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페소서 2장,...여러분도 전에는 잘못과 죄를 저질러 죽었던 사람입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은 한때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곧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 안에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중략)....20절 부터 -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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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에서 -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13절....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17절부터.....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정신이 어두워져 있고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감각이 없어진 그들은 자신을 방탕에 내맡겨 온갖 더러운 일을 탐욕스럽게 해 댑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벗어 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 

 

(중략)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제4장 (거짓 교사들에 관한 경고 ) -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이들은 사람을 속이는 영들과 마귀들의 가르침에 정신이 팔려 믿음을 저버릴 것입니다. 양심이 마비된 거짓말쟁이들의 위선 때문입니다.

 

 


티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서간 제3장  -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마지막 때에 힘든 시기가 닥쳐올 것입니다.사람들은 자신과 돈만 사랑하고 허풍을 떨고 오만하며, 남을 중상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하느님을 무시하며,  비정하고 매정하며, 남을 험담하고 절제할 줄 모르며, 난폭하고 선을 미워하고 배신하며, 무모하고 교만하며, 하느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신심이 있는 체하여도 신심의 힘은 부정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멀리하십시오. (중략)

 

12절 -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들과 협잡꾼들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면서, 점점 더 사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제4장1절부터 게속 이어짐,....   


 - 나는 하느님 앞에서, 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에페소서 5장 5절부터 - 이것을 꼭 알아 두십시오. 불륜을 저지르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에서 받을 몫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누구의 허황한 말에도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러한 것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립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과 상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에페소서 5장 10절 부터 -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 사실 그들이 은밀히 저지르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그러므로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묵시록21장 8절 -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

 

 


 

요한바오로2세의 글,화해와 참회(1984년)에서 일부발췌..

 

 

 

 

개인적 죄와 사회적 죄

 

 

16. 죄란 한 인간이 개인으로서 자유로이 저지르는 행동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한 집단이나 공동체의 행위가 아니고 언제나 개인적 행위입니다. 다만 이 개인이 여러 가지 외부 환경들로부터 영향과 충동 또 제약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는 또 자기가 개인적으로 처한 환경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성향과 결점 또는 습관에 예속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크게든 작게든 간에 그런 외적 및 내적 요인들이 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제한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롭다고 하는 것이 신앙의 진리이며 우리의 체험과 이성도 확인하는 바입니다.

 

 

개인의 죄에 대한 책임을 구조라든지 조직 또는 다른 사람 등, 자기 외부의 어떤 대상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이 기본적 진리가 부인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같이 거부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는ㅡ부정적이고 파멸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ㅡ그가 저지르는 죄에 대한 책임을 통해서도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 있어서 덕행에 따르는 공로와 죄에 따르는 책임보다 더 타인에게 전가시킬 수없이 끝까지 스스로 떠맡아야 하는 것도 없습니다.

 

 

 

개인적 행위로서의 죄 때문에 제일 먼저 가장 큰 손해를 입는 사람은 죄인 자신입니다.

 

 

 

죄는 우선 인간 생명의 근거인 하느님과 맺은 그의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또 그의 의지를 약하게 하고 지성을 둔화시킴으로써 그의 정신생활에 중대한 혼란을 야기시킵니다.이제 우리는 시노드의 준비 단계와 본회의 진행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주 언급한 사회적 죄란 실제로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이 표현과 그 저변에 깔린 개념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람들 사이의 연대관계는 신비스럽고 쉽게 잡혀지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사회적 죄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개인적인 죄가 어떤 식으로든지 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인정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종교적으로는 옛날부터 모든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의미심장하고 놀라운 관념이 발전했는데, 사회적 죄라는 관념은 이 신비를 뒤집어놓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진리로 해서, “스스로를 자기보다 더 높이 끌어올리는 모든 영혼은 실제로 세계를 들어 올리는 셈입니다.”72)고 하는 말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승의 법칙(성인의통공)에는 불행히도 하강의 법칙(악인의통공)이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통교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신보다 밑으로 끌어내리는 영혼은 자신과 함께 교회, 나아가서는 어떤 의미로 세계 전체를 끌어내리는 셈이라는 말이 타당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가장 내밀하고 비밀스런 죄, 철저하게 개인적인 죄라 해도, 엄격히 말해서 그것을 범하는 사람 하나에게만 관계되는 죄란 사실상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파괴력의 양이나 그것이 미치는 해악의 정도에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으나, 모든 죄는 교회 공동체 전체와 전 인류 가족에 반드시 영향을 끼치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이 지니는 이 첫째 의미에 따르면 모든 죄를 가리켜 사회적 죄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죄들은 그 소재 자체가 이웃, 더 복음적 언어를 써서 표현하자면 자기의 형제에 대해서 직접적인 공격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웃에 대해 저지르는 잘못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해서 하느님에 대한 잘못으로도 됩니다. 이런 죄들을 가리켜 흔히 사회적 죄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이 말이 갖는 둘째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로 사회적 죄는 이웃 사랑을 위반하는 죄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법에 다라 “첫째 계명과 같은”78) 둘째 계명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웃 사랑의 계명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띱니다.

