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파 - 1762년(영조 38) 장헌세자() 또는 사도세자()라고도 불리는 영조의 세자가 폐위() ·아사()한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당쟁에서 세자를 배척한 당파().이 파의 주류는 노론(老論) 계열인데, 조선시대 중엽의 당쟁은 주로 노론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대결이었다. 벽파에 대립한 당파인 시파(時派)도 또한 남인이어서 시파 ·벽파의 당쟁은 결국 남인과 노론의 대결이었다. 남인, 즉 시파는 장헌세자가 억울하게 폐위되고, 또 뒤주 속에 갇혀 참혹하게 굶어 죽었다고 생각하여 세자를 동정하였다.

 

그러나 노론, 즉 벽파는 세자가 광패(狂悖)하여 폐세자(廢世子)의 변을 자초하였으니 조금도 동정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세자가 만일 왕위에 오른다면 나라를 망칠 것이므로 적극적으로 배척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각 당파가 표면에 내세운 명분일 뿐 사실은 두 파가 주장하는 대로가 아니었다.

 

숙종 때에 몇 번이나 되풀이된 남인 대 노론의 당쟁이 경종 때를 거쳐 영조 때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것이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탕평책(蕩平策)을 써서 당쟁을 막으려 했지만 자신도 결국은 당쟁에 말려든 셈이다. 시파 ·벽파의 당쟁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 ·순조 때에도 되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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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貞純王后 - 조선 제21대 영조의 계비.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 비변사 ·관찰사 · 수령 등 통치 질서의 확립을 강조했다.(영낙없는 박근혜판박이같은 정순왕후가 누구인지는 댓글에다 담았네요 클릭하면 댓글로 이동됩니다.)정순왕후 [貞純王后] 1745 ~ 1...

 

 

사도세자(1735~1762)는 이름은 선(愃), 자는 윤관, 호는 의재이다. 어머니는 영빈 이씨이며,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진종(眞宗)으로 추존됨]가 일찍 죽고 영조가 나이 40세가 넘어 선을 낳자 2세 때부터 세자로 책봉된다. 10세 때 혼인하여 별궁에 거처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문장과 글을 잘 읽고 지었다. 정치에도 일찍부터 안목이 있어 노론의 행적(신임사화)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15세 때부터는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되자 그를 싫어하던 노론과 이에 동조한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그를 무고하였다.

 

주변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세자는 격간도동이라는 정신질환에 걸려 궁 내외에서 비행을 저지른다. 계비김씨의 아비 김한구와 그의 노론계 일파의 사주를 받아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영조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 결국 아들을 죽이기로 결정한다. 자결을 명하였으나 듣지 않자 뒤주 안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하였다. 사도세자는 18세 때 낳은 아들인 정조가 왕에 오른 뒤 장헌(莊獻)으로 추존되고, 1899년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장조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1749년(영조 25)에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을 가까이 하기 시작하자 이에 불안해진 노론은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하며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하면서 이것을 극복할 수 없었던 극한의 처방이 이루어진 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사도세자 [思悼世子]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2009. 11. 12., 국립민속박물관)

 

 

붕당정치朋黨政治

 

.........과거에 관료들이 서로 파벌을 이루어 정권을 다투던 일.당쟁(黨爭)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지방별 이해관계, 학문의 계통에 따른 견해차, 연령·직위의 고하에 따른 시국관의 차이 등에서 서로 입장을 같이하는 인물들끼리 집단을 형성하여 그에 반대되는 집단과 대립·반목하기 시작한 것이 당쟁이다.

 

 

원래 유학(儒學)은 고려 말에 백이정(白頤正)이 원(元)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한 이후,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이 그 대종(大宗)을 이루어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조광조(趙光祖) 등에게 계승되었다. 따라서 이들 성리학도들은 조정의 신진세력으로 부각하게 되었고, 이미 육조(六曹)에 자리잡은 중앙의 귀족들과는 매사에 대립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림파로 결집하여 적극적인 혁신의 뜻을 품고, 부패한 기성세력에 대하여 맹렬한 공격을 시작하자 이 공격에 대항할 만한 이론을 가지지 못한 훈구파(勳舊派)인 중앙귀족들은 국왕을 통하여 그들의 반대파를 탄압하였다. 이러한 대립현상은 곧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어서 갑자(甲子)·기묘(己卯)·을사사화(乙巳士禍)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였다.

