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요즘,우리가 생생하게 직면하는 교회의 분열상의 추태로서,제가 현장중개하는 형식으로,그 진면목을 체험하는 중인데요.이것은,교회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원인을 바로보고→해결책을 찾자란 취지입니다.그만큼 심각한 체험입니다.그것이 바로 온라인 굿뉴스라는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분열상입니다. 재발행하려다가 포기하고 그냥 링크걸기합니다.그래서 참신앙인이라면,신부님이라면,이 글을 읽기 전에 반드시 읽으셔야 할 내용입니다.교회의 모든 분열에는 반드시 신앙이 부족한 불신자의 난동이 있습니다.

 

이 때,소순태처럼 강한 믿음의 소유자로서 교회핵심멤버가 까딱 잘못하여 말실수를 한 경우,또는 겸손함이 없는 오만방자한 행동거지로 상처받는 신자가 생깁니다.이 때 반드시 상처 받은 신자의 격렬한 거부반응이 나타납니다.그러면 그동안 늘 이 신자(또는 신부님)의 오만방자함에 상처를 받거나 증오심을 갖고 대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똘똘 뭉칩니다(당연히 악마의 장난입니다.) 이런 분열의 대부분은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지도자들)이,유독 돈이 많은 사람,사회적 권력자를 우대하고 높은 자리에 앉힐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신부님들은 절대로,교회 구성원들 중에서,부자들이나,정치인들,기업인들 같은 세속의 권력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서는 안되며 그들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합니다.신부님들,제발,고학력의 지식인들을 멀리하세요.가난하고 힘없는 사회적인 약자들과 친하게 지내세요.가난하며 소외된 사람들을 늘 사랑으로 대하세요.이러한 원칙-가난한 사람에게 종이 되어 주는 가장 기초적인 수칙,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원칙이 무너질 때,분열이 일어납니다.

 

신부님들이 앞장서서,신자들 간에 장벽을 쌓는 일을 막아야 합니다.

 

특히,신부님들이 강론하실 때,제발 성서의 내용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신화라고 믿도록 가르치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그러한 오류투성이의 강론은 치명적인 부메랑이 되어서 신부님,당신을 죽입니다.성서는 신화가 아니거든요.진짜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이거든요.성서를 자기들 나름으로 해석하며 교도권을 침해하는 모든 자들의 스승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신부님들입니다.그런 내용으로 오늘 글 내용을 대폭 수정한 글이니 꼭 읽어주세요.신앙인의 교만,증오,독설,아집이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내용입니다.필독 클릭 그리스(터키,사도행전,교회사박물관),범신론,무신론,이방인들(헬레니즘,히브리즘 충돌)

 

 

 

 

 

어제,2013년 8월4일 아침,내 블로그에 유입된 키워드로,천주교4대 대축일이 떴길래,나는 문득,어어,4대 대축일이라고? 뭐지???  풍요 속의 빈곤이라 할까?  아니면 시험문제지의 답이 5개 이상으로, 비슷비슷하게 나열되면서,이것인거 같기도하고 저것인거 같기도 하고, 너무 고르기가 애매하다고나 할까?

 

 

아니면 쇼핑하러 백화점에 나갔다가 너무 마음에 드는 물건이 많아서 무얼로 골라야 하나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모두 다 사버리자!! 충동구매의 덫에 걸린 신세라할까? 그 동안 하도 많은 대축일들을 전례해석으로 포스팅을 하다보니,모두가 4대축일에 낄거 같았고,결국 답을 찾기가 엄청 어려워져버린 나,그래서 유입경로 따라가서 확인했다.

 

답은 아래와 같다.

 

 

1,성탄 대축일 클릭☞ 3 전례력 해석-말씀이 사람이 되시다(요한복음),성탄절

2,부활 대축일 클릭☞ 32,전례해석-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삼위일체신비)

3,성령강림대축일 클릭☞ 29,전례-성령강림주일-성령이란 무엇인가? 자비주일체험,네번째 이야기

4,성모승천대축일 ......정말 의외였다.그만큼 나는 아직도 성모님 승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거다!!!

 

아마도 나처럼 성모님승천에 관한 교리(믿을교리)에 관해 믿음이 부족한 분들과 공유하고자 이 글을 작성하는 중이다.원래 이 포스팅은 순전히 8월14일이 축일인 성인-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y Kolbe)를 연구하고자 비공개로 자료들을 퍼 담는 중이었고,성모승천대축일은, 대충 굿뉴스에서 자료를 퍼더가 떼울 게획이었다.그러다가 이렇게,천주교 4대 대축일이란 키워드로 유입경로를 따라 나갔다가,이 글에서 전례연구를 할 주제임을 깨닫게 됐다.

 

교회가 무엇인지 가르치는 자료로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아래 내용을 모두 숙지하신 이후로 이동해서 읽어주세요. 엄청나게 방대한 내용이라서 일부만 옮겼으니 나머지는,이 블로그 카테고리 아래에 나오는 링크클릭→→(오른편보세요),링크에서 인류의 빛을 클릭하면,굿뉴스의 해당페이지(제2차바티칸공의회 문헌)로 이동됩니다.첫 내용을 소개한 포스팅은 여기 클릭 ☞인류의 빛(Lumen gentium)-교회헌장(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그러다보니 자료내용이 엄청나게 깁니다!!!!

 

 

성모승천대축일의 근거가 되는 내용이 성서에도 나올까?

 

 

 

 

이건 성모승천대축일이 아니라도,내가 날마다 드리는 묵주신공에서도 영광의 신비를 관상할 때마다 들던 의문이었다.내가 그 해답을 찾았을까? 당연히 찾았고 평소에 든 의문들이 이 묵주기도하는 동안 술술 풀리곤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의 이 묵주신공에서는,이 영광의 신비에서 4번과 5번째 주제인-성모승천과 천상모후의 관에 관한 관상은 지속될 것이다.그만큼 신비 중의 신비다.그러나 천주존재를 믿는 신앙인에게는 너무 쉬운 답이다.바로 묵시록이란 성서가 그 답안지다.

 

묵시록 전체가 교회의 탄생과 앞으로 인류의 빛인 주님의 교회가 어떻게 사탄의 공격을 받고,어떤 십자가의 고행길을 통과하게 될 것인가하는 인류의 미래에 관한 예언이면서,한펀으로,이 교회의 수난 길에,든든한 보호자가 되실 성모님의 역할에 관한 예언이다.4복음서에서 이미 주님께서 이러한 내용을 예언하셨다.성령의 힘으로서 만들어진 이 전례력의 신비에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주목해야만 한다.이 성모승천대축일을 기준으로 3개월마다 주제가 확실하다.성탄대축일인 대림주일부터,3개월동안(성탄전후) 그 주제가 이어지고,부활대축일과 성령강림대축일도 역시 연속되는 주제로 3개월씩 말씀의 전례가 전개된다.

