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이 성서를 읽을 때 빠지는 함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구약읽기에 관한 전문가의 자세한 해설은,하단의 자료참고(다마수스 빈첸)




1,성서 작성자가 현대인과 같은 조건에서 살았다고 믿는다.


(성서 작성자의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간과한다)


2,진화론수업을 받은 현대인들은,성서가 사실이 아니라 신화라고 믿어 버린다.


(그들은 성서가 고고학적,언어학적 사실과 일치한다는 사실에 전혀 관심이 없다)



--- 성서 작성의 최초 인물은 모세다.이 사람이 살던 시기는 BC1400년 경이다.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에 이 모세오경,일명 토라를 작성한 작가들이었던, 모세와 여호수아가 살던 시기에,그런  비과학적인 세상에서,누군가 문자를 사용해서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자체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기적이다.아래에 첨부한 지도가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에서 나오는 역사적인 장소들이다.


이미 과학자들이 발굴한 역사적인 사실에 의하면,BC4000년 경에 수메르에서 발원한 문명인 메소포타미아와 여기서 갈라진 문명이었던 이집트를 제외하고, 그 어떤 문명권에서도 문자가 없던 시기다.당연히 이 지역에서도 제사장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역사적인 사실 기록이 불가능하다.왜냐하면,그 당시에도,개인들에게는 필기도구(벽화,파피루스)가 없던 시기다.


모세(또는 여호수아)에 의해서 작성된 성서인 구약오경은,성서 내용에 기록된대로, 자손들에게 암송되어 후손들에게 전달된다.(탈출기와 신명기,여호수아기를 읽어 보시라) 이렇게,제사장들이 사용하던 문자를 사용하여,성서가 히브리인들의 대를 이어가며,문서화될 수 있었던 것은,이집트의 왕실에서 양육된 모세가,십계명을 새긴 돌판외에도, 파피루스라는 필기도구를 사용하여 성서를 기록했을 것이란 추정은 가능하다.그러나,그런 원본 성서들이 파손되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 있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오직 추정이 확실한 것은,히브리인 가문에서 자자손손,모세가 작성했다는 그 성서 내용들이 암송되어 전승되었고,필기도구 문화가 발전되는 어떤 시기엔가, 그러한 성서의 내용들이 후대에,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쯤, 다시,성령의 영감 아래서,기록된 성서들의 파편을 현재 우리가 확인할 뿐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읽기는 일종의 암호해독에 속한다.




  1. 창세기1장을 한글과 영문으로 읽기 클릭 ☞ 창세기1장-우주탄생(물,불,원소,화학반응),빅뱅이론


특히,창세기 1장과 2장이 그 내용면에서,너무나 다른 것에 관하여 사람들은 매우 당혹해 한다.그러나,이러한 가능성을 추론하며  따지고 보면,너무나 과학적인 내용이 바로 이 창세기1장과 2장이다.1장은 우주생성에 관한 기록이다.


유의할 것은,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의 시간단위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단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즉,우주생성시기 중에서, 네번째 날에야 만들어지는 태양계(지구)!! 거기에는 현재 우리의 시간개념을 적용하지 못한다.그렇지 않은가? 지구가 자전하는 단위가 오늘날의 하루인데? 지구가 없는 상태에서의 태초의 시간이란,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개념일 수 없다.


이렇게 1장 내용은,우주생성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에 2장과 구분된다.아래 영어성서자료 참조하시라2장은,이러한 시간단위하에서,우주가 아닌,태양계(4일째되는날 만들어짐)지구별에서 일어난 일이다.그러므로 그 분야가 우주천체학과 생물학만큼이나 차이가 나는,내용면에서, 완전하게 다른 분야다.



.....이런 사항을 간과한 사람들이 머리를 벽에다가 찧으며 외친다.