사화의 원인과 사정은 각각 다르다 하여도 본질적으로 그것은 신·구세력 간의 대립이고, 진보와 보수세력 간의 투쟁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사화의 타격 속에서도성리학 은 깊이 연구되었고, 서원(書院)의 발달과 함께 유명한 학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한편 문벌귀족의 과도한 권세에 불안을 느낀 국왕은 왕권의 신장을 위하여 점차 이학파(理學派), 즉 성리학도와 손을 잡게 되어, 선조 초기에는 마침내 정권이 사림파(士林派)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사림파가 훈구파의 탄압인 사화(士禍)를 극복하고 선조대(宣祖代)에 권력을 장악한 후에, 그들 사이에 붕당(朋黨)이 분기되어 자체 경쟁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사림파의 정계 장악으로 관직에 오를 자격자는 많아졌으나 관직은 한정되어 있어 필연적으로 당파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익(李瀷)은 《곽우록(藿憂錄)》의 <붕당론(朋黨論)>에서 "이(利)가 하나이고 사람이 둘이면 곧 2개의 당(黨)을 이루고, 이가 하나이고 사람이 넷이면 4개의 당을 이룬다"고 하였다.

 

 

붕당대립의 직접적인 발단은 1575년(선조 8) 이조전랑직(吏曹銓郞職)을 둘러싼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반목에서 비롯되었다. 전랑직은 그 직위는 낮으나(정5품) 인사권을 쥐는 직책으로, 판서(判書)나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의(公議)에 부쳐서 선출하였으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김효원 중심으로 한 동인(東人)은 허엽(許曄)이 영수(領袖)로 있었고,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西人)은 박순(朴淳)이 영수가 되어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하여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은 다시 서인에 대한 강온(强穩) 양론으로 갈라져 강경파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파되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서인·남인·북인의 삼색(三色)이 형성되었다. 남인은 우성전(禹性傳)·류성룡(柳成龍)이 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 등이 중심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남인 류성룡은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실각되자 북인 남이공(南以恭)이 정권을 잡게 되어 남인은 몰락하였다.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宣祖)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져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옹립하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장악하고, 소북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모함·살해하는 한편, 외척인 김제남(金悌男)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陵陽君:仁祖)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이이첨 (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서인이 집권하는 동시에 남인 이원익(李元翼)이 입상(入相)하게 됨으로써 남인이 제2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숙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즉,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 김자점(金自點)은 역모로 실각하였으나 같은 서인인 송시열파(宋時烈派)가 등장하여 서인의 집권은 현종(顯宗) 초까지 계속되다가 현종 즉위 후 효종의 모후(母后) 조대비(趙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놓고 서인의 주장인 기년설(朞年說:1주년설)과 남인의 주장인 3년설(2주년설)이 대립하는 이른바 기해복제문제(己亥服制問題)가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尹鑴) 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禮學論議)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당론으로 전환되면서 양파는 여기에 정치적 운명을 걸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妃)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喪)을 당하자 다시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고 서인은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하여,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淸南)·탁남(濁南)이라 불렀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專橫)이 심하여 집권한 지 몇 년 만에 쫓겨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고(庚申大黜陟),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갈리었다. 그러던 중 1689년(숙종 15) 서인이 물러나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되는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에는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로는 노론·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의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 등은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탕평책의 반작용으로 대간(臺諫)의 기능은 크게 위축되고, 언로(言路)는 모든 시비와 공격이 당쟁완화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어, 앞 시기의 긴장과 혈기가 풀리는 반면 공리주의(功利主義)·이기주의의 새로운 시대풍조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탕평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세는 주로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대립은 1762년(영조 38) 임오사건(), 즉 사도세자사건()을 둘러싸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 중심의 시파()와 세자의 실덕()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 중심의 벽파()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남인과 소론도 시 ·벽으로 분파되었다.

 

 

이 시·벽파의 대립은 사도세자의 문제를 분쟁의 표면구실로 삼아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남인의 시·벽파는 당시 전래하기 시작한 가톨릭을 믿는 신서교파(西)와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정조 때에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남인의 세력이 왕에 의하여 적극 옹호·신장되어 이가환()·정약용()과 같은 남인 시파의 명사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벽파가 대거진출하여 1801년 신유사옥()을 일으켜 사학일소()라는 명목 아래 많은 시파의 가톨릭교인이 변을 당함으로써 당쟁의 한 변형이 연출되었다.

특히, 시·벽의 대립으로 인한 가톨릭교의 박해는 서학도(西) 내지는 실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인을 말살시켜 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이 서학이나 실학에 전념하게 된 이유는 숙종 때의 갑술환국() 이래 남인은 대개 폐족원국()의 무리가 되어 과거()를 위한 유학()이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조선 중·후기 정치의 큰 특징이 붕당간의 대립에 있었으므로 붕당정치는 그 시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된다. 그러나 더 나아가 국왕의 위상과 역할을 깊이 이해하려는 연구 흐름도 나타나고 있으며, 붕당정치 대신 '사림정치'라는 개념으로 조선 중·후기의 정치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붕당정치 [朋黨政治] (두산백과)



Posted by T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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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okoeun.tistory.com BlogIcon Tessie. 2016.01.07 01: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순왕후 [貞純王后] 1745 ~ 1805- 영조비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죽자 1759년(영조 35) 15세로 51세 연상인 영조와 결혼하여 왕비로 책봉되었다. 친정이 노론의 중심가문이었음에 비해 사도세자는 소론에 기울어져 노론에게 비판적이었고, 그 내외가 어머니뻘인 자기보다 10세나 연상인 데서 빚어지는 갈등 때문에 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오빠 김구주(金龜柱)가 이끄는 세력이 영조 말년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洪鳳漢) 중심세력과 맞서고, 친정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벽파(僻派)가 정조대에 시파(時派)와 대립하는 데 중요한 정치적 배경이 되었다.