 

 

이렇게 4번의 대축일이 3개월씩 나뉘어서,기승전결의 기법으로(성탄-기,부활-승,성령강림-전,성모승천-결), 각각의 복음들이 동일한 주제의 틀을 짜면서 이어져 나간다.이러한 미사성제에서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각 신앙인들은 성장해나가며,영적으로 세상을 보는 시력을 얻어서,스스로 거룩한 변모가 되어지는 과정, 신앙의 신비를 체험하게된다.나 자신이 그러한 신앙의 신비체험을 증언하는 중이다.그런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한 것이 이 블로그다.

 

그래서 성모승천대축일은 그리스도왕축일까지 지속적으로 인류의 사후심판에 관한 주제가 이어질 것이다.

 

특히 성령강림이후 3개월 동안은 성령의 활동이 주제로서,신앙의 신비의 베일이 벗겨지며,이렇게 베일이 벗겨진 성모승천대축일은 크라이막스(그리스도왕축일을 향하여 내려가는 무대)가 되는 셈이다. 이미 그러한 하느님나라의 백성 선포는,"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12장50절) 하느님의 자녀로의 승격(거룩한변모,성장)을 선포하는 내용에 포함된다.요즘 지속적으로 매일미사에서 배우는 내용이 바로,우리 신앙인들이 하느님나라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노하우 전수시키기다.

 

가장 좋은 노하우는 성모님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피앗! 즉,그대로 이루어지소서!란 대답이 우리 입에서 날마다 나와야만 한다.이렇게 할 때라야만 천주교교회 안에서 우리는 모두 성모님의 자녀가되고,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그래서 이 날 묵시록11 장19 ~ 12장이 낭독되는 것이다.먼저 묵시록이 나오는 장면을 묵상해보자....

 

그리고 성모공경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를 제시하는 펌글......성모신심에 관한 역사자료이니 놓치지마시라.

 

 

 

1독서내용(묵시록11장,12장,교회의 출산,사탄의 공격) 19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5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10 그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재미있는 가톨릭교리 (17) 믿음의 여인, 성모 마리아 I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수태고지'.(1440년경, 피렌체 산마르코박물관 소장)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성모 마리아의 삶이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을 성경 말씀과 교회 전승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성경 가르침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당신 외아들을 인간으로 출생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한 여인을 선택하셨다. 마리아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그분 말씀에 대한 순명으로 하느님의 인류 구원사업에 협력키로 결정하셨다. 예수님 출생 이야기에서 우리는 인간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주도적 행위와 마리아의 도구적 역할을 살펴볼 수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고 이에 응답함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 메시아, 예수님 어머니가 되셨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는 예수님께 알렸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하고 대답하셨지만,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하고 일러주면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을 준비하셨다. 마리아가 일꾼들에게 당부한 말씀은 예수님 뜻을 무시하거나 자신의 뜻을 강요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면서 예수님 영광을 준비하고, 제자들 믿음을 더욱 일깨워줄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마리아와 형제들은 예수님이 군중과 말씀하고 계실 때 밖에 서서 사람을 시켜 예수님을 불렀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군중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반문과 대답은 혈연 관계보다 영적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참 가족은 혈연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 뜻을 따르고 실행하는 삶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그분 곁에 서 계시면서 예수님 수난과 고통, 죽음의 여정에 함께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로, 사랑하는 제자를 어머니의 아들로 세우셨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다음부터 사랑하는 제자 집에 머무셨다.
 
예수님께서 특히 애제자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도록 당부하신 내용은 제자들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시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공경할 뿐 아니라 제자들 공동체인 교회의 어머니로서 공경한다.
 
 
교회 가르침
 
교회는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특별하신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잉태되신 첫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았고, 죽기까지 죄를 범하지 않는 강복을 누리셨다고 고백한다. 이는 마리아가 처녀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마리아가 영원한 하느님 계획에 따라 원죄 없이 태어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고백한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에도, 낳을 때에도, 낳은 후에도 항상 동정을 지키신 평생 동정녀라는 것이다.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에 대한 교의는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몸으로 예수님을 출산했다는 교의에 기초한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14)하는 성경 말씀처럼 마리아는 성령께서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을 받아 동정녀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다.
 
교회는 마리아가 지상 생활을 마치고 하늘에 오르셨다고 고백한다. 이를 몽소승천(夢召昇天)이라고도 한다. 몽소승천이란 마리아가 하느님 부르심으로 하늘에 들어 올림을 받은 것, 곧 영원한 생명의 영광에 가장 먼저 참여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마리아의 승천에는 구별돼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늘에 오르셨지만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서 비롯된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승천하셨다는 사실이다. 마리아의 승천으로 우리 모두는 승천의 영광을 희망하게 됐다.
 
교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으로 고백하고 공경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한 인성과 신성을 갖춘 참 인간이며 참 하느님으로 고백하기에, 참 인간이며 참 하느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하느님의 모친, 천주의 모친으로 고백하고 공경하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1년 10월 9일, 제공=서울대교구 사목국]


[재미있는 가톨릭교리] (18) 믿음의 여인, 성모 마리아 II
 
하느님 흠숭과 마리아 공경 달라
 
 
- 심순화씨 작품 '성모승천'(2001년).
 
 
교회는 초창기부터 마리아를 특별하게 공경한다. 이 공경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에페소공의회(431년) 이후 널리 전파됐다. "하느님 은총을 통해 성자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 신비에 참여하신 지극히 거룩한 천주의 성모로서 교회에서 특별한 공경으로 당연히 존경을"(「교회헌장」 66항) 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마리아께 드리는 공경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마리아 공경과 우상 숭배
 
교회는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주신 어머니이자 하느님의 어머니, 모든 신앙인들의 어머니로 고백하면서 신앙의 대상이 아닌 공경의 대상으로 예우한다. 전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재현하면서, 예수님을 낳고 기르신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고 공경한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 구원 역사의 신비에 실제적으로 참여하고 현존하신 까닭에 그 신비들을 전례적으로 기념하고 실현하는 데도 참여하고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면서도 우상 숭배의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이 아닌 존재나 사물을 하느님인 것처럼 숭배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마리아께 드리는 특별한 공경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교회의 마리아 공경은 일각에서 제기하는 것처럼 우상 숭배라고 할 수 없다. 마리아 공경과 우상 숭배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기도
 
△ 성모송 : 성모송은 예수님을 낳은 성모 마리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성모 마리아께 우리 구원을 위한 도움을 간청하는 기도이다. 성모송은 예수님 탄생을 예고한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 마리아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의 칭송, 성모 마리아께 우리 구원의 중재를 구하는 청원 기도로 이뤄져 있다.
 
△ 묵주기도 : 묵주기도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묵상하는 기도이다. '환희의 신비'로 예수님 탄생 기쁨을, '빛의 신비'로 예수님 공생활을, '고통의 신비'로 예수님 십자가 고통과 죽음을, '영광의 신비'로 예수님 부활과 승천을 묵상한다. 이 신비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신앙인의 모범인 마리아께 우리를 대신해 하느님께 기도해 달라고 전구를 청한다.
 