성서가 역사적인 사실이라면,어떻게 1장과 2장에서의 창조내용에서 동일성이 없느냐? 또는, 사람을 만드는 순서가 다르냐?....이건 분명히,1장을 작성한 작가와 2장을 작성한 작가가 다른 까닭이며, 신화모음집이기 때문이다.이렇게 단정해 버린다.이것은 일반인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에서 성서를 가르치는,대부분의 신부님들의 자세이기도 하다.정말 안타깝다.결국 그들도 불가지론자들이며,그들에게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이야기다.특히 젊은 사제들이 염려스럽다.그래서 그들은 한상봉이 만든 신문  가톨릭 뉴스 여기를 사랑하는 중이다.



.....내가 맨 처음 성서읽기를 시작한 때는 6년 전으로,나의 구약성서읽기는,순전히 나 혼자의 진리를 향한 목마름,이것이 나의 성서연구에 관한 동기였다. 당연히 나의 믿음은,고고학연구와 함께 병행이 되었다.왜냐면,반드시 성서와 과학이 일치할거란 믿음이 나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나의 성서연구는 한국천주교싸이트는 전혀 알지 못했던 때라서,대부분 위키백과와 구글서치로 이루어졌다.이게 얼마나 다행인지...만약 한국인 사제들이 작성한 글을 읽었다면,나도 그들이 쳐둔 메트릭스에 갇혀서 비과학적인 신화로서 성서를 읽었을 것이다.야훼이레!!!


그래서,성서 요한복음에서 맨처음 나오는 구절, 최초에 말씀이 있었다란 구절은 대단히 심오하다.


앞으로 나는,요한복음과 묵시록에서의, 이 말씀(Logos)이란 단어가 그리스문화에서 유래한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순전히 성서 특유의 진리적 사실임을 증명해 나갈 것이다.왜냐하면,이 Logos,말씀이란,단순한 그리스어 의미와,그 성격이 전혀 다른다.이 말씀Logos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지구상에서 완전하게 구별이 되는 서양문명과 유교문명의 차이와 함께 설명할 계획이다.


Logos란, 두 개의,전혀 접촉점이 없는 문명인, 서양의 그리스도(천주교만 해당,개신교는 제외)문명과 동양의 유교문명이,16세기의 이탈리아의 예수회신부(마태오 리치)에 의해서 만나는 접점이다.이 동양의 유학,군자들의 도덕적인 삶의 추구야말로 예수께서 그토록 강조한 마태오 5장에서 7장까지의 내용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마태오 리치가 활동하던 같은시기란,유럽에서의 카톨릭교회가, 루터와 칼뱅에 의해서 철저하게 분열되며,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비참하게 파괴되던 시기다.세계사시간에 우리는 이 암흑의 시기가 중세시대요,개신교가 다스리던 시대가 빛의 시대,즉,르네상스라는 거짓의 역사로 탈바꿈되어,현재까지도 젊은이들이 세뇌당하는 중이다.


이렇게 지금 우리는,묵시록의 예언이 실현되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중이다.



또한 마태오복음에서 예수께서 직접 우리시대를 예언한 내용도 있다.


- 나는 율법(도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율법(도덕)을 완성하러 왔다.마음으로 간음한 자는 이미 간음한 자이다......로 규정하시며,간음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선언 하신다(마태오 5장~7장 내용)......요한복음에서도 강조하신다.너희는 예언자들이 보고싶어하던 세상을 이미 보고 있다(하늘나라가 이미 여기 와 있다)...이 예언자들 속에는,물론 유학의 성인군자들이 포함된다.가톨릭교리서에서 규정하는,이른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성서구절을 직접 읽어보자....!!!!!!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오 7장)




태오 리치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서,그 당시의 주류지배계급들의 사상인 불교와 유교를 연구한 이후,불교가 일종의 범신론이며 무신론적인 일원론사상임을 간파했다.그런 그가,도덕적인 삶에 충실한 유학을 선택한 이유다.이렇게 신비의 세계,접근이 불가능했던 유교의 동양을 서양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즉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문자란, 단순하게 인간들이 사유의 도구로 활용하는 범위를 넘어서는,하느님의 창작품임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사례다.모든 문명권을 초월한 능력,지적인 능력을 초월한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류(human being)는,자신들의 직관력인 양심에 의해서,이 세상에는 정의가 존재함을 안다.정의와 도덕이 인간이라면 반드시 따라야할 인간적 능력임을 스스로 안다.


