단순한 면이 있기 때문에 이미 누구나 하늘나라의 초대를 받아놓은 상태라는 얘기다.
 
“이윽고 즐거운 날이 다가오고, 크나큰 환희의 시각이 왔다. 그 근방에 거주하는 여러 형제들도 초대를 받았다. 동네의 남정네들과 아낙네들도 형편에 따라 밀초와 횃불을 준비하였다. 그들은 일년 내내 빛나는 별로써 낮과 밤을 밝혀줄 바로 그날 밤을 밝혔다. 마침내 하느님의 성인이 당도하셨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보고 기뻐하였다. 여물통도 준비되었고, 짚북데기도 옮겨졌으며, 소와 당나귀도 끌려왔다. 그곳에서는 단순함이 추앙을 받았고, 가난이 높여졌으며, 겸허가 찬양되었다. 그레치오는 새 베들레헴으로 꾸며졌다”(첼라노, 1생애, 85번).
 
이렇게 하여 그에게 다시 한번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었고, 불편함이 안락함으로 바뀌었으며, 어두움이 밝음으로, 쓴맛이 단맛으로, 역겨움이 달콤함으로, 죽음이 부활로 바뀌었다. “그 밤은 대낮같이 환히 밝혀졌고, 사람들과 짐승들은 매우 즐거워하였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새로운 신비로 말미암아 새로운 기쁨에 젖었다. 사람들의 우렁찬 목청에 온통 숲이 울렸고, 바위들까지도 그들의 기쁨에 화답하였다. 형제들도 노래를 불렀고, 지금까지 못다 바친 찬미를 주님께 바쳤으며 밤새도록 그들의 기쁜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느님의 성인이 탄성을 올리며 사랑에 도취되었고, 말할 수 없는 기쁨에 가득 차서 여물통 앞에 섰다. 이렇게 하여 여물통 앞에서 장엄미사가 거행되었고, 프란치스코는 새로운 영혼의 평화를 체험하였다”(상동). 환희는 극에 달했고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성인은 여물통 앞에 서서 아기 예수의 불편함을 함께하였으나 마음은 고요함으로 넘쳤고, 눈물로 온몸을 적셨으나 기쁨에 전율하였다. 이어서 그는 가난한 임금의 탄생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그 가난한 임금을 그는 애정이 넘쳐서 베들레헴의 아기라고 불렀다”(Vita Major, 10장 7번).
 
그는 믿는 이들에게 신비롭고 감미로운 하늘 나라를 완벽에 가까울 만큼 앞당겨 체험하게 하였고 자신도 거기에 푹 빠져들었다. 하느님의 성인은 부제였으므로 부제복을 차려입고 거룩한 복음을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면서도 부드러웠고, 모든 사람이 최고의 보상을 받게 했다.
 
그는 둘레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하였다. 그는 가난한 임금님의 탄생과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관하여 우아하게 말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부르고 싶을 때면 사랑에 넘쳐서 그분을 ‘베들레헴의 애기’라고 부르곤 하였고, ‘베들레헴’이라는 말을 할 때의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 양의 울음소리 같았다 그의 입은 말이 아닌 차라리 감미로운 사랑으로 채워져 있는 형편이었다. 그뿐 아니라 ‘베들레헴의 애기’나 ‘예수’라는 말을 할 때, 그의 혀는 이 말의 감미로움에 입맛을 다시고 입술을 밟으며 맛과 향기를 맛보는 듯하였다.
 
전능하신 분의 은총이 그곳에 충만하였고, 그 자리에 있던 어떤 한 덕이 있는 사람은 처음에는 어린 아기가 말구유에 생명없이 누워있는 것을 보았는데,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이 다가가서 마치 잠에서 깨어나게 하듯 그 아기를 소생시키는 환상을 보았던 것이다. 이 환시에는 의미가 없지 않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아가 예수가 잊혀져 왔었지만 은총의 힘으로 아기 예수가 하느님의 종인 프란치스코 성인을 매개로 하여 다시 생명을 얻어서 이 동네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성대한 축제가 끝났고, 각자 거룩한 기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첼라노, 1생애 86번).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

 

 

1567년 사보이아에서 태어났다. 사제로 서품된 후 자기나라에서 가톨릭 교회의 재건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제네바의 주교로 선임되어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참다운 목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고, 만사에서 모범이 되고 저서로써 모든 이에게 신앙을 가르쳐 주었다. 1622년 12월 28일 리옹에서 세상을 떠나, 1623년 1월 24일 안네시에 묻혔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주교의 [신심 생활 입문]에서
(Pars, 1, cap. 3)

 

신심 생활은 모든 소명과 직업에 가하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종류를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을 초목에게 명하셨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또한 그 교회의 생활한 초목인 신자들에게 그 처지와 각자 맡은 직분에 따라 각각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설명하신다. 귀족과 직공, 왕족과 노복, 과부와 주부, 소녀들의 차이에 따라 그들의 신심은 각각 달라야 한다. 또 한층 이것을 개인의 능력, 일, 직무에 맞추어야 한다. 필로테아여, 주교가 샤르트르 수도회의 수사처럼 관상적 독수자가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가정을 가진 자들이 카푸친회 수사들처럼 금전을 소홀히 여기거나, 또는 직공이 수도자처럼 종일 성당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든지, 또는 수사가 주교처럼 언제나 타인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닌다면, 이런 신심은 참으로 우습고 질서를 뒤집으며 또한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착오는 극히 많다. 따라서 세속은 참된 신심과 그릇된 신심을 구별치 않고 또는 구별하려고도 않으며 신심을 배척하고 이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비난과 배척은 위에 말한 그릇된 신심에 한해서만 말해야 할 것이다.


아니, 필로테아여, 진정한 신심은 아무것도 손상치 않고 오히려 만사를 완성시킨다. 자기의 정당한 직무를 거스르는 자의 신심은 확실히 그릇된 신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꿀벌은 꿀을 마실 때 조금도 꽃을 상하지 않게 하며 꽃은 이전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고 한다. 참된 신심은 이보다 더 어떠한 직무나 처지도 손상치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이를 아름답게 꾸민다. 보석을 꿀에 담그면 그 성질에 따라 광채를 더한다고 한다. 그와 같이 어떤 사람도 그의 경우를 신심과 합치시키면 그의 경우는 일층 더 아름다워진다. 가정의 평화는 커지고 부부간의 애정은 깊어지며, 임금께 대한 충성은 두터워지고 각자가 맡은 일은 유쾌하고 즐거워진다.


신심 생활의 군인들의 병영, 직공들의 공장, 제왕의 궁정, 결혼한 자들의 가정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유설이며 이단의 교설이다. 필로테아여, 관상적인 신심이나 수도원식 또는 수도자적 신심이 이런 이에게 전연 맞지 않을 것은 말할 여지도 없지만, 위에 말한 세 가지 신심 외에 세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완덕으로 인도하는 신심의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완덕의 생활을 구할 수 있고 이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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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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