 
마리아와 관련한 미사 전례
 
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월 1일) : '하느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는 날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은 에페소공의회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 성탄 전후에 기념하기 시작했다.
 
② 주님 봉헌 축일(2월 2일) : 성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억하는 날이다. 교회는 이 날을 예수님과 성모님 두 분 모두를 기억하는 날로 기념하고 있다.
 
③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 : 마리아의 아들로 잉태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 모두를 기억하는 날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리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예고를 하느님 뜻에 대한 순종과 믿음으로 받아들이셨다.
 
④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5월 31일) :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억하는 날이다.
 
⑤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 : 성모 마리아께서 돌아가신 다음 하늘의 영광에 오르신 것을 기억하는 날이다. 성모 마리아 관련 미사 전례 가운데 가장 성대하게 기념하는 대축일이다.
 
⑥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8월 22일) :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참으로 공경해야 할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는 날이다.
 
⑦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9월 8일) : 성모 마리아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⑧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 15일) : 성모 마리아가 겪으신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⑨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 :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원죄에 물듦 없이 온전히 거룩하게 잉태되셨음을 기억하는 날이다. 한국교회는 이 날을 특별히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로 기념한다.
 
 
마리아와 관련한 성월
 
△ 성모 성월 : 교회는 5월을 성모 성월로 봉헌하면서 한 달 동안 특별히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고 그분 삶을 묵상하고 기도한다.
 
△ 묵주기도 성월 : 교회는 묵주기도 성월인 10월 한 달 동안 묵주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삶을 묵상한다. [평화신문, 2011년 10월 16일, 제공=서울대교구 사목국]

 

 

 

 

 

 

[성경 속의 인물] 성모 마리아 (1)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마리아는 히브리어 미르얌을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다. 신약성경이 희랍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미르얌은 모세 누나의 이름이었다(탈출 15,20). 당시 히브인들 사이에는 이 이름이 많았던 것 같다. 신약성경에도 성모님을 포함해 5분이 등장한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 그리고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와 로마서 16장 6절에 등장하는 마리아다.

 



마리아의 어원이 되는 미르얌은 미르와 얌의 합성어로 보고 있다. 미르는 고대 이집트어 ‘뮈르’ 동사가 원형이다. ‘어여쁘다, 좋아하다, 아름답다’라는 뜻을 지녔다. 한편 얌(Yam)은 고대 셈족어로 신(神)을 뜻하는 단어였다. 따라서 미르얌은 ‘신의 사랑을 받는 이’란 의미가 되겠다. 당시 미르얌의 가족은 이집트에서 살고 있었기에 이런 이름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미르의 원형을 히브리어 ‘마롬’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높다, 존귀하다’라는 동사다. 야훼의 별칭인 ‘엘 마롬’(미카 6,6)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란 뜻이다. 미르얌의 어원을 마롬과 연관시키면 ‘신에 의해 높여진 이’란 뜻이 된다.

마리아의 부모는 요아킴과 안나다. 두 분에 대한 공경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는 기록이 없고 외경인 ‘야고보복음서’에 나온다. 이 복음서는 170-180년경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초대교회 때는 정경과 외경의 구분이 없었다. 신약성경이 27권으로 확정된 것은 397년에 열린 카르타고 공의회의 결정이다.

야고보복음서에 의하면 요아킴은 부유하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베들레헴 출신의 안나와 혼인했지만 자녀가 없었다. 부부는 오랫동안 기도하며 헌신한 뒤에 아이를 낳게 될 것이란 천사의 방문을 받는다. 그가 마리아였다.

요아킴과 안나를 기념하는 축일은 원래 9월 9일이었고, 동방교회에서 먼저 시작하였다. 서방교회에 도입된 것은 8세기 이후며, 14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5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7월 26일을 ‘성 요아킴과 안나 축일’로 지정했고,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요아킴(Joachim)은 히브리어로 ‘주님께서 굳게 하신다.’라는 의미다. 안나(Anna)는 그녀의 이스라엘 이름인 ‘한나’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이며, ‘자비를 베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12년 7월 8일 연중 제14주일 ·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가톨릭마산 14면]


성모 마리아 (2)


초대교회 교리는 매우 단순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전부였다. 그러다 그분의 생애와 탄생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디서 오셨을까?’ 이 질문을 묵상하면서 그분의 탄생 이전까지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첫 복음서인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이 없다. 후대에 기록된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 비로소 등장한다. 초대교회 관심이 반영된 결과다. 이렇게 되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관심이 나타났다.

하지만 성경에는 많은 기록을 담지 못했다. 신약성경의 주된 관심이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등장은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시절에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공생활 중 한두 번 나타나신 것이 전부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한 번 더 등장하신다.

서간에서는 갈라티아서 4장 4절이 유일하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갈라티아서는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구약에서도 성모 마리아에 대한 암시를 찾을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구절은 창세기 3장 15절이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에 상처를 입히리라.”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뱀(사탄)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교회 전승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모친 마리아에 대한 언급으로 받아들였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마리아를 ‘제2의 하와’라 표현하기도 했다.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를 제2의 아담이라 묘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편 이사야서 7장 14절도 성모님에 대한 암시로 보고 있다. ‘주님께서 몸소 표징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작가는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으로 인용했다(마태 1,22-23). [2012년 7월 15일 연중 제15주일(농민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성모 마리아 (3)


초대교회의 대중 신심은 순교자에 대한 공경이 으뜸이었다. 로마의 박해를 함께 겪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가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었다. 가장 오래된 기도문은 250년경 작성된 성모께 보호를 청하는 기도(sub tuum praesidium)다. 초대교회는 이미 성모님을 통해 예수님께 청원을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431년의 에페소 공의회는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식 선언한다. 이렇게 되자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묘사한 성화도 인준되었다. 하지만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방교회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마리아 신심을 대중 사이로 보급시킨 것은 5세기의 동방교회였다.

사람들은 성모님의 생애에 관한 전승과 유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성모님께 봉헌하고 마리아를 주보로 모신 성당도 등장했다. 교황 세르지오 1세(687-701)는 로마 전례력에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의 축일을 포함시켰다.