이렇듯,예수가 말하는 율법이란,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덕적 양심, 인간됨의 범위를 측정하는 단위이기 때문이다.그 율법(도덕)은 문자를 통하여,각 사회(그리스도문명과 유교문명)의 교육자들이 자녀들에게 심어준 가치관의 뿌리다.이러한 이유로, 동양에서의 유교의 가치관과 서양에서의 카톨릭(인류보편교회,천주교)의 가치관이 일치한다.


이러한 도덕성을 지향하는 보편교회(천주교)의 교리가,개신교인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된다.


개신교인들은,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가치다.


이것은,완전하게 예수의 가르침과 반대의 주장이다.그래서 나는 이렇게 심각하게 천주교와 개신교는 별개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이들 개신교인들의 주장이 영국과 미국사회의 가치관으로,승자독식사회,신자유주의경제시스템을 만들어낸 지금 현재 짐승의 시대를 만든 주역들의 가치관이다.




땅 - the material world (물질계)

하늘 - the spiritual world (물질을 초월한 초자연 세계,영적인 세계)





창세가 2장 1절 -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창세가 2장 4절 - 하늘과 땅이 창조될 때 그 생성은 이러하였다. 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
 - This is the story*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at their creation. When the LORD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창세가 2장 5절 - 땅에는 아직 들의 덤불이 하나도 없고, 아직 들풀 한 포기도 돋아나지 않았다. 주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흙을 일굴 사람도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 there was no field shrub on earth and no grass of the field had sprouted, for the LORD God had sent n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더 많은 영어성서읽기와 해설은 아래 제니시스 단어 클릭 

* [1:12:3] This section, from the Priestly source, functions as an introduction, as ancient stories of the origin of the world (cosmogonies) often did. It introduces the primordial story (2:411:26), the stories of the ancestors (11:2750:26), and indeed the whole Pentateuch. The chapter highlights the goodness of creation and the divine desire that human beings share in that goodness. God brings an orderly universe out of primordial chaos merely by uttering a word. In the literary structure of six days, the creation events in the first three days are related to those in the second three.

1.light (day)/darkness (night)=4.sun/moon
2.arrangement of water=5.fish + birds from waters
3.a) dry land=6.a) animals
b) vegetationb) human beings: male/female

The seventh day, on which God rests, the climax of the account, falls outside the six-day structure.



[2:4This is the story: the distinctive Priestly formula introduces older traditions, belonging to the tradition called Yahwist, and gives them a new setting. In the first part of Genesis, the formula “this is the story” (or a similar phrase) occurs five times (2:45:16:910:111:10), which corresponds to the five occurrences of the formula in the second part of the book 


(11:2725:121936:1[9]; 37:2). Some interpret the formula here as retrospective (“Such is the story”), referring back to chap. 1, but all its other occurrences introduce rather than summarize. It is introductory here; the Priestly source would hardly use the formula to introduce its own material in chap. 1.


The cosmogony that begins in v. 4 is concerned with the nature of human beings, narrating the story of the essential institutions and limits of the human race through their first ancestors. This cosmogony, like 1:13 (see note there), uses the “when…then” construction common in ancient cosmogonies. The account is generally attributed to the Yahwist, who prefers the divine name “Yhwh” (here rendered LORD) for God. God in this story is called “the LORD God” (except in 3:15); “LORD” is to be expected in a Yahwist account but the additional word “God” is puzzling.