    1800년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신료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는데, 스스로 여자국왕[女主 ·女君]을 칭하고 신하들도 그의 신하임을 공언하는 등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였다.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때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인(恩彦君 䄄)과 정조의 친모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 등은 처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2. Favicon of http://kokoeun.tistory.com BlogIcon Tessie. 2016.01.10 0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조가 죽고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벽파를 중심으로 정계를 개편하면서 남인 시파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를 이용하였다.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 남인 시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조대에 관대하게 처리되던 천주교는 대대적인 박해를 당하였다. 정순왕후는 순조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부터 ‘척사(斥邪)’를 표방하였다. 남인 시파와 천주교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때를 기하여 사헌부에서 상소하였다.

    “아! 통분스럽습니다. 이가환∙이승훈∙정약용의 죄를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사학(邪學)이란 것은 반드시 국가를 흉화(凶禍)의 지경에 이르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재물과 여색(女色)으로 속이고 유혹하여 그 도당을 불러 모으면서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형옥을 보고도 즐거운 일로 여기고 있는데, 그 형세의 위급함이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서울과 지방에 가득합니다.” <순조실록 1년 2월9일조>

    대사간에서도 상소하였다.

    “신이 국문하는 자리에서 직접 이가환 정약용•이승훈의 무리를 보았는데 모두 어그러진 기운이 모여서 마귀의 빌미를 가지고 습성을 이루었으므로 항양을 마치 초개처럼 보고 형벌을 받고 죽어나가는 것을 마치 그들이 영광스러운 땅에 나가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 단서가 이미 드러났는데도 장형을 참으며 자복하지 않고 증거가 되는 편지가 적발되었는데도 죽기를 작정하고 저항하며 실토하지 않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이 지극히 흉패한 무리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붙잡아다 국문해서 엄중히 신문하게 하소서.” <순조실록 1년 2월14일조>

    조정대신들 63인도 연명으로 상소하여 천주교를 믿는 남인 시파를 탄핵하였다.

    “지금 이른바 서양학이라는 것이 과연 어찌 요사한 마귀의 술수를 허락하겠습니까마는 천륜을 멸절시키고 인류를 함닉시켜 사람들을 모두 짐승과 오랑캐의 지경으로 급속하게 몰아넣고 있습니다. 부모를 제사지내지 않고 신주도 받들지 않으니 이것이 과연 천지에 용납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 이러한 술수에 빠져 들었다고 세상에서 지목받고 있는 자가 불행하게도 신 등의 오랜 친구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으니, 지금 죄수 가운데 이가환•이승훈과 정약용의 형제가 바로 이들입니다.

    이는 신 등이 몹시 증오하며 지극히 분개하여 더욱 손수 도륙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 저 역적 정약종은 한낱 간사한 요괴로서 천륜을 끊고 자취를 감추어 따로 살면서 밝은 세상을 등지고 그늘진 어두운 소굴에 들어갔으니, 처음부터 이 세상에 군신과 부자의 윤리가 있음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 마음씀은 사학을 신봉하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것보다 심하고, 사학을 지키는 것이 높은 절개를 지키는 것보다도 컸습니다. 이번에 극도로 흉악하고 몹시 패려하며 부도한 말들이 문서에서 적발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옛날에 없었던 변괴이었습니다.

    아! 정약종의 형이 되고 아우가 되는 정약전과 정약용이 감히 말하기를, ‘알지 못한다.’ 하고, 또한 감히 말하기를, ‘나는 사학을 하지 않았다.’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정약용은 ‘요설에 차츰 빠져들어 거의 어진 성품을 잃게 되었다.’는 말로써 이미 자백하였고, 군부(君父)의 앞에서, ‘사학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는데. 먹 자국이 변하기도 전에 또 이러한 변괴가 나온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밝은 명을 내리셔서 부도한 죄인 정 약종에게 대역의 율을 시행하시고, 그 나머지 여러 흉적들도 흔쾌하게 형률을 시행하여 민이가 밝아지고 천토가 시행되게 하소서.”
    <순조실록 1년 2월 18일조>


    [네이버 지식백과] 정순왕후의 두 마리 토끼 잡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시대 유배문화),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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