중세가 되자 성모 신심은 한 차원 발전하였다. 성모송이 생겨났고 성모님을 찬미하는 성가들이 다양해졌다. 혁명적인 것은 묵주기도의 등장이었다. 원래 묵주기도는 순교자들의 무덤에 바치던 장미꽃에서 유래되었다. 현재 모습으로 보편화된 것은 중세의 도미니코 성인 시대다. 이후 미켈란젤로 같은 대가들이 마리아와 관련된 미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성모님에 관한 가르침은 원죄 없는 잉태와 승천이다. 1854년 교황 비오 9세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언하였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영향으로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를 물려받는다. 하지만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 이것이 원죄 없는 잉태 교리다. 예수님의 어머니셨기에 보호를 받으셨던 것이다. 1858년 성모님께서는 프랑스의 루르드에 나타나시어 이 교의를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죄인이라 하면 예수님께 죄를 짓는 것이 된다고 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승천을 교의로 선포하였다. 마리아께서는 지상 생활을 마친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교리다. 사람은 죽으면 영혼과 육신이 헤어진다. 그리고 다시 만나려면 공심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마리아의 육신은 원죄에서 해방되었기에 바로 승천하셨다는 가르침이다. 성모승천 교의는 마리아를 새로운 하와로 보는 성경의 관점에서 비롯되었다. [2012년 7월 22일 연중 제16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성모 마리아 (4)


성모송의 첫 부분은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이다. 둘째 부분은 성모님 방문에 대한 엘리사벳의 예찬이다. 천사의 말은 루카복음 1장 28절에 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엘리사벳의 찬미는 42절이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기 또한 복되십니다.” 성모송은 두 성경구절이 합쳐진 것으로 6세기경 나타났다. 후렴 부분은 16세기 초 교회가 첨부한 것으로 16세기 이전에는 없었다.

천사 가브리엘은 성모님에게 기쁨을 전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기쁨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를 처음 만나는 순간 ‘기뻐하라’ 했던 것이다. 희랍말로는 ‘카이레’다. 다시 말해 희랍어 성경에는 ‘카이레 마리아’로 되어 있다.

그런데 4세기 말부터 희랍어 성경은 라틴어로 번역된다. 훗날의 불가타 성경이다. 이 성경에서 ‘카이레 마리아’는 ‘아베 마리아’로 번역된다. 인류는 메시아를 고대해왔다. 이제 때가 되어 그가 탄생할 기쁨의 시대가 되었다. 천사는 마리아를 이 기쁨으로 초대했던 것이다. 엘리사벳의 인사에는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는다. 교회가 나중에 ‘태중의 아기’에 예수님을 첨가했다. 이렇게 해서 마리아로 시작된 성모송은 예수님으로 끝나게 된다.

성모님께 드리는 대표적인 기도는 묵주기도다. 라틴어 로사리움(장미 꽃다발)에서 유래되었기에 로사리오라고도 한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형장으로 갈 때 장미로 엮은 관을 썼다고 한다. 자신을 바친다는 의미였다. 이후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꽃을 현장에서 주워 모은 뒤 한 송이마다 한 가지씩의 기도를 바쳤다. 영적 꽃다발이었다. 이 관습에서 묵주기도가 생겼다고 한다. 1917년 성모님께서는 파티마에 발현하시어 묵주기도를 매일 바칠 것을 당부하셨다.

대표적인 성모신심 단체는 레지오 마리애다. 1921년 9월 7일 아일랜드에서 환자들을 위한 젊은 여성들의 방문모임이 발족되었다. 15명으로 시작된 모임의 첫 이름은 ‘자비의 모후회’였다. 그러다 1925년 11월 레지오 마리애로 명칭이 바뀌었다. 마리아의 군대라는 라틴말이다. 우리나라는 1953년 메리놀회 신부님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목포 산정동본당에서 첫 주회가 있었다. 마산교구는 1956년 7월 10일 진해 중앙동본당에서 첫 주회가 있었다. 당시 본당주임이던 장병화 신부님이 주선했고 명칭은 ‘하늘의 문’이었다. [2012년 7월 29일 연중 제17주일 가톨릭마산 14면]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y Kolbe)

신부,순교자,1894-1941년,1983년 시성,축일 8월 14일

 

 

[성좌의 소리] 꼴베 신부 시성식 강론 요지

벗 위해 목숨 바친 숭고한 사랑



다음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지난 10월 10일 ‘바티깐’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의 시성식 식장에서 행한 강론이다.“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오늘 교회는 이 구원의 말씀을 거의 문자 그대로 실천했던 한 사람에게 성인의 칭호를 드리고자 합니다.

1941년 7월말 강제수용소가 죄수들을 아사형에 처한 것을 결정했을 때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신부는 그들 중 한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자원은 받아들여졌고 2주간이 넘도록 기아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막시밀리아노 신부는 1941년 8월 14일 사망했습니다.

이것은 지난 2차 세계 대전 중에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고 4백여만의 사람들이 거기서 죽어갔습니다. 생명의 창조주인 하느님이 “너희들은 살인하지 말라” 하신 말씀에 위배되게 많은 결백한 사람들에 대한 대학살이 강행된 것입니다.꼴베 신부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한 사람을 대신해 죽음으로써 그의 생존권을 지켜주었습니다. 프란치스젝 가요와닉젝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오늘 우리들 가운데에 있습니다.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꼴베 신부는 지난 71년 ‘복자’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세상의 속죄가 이루어졌으며 꼴베 신부가 경험한 죽음을 통해서 금세기에 사랑의 빛나는 표지를 재인식하게 되었습니다.지금 사랑은 죄와 죽음에 의해 심각하고 다양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솟아난, 그 형제를 위하여 죽는 것은 꼴베 신부의 경우를 포함해서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함으로써 인간의 영웅적인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이러한 순교의 은덕이 나오는 것입니다.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는 폴란드에서 살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한정한 희생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고 순교에 대한 열망을 안고 있었습니다.이러한 사랑과 열망은 그를 프란치스꼬회로 이끌었고 사도직에 몸담게 했으며 이를 준비하기 위해 폴란드와 ‘로마’에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사제로 어디를 가든 이 사랑과 열망은 따라 다녔고, 폴란드에서 프란치스꼬회 회원으로 봉사할 때도, 일본에서 선교 사업을 할 때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그의 인생 전체의 영감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랑과 순교에 대해 열망을 갖도록 이끌었습니다. ‘순결성’에 대한 그의 존경은 사람에게 보여 지는 하느님의 은총의 불가사의하고 초자연적인 세계로 떠올랐습니다. 그의 신앙과 활동은 ‘순결성’의 기치 아래 봉사함으로써 천부적인 감사로 협동해 나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1941년 8월 14일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기아형사에서는 “하느님의 시련”이 일어났습니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신부는 “그 스스로가 값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지혜서 3,5). 하느님은 “도가니 속에서 금을 시험하듯이 그를 시험하시고 그를 번제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지혜서 3,6)

고통과 죽음이 닥쳐오면 “미련한 자들의 누에는 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재앙으로 생각될 것이며 우리들 곁을 떠나는 것이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의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삶과 영광을 ‘하느님 손안에서’ 경험합니다(지혜서 3,1~4).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이 죽음의 결실을 맺습니다.그리스도가 제자에게 그들이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으라.”(요한 15,16)고 하신 말씀이 실현된 것입니다.꼴베 신부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형제들 위하여 내어준 것”입니다. 그러한 죽음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두려운 것으로, 인간이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완전히 무한한 위대함입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자신을 죽음 앞에 내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인간적인 죽음을 예수로 향하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인간의 품위에서 예수로 향하는 증거는 그의 생애를 존엄하게 한 증거가 되며 죽음의 구원력을 증거하며 사랑의 힘을 명백하게 만들어줍니다.이것은 인간을 신성하게 하는 것과 인간에 대해 증오하고 모욕하는 모든 체제를 극복하고 승리한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한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승리의 신호를 받아들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힘을 통해 승리한 것에 흠숭과 감사를 드립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교회는 그 아들과 딸들이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성성을 선언할 때 모든 마땅한 정확성을 다하도록 힘쓰면서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모든 측면을 되새겨봅니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그의 지상에서의 종의 직분 내에서 하느님이 주신 성성을 부주의하게 드러내는 결정적인 의미나 말의 성찬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막시밀리시아노 꼴베 성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고백복자로 시복을 한 바 있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특히 폴란드와 서독의 감독단 형제들이 말한 것처럼 막시밀리아노 꼴베 성인을 ‘순교성인’으로 요청한 것을 심사숙고했습니다.