* [2:5Man: the Hebrew word ’adam is a generic term meaning “human being.” In chaps. 23, however, the archetypal human being is understood to be male (Adam), so the word ’adam is translated “man” here.


* [2:6Stream: the water wells up from the vast flood below the earth. The account seems to presuppose that only the garden of God was irrigated at this point. From this one source of all the fertilizing water on the earth, water will be channeled through the garden of God over the entire earth. It is the source of the four rivers mentioned in vv.1014. Later, with rain and cultivation, the fertility of the garden of God will appear in all parts of the world.




[성서의 세계 - 구약] 창세기 1-11장 : 오늘도 반복되는 창조 (다마수스 빈첸)
 
 
창세기는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 가운데서 첫 번째로 등장한다. 모세 오경이라 불리는 이 책들은 유다인들에게 널리 읽히던 율법서로서 신약성서로 치면 4복음서에 해당된다. 이 다섯 권의 책은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70인역]할 때 역자들이 각 책의 중심 주제를 선택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시작, 기원을 나타낸 창세기, 탈출을 뜻하는 출애굽기, 사제 부족인 레위 지파의 법을 기록한 레위기, 군대의 수효 등을 밝힌 민수기, 율법을 요약한 신명기로 불리어졌다.
 
창세기 1-11장은 나머지 장(12-50장)과 완전히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태고사”라 불리는, 창조 때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는 인류의 탄생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저자는 이 사실들을 연대순으로 구분하지 않고 “세대”순으로 표현하고 있다. 창세기 전체는 열 개의 “혈통”들(2,4; 5,l;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7,2)로 나뉘어 있고, 이 태고사에는 다섯 혈통이 들어있다. 즉 하늘과 땅의 창조(2,4-4,26), 아담의 혈통(5,1-6,8), 노아의 혈통(6,9-9,29), 노아의 아들들의 혈통(10,1-11,9), 셈의 혈통(11,10-26)이 그것이다.
 
여기서 “혈통”이라는 단어는 창세기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 말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완전한 생명이라는 ‘씨앗’을 전해주는 것 말하자면 자손이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무의 뿌리와 같다. 아담은 한 가계의 시조일 뿐 아니라 인류라는 나무 전체를 자라게 하는 뿌리인 셈이다. 그의 생애는 모든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의 잘못은 인류에게 “원죄”가 되고 있는 것이다. 라삐들은 “조상들의 삶이 후손들의 역사를 예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삶이 유다인들의 모든 역사를 앞서 표현하고 있으며, 후에 그리스도의 삶에서 모방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조상에 있어 그 시조는 오직 창조 활동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었으며, 하느님은 그 혈통이 계속되도록 확고한 기초를 놓으셨다. 창조가 혈통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지질학이나 고고학으로서가 아니라 구약성서의 다른 부분에도 드러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될 선택받은 백성의 역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의 역사는 학자들이 얘기하는 개념과 분명히 다르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창세기 1장을 보자. 만물은 태초(1,1)에 하느님의 말씀 즉 아들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골로 1,16-17). 그러므로 창조는 나중에 구원 활동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무한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골로 1,20).
 
역사의 마지막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묵시 13,8)으로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은 성서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그 영원한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장엄한 문장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는 말은 세상을 뒤엎거나 부족한 상태로 방치해 두려는 모든 시도들을 거부한다. 그것은 자기 완성이라는 맹목적인 충동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하느님 사랑에 기대게 한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늘”(히브리어로 위에 있는 것 - 영적 세계)뿐 아니라 “땅”(아래에 있는 것 - 물질 세계)도 하느님 사랑이 창조했다는 사실이다.
 
땅은 “모양도 없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아”(1,2)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있었다. “하느님의 기운”은 하늘에만 머물지 않고 물을 덮고 있는 어둠 속에서 어미새처럼 휘돌고 있다. 어둠에서 빛을 부를 때까지 휘도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인내 - 회개의 기회를 주는 - 를 보여주는 것이다(1,3). 어둠으로부터 떠오르는 모든 새 날은, “빛이 생겨라” 하실 때 나타난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을 반복하는 것이다. 역시 하느님 사랑에 장소를 제공하는 어둠은 낮의 빛을 계속 다시 태어나도록 해주는 “어머니”를 뜻하는 “밤”이라 불렸다(1,5).
 
하느님의 사랑이 이제 물을 변화시켜 위와 아래로 가르고(1,6-7), 아래에 있는 물을 모음으로써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한다(1,9).
 
사랑은 분리를 계속한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1,27). 여자는 두 번째이지만, 남자가 그녀와 어울려 결합하기 위하여 어버이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2,24). 여기서 아들이 그의 신부인 교회를 위하여 죽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을 포기한다는 것을 예시하고 있다. 그 여자는 뱀의 꾐(3,4-7)에 빠진 첫 인간이 되는 한편 구원의 약속을 받는 첫 사람(3,15)도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담의 아들인 카인과 아벨(4장)을 통해 그 높고 낮음의 분리를 계속한다. 아벨은 히브리 표현으로 “약한 자”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약한 자 안에서 그 참모습을 드러낸다. 카인은 아우를 죽여 망명자가 되고, 그의 아들들은 “재치있는 사람들”로서 세상에 문명을 가져온다(4,17. 20-22). 그러면서 치우침 없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들 사이에 육욕과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카인의 후손 라멕은 두 아내를 취한 첫 번째 사람으로서 그의 손에 복수의 칼이 들려 있음을 뽐내었다(4,23-24).
 
“장사들, 하느님의 아들들”(6,1-4)이라 불리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은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담의 그루터기에서 올라온 셋에게서 하느님의 은총은 새 가지가 시작된다(4,23). 이 후손들은 인간 문명의 진보에는 별 기여를 하지 못한다. 첫 후손은 에노스이며 약골이라는 의미이다(5,6). 이 이름은 약하디 약한 인간의 무력함을 가리킨다. “에노스(공동번역에는 ‘사람’)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의 아들(공동번역에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주십니까?”(시편 8,4) 그는 야훼의 이름을 처음으로 부르며 예배한 사람이다. 셋의 후손 중 가장 두드러진 이는 아담의 7대 후손인 에녹이다. 그의 이름은 새벽에 신비스럽게 떠오르는 새 날을 가리킨다. 그는 “하느님과 함께”(5,22) 살았으며, “후대를 위하여 회개의 모범이 되었다”(집회 44,16).
 
셋의 가계의 맨 마지막은 노아이다. 그 당시 “거인들” 중에서 노아만은 유일하게 “야훼의 마음에 들었다”(6,4.8). 이 표현은 예수가 세례받을 때 울려퍼진 소리와 같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이 표현은 노아의 사건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음을 가리킨다. 그건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분명히 홍수와 관련된다. 우리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홍수가 최초의 무질서(혼돈)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깨달아야 한다. 위에 있는 물과 아래에 있는 물이 마른 땅을 다시 덮어버리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홍해가 갈라지고 모아지는 것도 바로 창조와 홍수의 재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기원전 8세기의 아시리아의 침공도 또 하나의 홍수이다(이사 8,7).
 
하지만 홍수(혼돈)가 결코 이기지는 못한다. 노아가 살아 남고, 모세가 홍해를 가르며, 아시리아의 침공과 바빌론 유배 때도 “남은 자들”이 약속된 땅을 찾게 된다. 구원 역사에서 혼돈이 유일하게 승리한 것처럼 보인 때가 있기는 하다.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구세주가 외치던 순간이 있었지만 혼돈이 결코 승리하지는 못했다. 창조의 첫 날 어둠에서 불러낸 빛처럼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서 세례와 견진으로 사실이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11장은 우리에게 하나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의 행적 즉 창조는 첫 번째 구원 행위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동성 편역)[경향잡지, 198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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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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