막시밀리안 성인의 죽음과 생애가 웅변해주는 것을 통해 하느님이 교회와 세상에 그의 죽음에 대해 보이신 신호의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유의해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인간의 사랑으로 죽음에 직면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현저하게 성취한 것입니다.꼴베 신부의 죽음이 그를 현저하게 그리스도와 닮게 만들어 모든 순교자의 모범이 되어 그의 형제를 위해 십자가위에 그의 생애를 바쳤다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죽음이 우리 시대와 교회의 존재를 현저하고 통찰력 있게 웅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나의 신학적 권위의 덕을 빌어 나는 막시밀리아노 꼴베가 시복된 이래로 ‘고백자’로 불리던 것을 ‘순교자’로서 불러주도록 천명합니다.“주의 눈으로 보시기에 그의 충실한 종의 죽음은 값지다.”[가톨릭신문, 1982년 12월 5일]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축일 8월 14일)의 생애
 
 

 

 

성모님의 성화 앞에서 기도하던 한 소년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러자 소년은 성모님께 “성모님, 저에게 뭘 주시겠어요?”라고 청합니다. 성모님은 흰 꽃이 그려진 왕관과 붉은 꽃이 그려진 왕관을 보여주시며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고민하던 소년은 결국 “두 개 다 주세요.”라고 욕심스럽게 답합니다. 이렇게 어릴 적 욕심처럼 순결의 흰 왕관과 순교의 붉은 왕관 모두를 쓰신 성인이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ia Kolbe) 신부입니다.
 

 

콜베 신부는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인 부부 율리오 콜베와 마리아 다브로프스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직후 ‘라이문도’라는 세례명을 받은 콜베는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강한 성모님 신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14세의 나이에 라부프 소신학교에 들어갔고, 1911년 18세에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형 프란체스코와 함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막시밀리아노라는 새로운 이름의 수도명을 받았습니다.
 
1912년에는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학업 중인 1917년 로마에서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성모기사회를 창설합니다. 1918년 사제서품을 받고, 다음 해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 해 9월에 폴란드로 귀국하여 교수생활을 하다가, 10월에는 본격적인 ‘성모기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1922년 1월에 콜베 성인은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1935년 70만부 발행, 1949년 100만부 발행)’를 창간하였으며, 1927년 10월에는 ‘원죄 없으신 성모마을(니에포칼라누프)’를 건설하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일본 학생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콜베 신부는 동양 선교에 대해 사명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1929년 12월 30일 폴란드를 떠나 이듬해 4월 24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도 그는 ‘성모의 기사’를 발행했으며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6년 후, 콜베 신부는 폴란드에 있는 성모의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귀국했습니다. 이즈음은 나치 독일의 침략 야욕이 가시화되던 시기였기에 그는 전쟁으로 인한 심한 박해와 시련, 특히 자신의 고난을 자주 예고했다고 합니다. 결국 1939년 9월 나치 독일 군대는 폴란드를 점령했으며, 콜베 신부는 1941년 2월 17일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사실 체포된 실질적인 이유는 그가 100만부에 이르는 잡지 발행자로서 폴란드 국민에게 커다란 영향력과 권위를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5월 28일 그는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던 ’오센침(아우슈비츠)’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콜베 신부는 사제이기에 더욱더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결코 평온함을 잃지 않았으며 자신이 더 어려우면서도 오히려 절망하고 있는 주위의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고해성사를 주었습니다. 또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틈틈이 설교와 면담을 해줌으로써 수감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심어 주는 데 전력하였습니다. 그러다 때로는 발각되어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몸이 망가져 갔지만, 수용소 안에서도 그의 사제직무 수행은 불굴의 의지로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는 훗날 순교로 꽃을 피웠습니다.
 
수용소에서 한 죄수가 탈출에 성공하는 일이 발생하자 화가 난 수용소장은 자신이 세운 규칙을 내세우며 탈출한 사람이 속한 감방의 수감자 중 10명을 굶겨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무작위로 선택된 10명 중 한 사람,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는 자신의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소리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감자 중 한 사람이 대열에서 나와 그 사람 대신 굶어 죽겠다고 자원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콜베 신부였습니다.
 
콜베 신부는 인간이 세운 가장 사악한 곳 중 하나인 아사 감방을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정복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9명의 수감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수감자들은 굶주림 속에 고통당하면서도 콜베 신부와 함께 죽음의 자리를 찬미의 자리로 바꾸었으며, 콜베 신부의 병자성사와 함께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마침내 콜베 신부를 포함한 4명만 남게 되었을 때 나치는 독약 주사를 투약하였습니다. 이렇게 콜베 신부는 4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그 날은 1941년 8월 14일이었고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는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포되어 나치 희생자들 가운데 시복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으며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수감자들의 주보성인입니다.[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0년 4월호]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막시밀리안 콜베 (1)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

 

 

사랑의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콜베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성인이다.그것은 그가 단순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감방 동료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영웅적 행위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한평생 하느님과 성모님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고 늘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용의 중에 살았기 때문이다. 매일의 사랑의 순교자적 삶이 그를 순교의 은총에 응답하도록 했던 것이다. 극도의 시련인 아사 감방에서의 죽음은 그의 거룩한 삶의 자세를 세상에 밝혔을 따름이다.


 

생애


막시밀리아노 콜베는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준스카불라에서 아버지 줄리오 콜베와 어머니 마리아 다브로프스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라이몬도」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막시밀리아노」)는 수도원에서 착의식 때 받은 이름임).라이몬도는 열심한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았고 훌륭한 성모신심을 몸에 익혔다. 그러한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1907년 14세의 나이에 라부프 소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으며 3년 후에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는 수련을 마치고 1911년 9월 5일 유기서원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장상들은 그의 특수한 재능을 인정하여 그레고리안 대학교에 입학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학업 중이던 로마에서 그는 1914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종신 서원을 했다. 다음해 10월 22일엔 그레고리안에서 최우수 성적을 인정받으며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허약한 중에도 학업으로 과로했던 그는 1917년 여름에 폐결핵에 걸렸고 그런 상태에서 그는 여전히 학업에 열중했다.


그 해 10월엔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하였다. 10월 17일 첫 회합을 가진 이래 새로운 회원들은 끊임없이 늘어갔다. 성모의 기사가 실행해야 할 것은 기도, 좋은 표양, 고생 그리고 노동이었다. 1918년 4월 28일 콜베는 사제 성품을 받았다. 그리고 이튿날 프라테의 성 안드레아 성당의 「기적의 제단」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학업을 계속한 콜베는 다음 해 7월 22일 같은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몹시 쇠약해진 그는 9월에 폴란드로 귀국했고 크라코프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10월엔 「성모의 기사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병세가 매우 악화되어 요양치료가 필요했고 결국 그는 자코파네의 요양원서 근 일년 동안 치료받으며 머물러야 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사도직을 수행했는데 기회 되는대로 환자들을 방문하며 대화했고 가르쳤으며 많은 이들에게 고해성사를 받도록 했다.병세가 호전되어 그는 크라코프에 돌아가 다시 일을 하였다. 1922년 1월,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창간했다. 장상의 명령으로 그로노드로 이동해서도 여전히 잡지를 발행했다.

 
처음엔 잡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보냈으나 많은 이들이 후원금을 보내어 계속 출간할 수 있었다. 5천 여부 발행되던 잡지가 1925년엔 배로 증가되었다.병이 재발하여 콜베는 다시 자코파네 요양원에 가 1년 반 동안 치료받았다.그 기간 동안 그의 동생 알퐁소 신부가 대리로 임명되어 업무를 수행했다. 그런 중에 1926년에 잡지가 4만 5천부로 늘어나 발행되었다. 중병에서 기적적으로 일어난 그는 그로노드로 다시 돌아 왔다.1927년 10월 드루츠키 공작으로부터 땅을 기증 받게 되어 콜베는 출판부 수사들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니에포칼라누프)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난했으므로 판자집을 짓게 되었는데 주민들이 음식 준비와 노동으로 봉사하며 도와주었다. 그 해 11월 22일엔 드디어 성모의 마을에 입주했다.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의 발행 부수는 매년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27년 5만 부 발행되던 잡지가 8년 후인 1935년 70만 부로, 그후 5년 되던 1940년에 1백만 부에 달했다.한편 콜베는 어린이들을 위한 잡지의 필요성을 느껴 「원죄 없으신 성모의 소년 기사」를 발간했고, 외국인들을 위한 잡지로 라틴어로 쓴 「Miles Immaculatae」(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내었다.


그는 이어서 가톨릭 정신이 선명하게 부각되며 어느 당파나 개인적 이익을 초월하는 신문을 1935년 5월에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작은 신문」(Maly Dziennik)이었다. 훌륭한 편집에 저렴한 구독료, 무보수 독지가들의 판매 봉사 등으로 신문은 신속히 그리고 널리 유포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콜베는 그 성공의 비결을 알고 있었다.


성모님의 전구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임을 잘 알았던 것이다. 「작은 신문」의 출발점은 9일 기도였다. 콜베는 창간호가 나오기 9일 전부터 327명의 동료 수사들과 함께 단식과 많은 희생을 봉헌하며 성체 앞에서 밤낮으로 기도했던 것이다.콜베는 성모의 마을이 창립 된지 3년이 되어갈 때 동양 선교 사명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 동기는 어느 날 그가 기차에서 몇 명의 일본인 학생들을 만나 대화하던 중 하느님과 성모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관구장을 찾아가 일본에 성모의 마을을 세우고 선교하고 싶은 뜻을 표명했다. 장상들이 허락하여 그는 4명의 수사와 함께 1929년 12월 30일 폴란드를 떠나 다음해 4월 24일에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했다.도착 후 만 한달 되던 5월 24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고국의 성모의 마을에 보냈다.『오늘 창간호를 보냅니다. 인쇄소를 설치했습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 만세! 막시밀리안. 』 콜베는 1931년 5월에 히꼬야마 기슭에 땅을 얻어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을 설립하였다.

 


일본에 도착한지 2년 후 1932년 6월에 그는 새로운 성모의 마을을 설립하기 위해 인도로 떠나 에르나쿨람에 도착했다. 그곳 대주교로부터 인도 선교활동의 허락을 얻었다. 그는 일차 사명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 와 잡지를 더욱 발전시키며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1936년 6월에 갑자기 콜베는 폴란드의 성모의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귀국해야 했다. 그는 일본에서 돌아 온 후 심한 박해와 시련이 닥칠 것을 예감하며 자주 언급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전쟁이 절박해옴을 예감했으며 수사들이 영적으로 그것에 대비하도록 촉구했고 자신의 고난에 관해 예고했다.


드디어 1939년 9월 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침범했고 같은 달 19일 나치스 헌병들이 콜베와 동료 수사들을 체포해 암티스 수용소와 오스체슬로 수용소에 억류했다가 석방했다. 그들은 성모의 마을로 돌아 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복간했다.


1941년 2월 17일 나치스 비밀 경찰에 의해 콜베가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갇혔다.

그곳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고통받고 있던 많은 이들에게 고해 성사를 주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위로해 주었다. 그 해 5월 28일 그는 좥죽음의 수용소좦로 불리던 오셴침(아우슈비츠)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절망하는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틈틈이 영적 강화를 들려주었다. 어느날 수감자 탈출 사건이 일어나 같은 감방에 있는 10명이 소장에 차출되어 아사형에 처해졌다. 처자를 위해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울부짖던 감방 동료를 살리기 위해 콜베는 그 대신 아사실을 자원했다. 절규와 비탄이 흐르던 생지옥 같은 아사실은 콜베 신부로 인해 기도와 노래를 부르는 천국의 모습으로 변했다.


형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9명의 수감자들이 생을 마칠 때까지 기도해 주고 위로하던 마지막 생존자 콜베 신부에게는 경찰이 독약 주사를 놓았다. 그 때는 그의 나이 47세 되던 1941년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인 8월 14일이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1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막시밀리안 콜베 (2)

 

 

막시밀리아노 콜베의 전기의 저자 마리아 비노프스카는 하나의 일화를 소개하며 그것이 전기를 쓰게 된 동기라고 머리말에서 밝힌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친구 피에르가 절망에 빠져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그에게 도전해왔다.『살육이 자행되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도 성인이 있단 말인가? 진정 성인, 자신보다 이웃을 더 사랑한 성인이 있다면 내게 보여달라!』


전혀 알지 못 하는 사람 대신 아사 감방에 들어가 죽은 콜베 신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 친구는 그 위인에 완전히 매료되어 인간을 재발견함으로써 하느님을 다시 찾았고 끊어졌던 신앙의 유대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인간을 매료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는 콜베의 영성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그에게 성모께 대한 신심, 사도적 영성 그리고 순교 영성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통합적 영성을 이룬다.

 
 

성모 신심


어려서 성모님의 발현을 체험한 콜베는 로마에서 공부할 때 성모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받게 되었다. 그의 오른 쪽 엄지손가락의 염증으로 뼈가 썩기 시작해 의사로부터 절단수술을 선언받았으나 루르드의 물을 구해 환부에 몇 차례 바른 후 완쾌의 기적을 체험했다. 그로 인해 그는 성모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그분의 용감한 기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성모께 대한 콜베의 존경과 사랑의 표현의 일부를 어떤 이는 복음적 교리를 흐리게 하는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성모의 기사로서 대장 성모께 대한 열렬한 충성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문제없이 포용될 수 있다.


그는 구원사 안에서 주님의 종으로서 구원 사업의 협력자로서 성모님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이해하며 그에 맞는 존경과 예우를 드린다. 그분은 인간이 예수께 나아가기 위하여 통해야 할 전구자이시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도록 해주시는 협력자이시다.
콜베의 성모께 대한 신심의 정통성과 탁월함은 교도권에 의해 확인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시복식 강론에서 콜베를 『마리아의 신비를 이해하고 공경하며 찬미했던 위대한 성인들과 긴 안목을 지닌 성인들의 반열에 계신 분』으로 선언한 것이다.

 
 

사도적 영성


콜베의 선교사명과 활동 수행은 성모신심 안에서 더욱 성장해 나갔다. 그것은 『성모를 통하여 성모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성모의 기사회」의 목적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성모님의 전구와 도우심을 통하여 사람들을 복음화하고 성화시키고자 한 것이다.콜베는 일생을 통해 「성모의 기사회」 운동을 추진하고 확산시키면서 선교하였다. 이 운동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라는 잡지를 통해 추진해 나갔다.

 

이 잡지는 1939년에 폴란드에서만 1백만 부를 돌파했다. 점차적으로 「성모회 기사회」의 계획은 폴란드의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니에포칼라누프) 안에서 발전했는데 2차 세계 대전 즈음엔 650 여명의 수도자와 180명이 넘는 지원자가 거기서 살며 일했다.콜베는 폴란드에서 성모의 마을이 세워진 지 3년 되던 해 동양 선교의 사명을 느끼며 일차 대상으로 일본을 선정했다. 장상의 허락을 얻은 그는 하느님의 섭리만을 믿고 일본으로 떠났고, 도착 한 달만에 기적적으로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잡지를 출간했으며 두 해 후엔 성모의 마을을 세웠다.

 

선교에 대한 콜베의 열정은 한계를 모른 채 전진하며 세계 도처에 성모의 마을건립을 추진하며 복음화 활동을 하고자 했다. 일본을 향해 가던 중 사이공에서 콜베는 안남의 신부들과 접촉하여 그곳에서 성모의 기사 잡지를 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았으며 상해에서는 부호 로팡호로부터 중국어로 잡지를 발행하는데 필요한 자금 제공 약속도 받았다. 그는 한 편지에서 선교의 포부를 이렇게 전개했다.

 

『우리들의 사업이 일본에 단단히 뿌리 내리면 인도로 건너가 사업을 벌이고 다음에 아라비아인들을 위해 베이루트로 건너갈 예정입니다. 터키어, 페루샤어, 아라비아어, 히브리어로 잡지를 발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성모의 기사회의 활동은 10억 독자, 즉 지구의 반에 미치는 것입니다』


일본에 도착한 지 2년 후 그는 인도에 가 에르나쿨람 대교구장으로 부터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허락을 얻었다. 그는 폐결핵과 과로로 몹시 쇠약했으나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선교 활동에 온통 투신했다. 그의 선교 활동은 수용소 안에서도 지속되었다.

 

그는 어느 곳보다도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의 은총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엄격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콜베는 고해성사, 영적 훈화, 상담 등을 통해 증오와 절망으로 가득 찬 수감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심어 주는데 전력했다. 때론 발각되어 심한 구타로 실신까지 했지만 그의 사도직 활동은 좌절할 줄 몰랐다. 수용소 안에서 그러한 사도직 활동 뿐 아니라 그의 모범적 사랑의 삶과 특히 헌신적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었으며 큰 위안이었고 복음 선포 자체였다.

 
 

순교의 영성


감방 동료를 살리기 위해 대신 아사실을 자청했던 콜베의 순교자적 죽음은 갑작스런 영웅심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었다. 주님의 일군으로서, 성모님의 기사로서 그의 일생의 삶은 나날이 순교의 준비였으며 훈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헌신적 죽음은 그가 일생 살아온 방식의 마지막 귀결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예사롭지 않은 신비체험을 했다. 어느 날 성모님이 두 개의 상자를 들고 그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붉은 색의 상자였다. 그분은 다정스럽게 콜베를 바라보며 어느 것을 원하시는지 물으셨다. 흰색의 상자는 순결을 뜻하고 붉은 색의 관은 순교를 뜻한다는 그분의 설명을 듣고 콜베는 둘 다 원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성모님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사라지셨다.

 

이 발현 사건은 콜베가 죽은 후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동료 수사들에게 보낸 편지(1941. 10. 12)에서 밝혀졌다. 어머니는 아들이 그 사건을 말한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으므로 그의 체험이 사실이었다고 확신했고 그가 순교자로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했다.『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주님께서 가르치셨고 실천하신 이 사랑을 콜베는 그대로 본받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겪어야 할 고난을 예감했고 그것을 동료들에게 여러 차례 예고했다.

 

그는 또한 십자가, 고난 그리고 순교적 죽음으로 던져지는 것이 주님의 구원 사업 완성에 유익한 협력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수용소에서 함께 지냈던 이들이나 간수들은 콜베가 감방 동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 주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가 수용소와 아사 감방에서 실천한 놀라운 사랑을 한결 같이 입을 모아 증언한다.

 

그는 수용소에서 전반적으로 자신에게 보다 쉬운 일이 돌아오도록 결코 애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동료들이 덜 힘들도록 가장 힘든 일을 선택했다. 그는 폐결핵으로 쇠약했지만 자신의 몫의 음식을 자주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애덕을 실천했다.


감시원들의 엄격한 경계와 금지 조처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료들에게 사제로서의 임무를 기회 되는대로 부지런히 수행했다. 콜베의 기도와 격려 고해 성사와 영적 훈화 등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마음의 위로, 희망, 용기를 얻었으며 절망과 자살의 유혹을 극복했는지 생존자들은 증언한다.콜베의 아사행 자원은 한 사람을 구한다는 것 이상의 동기가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한다. 즉 9명의 다른 사람들을 절망으로부터 구제해야 한다는 중대한 사명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인간이 만든 가장 잔악한 그 곳을 사랑으로 정복해 나갔다. 미움을 사랑으로, 모욕을 용서로, 저주는 기도로 바꾸어 나갔다. 콜베의 영웅적 사랑은 간수들에게조차 충격적인 것이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8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막시밀리안 콜베 (3)

 

 

1) 콜베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악과 투쟁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그가 성모의 기사회를 창립한 때는 파티마에서 성모님이 세 어린이에게 나타나시던 해이며 러시아가 공산화되었고 반 교회적인 비밀 결사단 프리메이슨(Freemason)이 로마에서 대담하고 난폭하게 활동하던 1917년 10월 17일이었다.


성모의 기사회의 목적은 '성모를 통하여 성모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고, 그 목표는 죄인들, 이교도들, 이단자들 및 반 교회 비밀 결사단원들의 회개를 위해 그리고 모든 이들의 성화를 위해 성모님의 보호와 전구를 빌며 활동하는 것이다.


이 기사회의 운동은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통해 추진해 나간다. 회원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의 발전을 위해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고 날마다 봉헌을 새로이 하면서 봉헌 기도를 바친다. 기적의 메달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그리고 기사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생활에 임한다.


성모의 기사회는 1918년 4월 4일 교황 베네딕도 15세로부터 인준되었으며, 1926년 12월 18일 비오 11세는 이 기사회에 특정한 권한과 대사를 허락했고 1927년 4월 24일엔 전 세계에 이 신심 단체의 지부 설립을 허락했다. 한국 교회엔 1976년 5월 20일 대구 대교구장으로부터 교구 내에 지부 설립 승인을 받은 것으로 시작하여 인천 교구(1982. 2. 16), 마산 교구(1986. 9. 3), 서울대교구(1986. 12. 12), 부산교구(1986. 12. 20), 대전교구(1986. 12. 30), 전주교구(1987. 1. 14) 등 여러 곳에서 지부 설립을 승인 받아 수 만 명의 회원들이 기사회 모임을 가지며 활동하고 있다.

 

2) 콜베는 매스 미디어(대중 매체)를 통한 선교의 선구자였다.


'매스 메디어에 관한 교령'을 통해 복음 선포와 교육에 대중 매체를 활용할 것을 권장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기 30 여 년 전 콜베는 이미 그 위력과 효율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콜베는 우선 출판물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는 데 열중했으며 놀라운 결실을 얻었다. 그가 동료 수사들과 1922년 1월 창간하여 제작한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의 부수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24년에 1만 2천부, 1927년 5만부, 1929년 11만 7천 5백부, 1931년 43만 2천부, 1935년 70만부, 1939년엔 1백만 부에 달했다. 그는 이어서 어린이들의 신앙 교육을 위한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소년 기사'와 외국인들을 위해 라틴어로 쓴 잡지를 발간했다. 그뿐 아니라 가톨릭 정신을 선명히 드러내는 신문을 발행하여 신속히 광범위하게 유포시켜 대중을 포섭했다. 그러한 성과의 뒤엔 무엇보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자세로 콜베와 327명의 노동 수사들의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콜베는 방송국을 설치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영상을 통한 교육 및 복음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초기 단계였던 영화는 교회 안에서 윤리적 가치가 없다고 평가되며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으로 인해 무산되었지만) 선교용 가톨릭 영화를 제작하기 위하여 일류 배우들을 기용하려 구상했고 성모의 마을 안에 소형 비행장을 지을 계획도 세웠었다.


콜베는 복음 선포를 위하여 출판물 뿐 아니라 현대의 과학 기술을 홍보 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던 선구자였다.

 

3) 콜베는 노동의 품위를 향상시켰다.


많은 지역에서 그러했지만 폴란드에서는 콜베가 활동하던 시대까지 봉건주의 사상이 남아있어 수사 신부와 노동 수사 사이에 높은 담이 있었다. 노동 수사들은 개인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만큼 하층 계급을 대표하듯 중노동을 했던 것이다.


콜베는 수도회의 설립자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으로 복귀하는 쇄신을 시도하였다. 민주적 사고 방식을 가지고 당시에 일대 혁신을 이룩한 성 프란치스코는 일생 사제 아닌 평 수사(부제품은 받았음)로 살았다. 콜베는 수도원의 관행적 차별을 파기하면서 노동 수사들을 수사 신부들에게만 유보되어 있던 제 일선의 지위로 높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득권 층에 있던 일부 사제들로부터 저항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창립자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철저한 청빈과 모범적 순종의 자세, 순교자적 헌신과 봉사 그리고 열렬한 애덕은 함께 살며 공동 작업을 하던 동료 수사들로부터 존경과 사랑 그리고 적극적인 협력을 얻도록 했다.


한편 콜베는 잡지를 발행하기 위해 수도자들이 수도복을 입은 채 기계를 다루며 일하는 모습의 사진을 잡지의 일부 면에 삽입하곤 했다. 그것은 수도자들은 종일 기도만 한다든지 혹은 노동이란 농사일을 하는 것만으로 생각하던 일반인들에게 발전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면서 역동적으로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는 수도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4) 콜베는 신앙 때문에 직접 박해받진 않으나 이기심과 편이주의에 안주하도록 유혹 받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현실적 귀감이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 15, 13)고 가르치셨고 인류 구원을 위해 실천하신 주님의 모범을 따라 콜베는 최고의 사랑을 드러내며 목숨을 바쳤다. 그가 실천한 그 최고의 사랑은 나약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주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시는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어떻게 그런 은총이 가능했을까? 성령의 부르심과 이끄심에 민감히 깨어 응답하는 믿음의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언제나 주님께 모든 것을 내 놓고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용의로 매 순간 결단을 내리며 증거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여기서 신앙에 대한 박해가 없는 오늘의 상황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순교는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추구되어야 할 실재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 우리는 목숨을 내놓는 상황에 살고있진 않으나 물질 만능주의와 무신론적 분위기가 확산되어 편이와 이기심에 안주하도록 끊임없이 유혹 받으며 신앙의 위기를 겪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복음적 삶을 살기 위해선 매일 매 순간 순교자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일상에서 그렇게 길들여진 복음적 삶이 본 의미의 순교가 요구되는 극한 상황에 처할 때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은총에 응답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며 보증임을 순교자들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우리는 콜베의 생애에서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5) 콜베는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 외에 우리 땅을 밟았던 또 한 분의 성인으로서 우리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 준 분이다.

  
그는 1903년 일본으로 가기 위해 한국을 통과한 적이 있다. 그 때 동생 신부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다. "…한국을 가로지르며 한 여행은 너무나 굉장해서 모두 이것을 곰곰히 생각하는데 지칠 줄 몰랐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멈춘 부산에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린 후 배를 타려면 4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는 것을 이용해 미사를 드리고 싶었다. 한 경찰관으로부터 그 도시엔 여섯 개의 개신교 교회가 있다는 것과 성당은 한국을 통틀어 세 개쯤 될까 말까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언제쯤 성모께서 이처럼 아름다운 나라에 당신 아드님의 나라를 세우실까?"


당시 한국의 성당 숫자에 대한 정보는 맞지 않는 것이지만 콜베가 그 때 한국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간절히 청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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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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