 

 

 

같은 모양으로, 개인이 공동체에 대해서 저지르는 것이거나 반대로 공동체가 개인에 대해 저지르는 것이거나 간에, 인간관계에서 정의 문제와 관련하여 저질러지는 모든 죄에는 사회적이라는 말이 해당됩니다. 또 사람의 생존권으로부터 시작해서 태아의 생명을 거쳐 사람의 육체적 건강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죄는 모두 사회적 죄입니다. 이웃의 존엄성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죄도 사회적 죄이며, 공동선과 시민들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망라하여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각종 요구들을 짓밟는 죄도 사회적 죄입니다. 사회적이라는 말은 행함이나 궐함으로 짓는 죄에 대해 두루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정치, 경제계나 노동조합의 지도자들로서 자기가 근면하고 현명하게 일하면 어떤 역사적 순간의 요청과 가능성에 따라 사회를 개선하고 변개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나태로 인해 이를 하지 않을 때에는 궐함에 의한 사회적 죄를 짓게 됩니다. 노동자들 측으로서도, 그들이 태업이나 비협조적 태도로 해서 소속 산업체들로 하여금 노동자 자신들과 그 가족, 나아가서 사회 전체의 복지 증진 사업에 실패하도록 한다면, 그 역시 궐함에 의한 죄를 범하는 일입니다.

 

 

사회적 죄라는 말의 셋째 의미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인간 공동 단체들 간의 관계에 적용됩니다. 세상에 정의가 지배하고, 개인, 단체, 백성들 사이에 자유와 평화가 늘 보장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본래 의도에 비추어볼 때, 이 여러 등급에 실재하는 관계들이 항상 거기에 부합하지 않음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계급투쟁은 누가 이를 주도하고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려 하든지 간에, 그것이 사회적 악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몇몇 나라들이 이루는 국가군 사이의 고질적 충돌 관계, 한 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나, 동일 국가 안의 여러 가지 다른 단체들 사이의 갈등은 모두 사회적 악입니다.

 

 

 

이 두 경우에서 우리는 이런 악에 대한 윤리적 책임과 그에 따른 죄과를 과연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과 실재들이 일반화하여 사회적 현상을 이룰 정도로 확대되면 이들은 더욱 익명성을 띠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원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정확히 가려내기가 대단히 어렵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사회적 죄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이 말은 유추적 의미만을 지니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적 죄라는 말을 유추적 의미로만 쓴다고 해서, 거기에 연루된 개인들의 책임성을 과소평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 말은 오히려 모든 사람의 양심에 호소하여 각자로 하여금 진지하고 용기 있게 자기의 책임을 떠맡게 함으로써, 이와 같이 비참한 조건과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을 개선해나가도록 하기 위해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회적 죄에 대하여 명료하고 분명한 언어로 이야기했는데, 이에 대한 고찰을 마치기 전에, 우리는 이 말이 오늘날 일부에서 매우 흔히 사용되면서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정당하지 못한 의미로 오용되고 있음을 지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74) 이 용례에 따르면, 사회적 죄와 개인적 죄를 대립시켜서 바라보고, 그중에서도 사회적 잘못과 책임만을 일방적으로 인정하여 개인적 죄는 의식 무의식중에 아주 싱겁게 만들거나 거의 폐기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비그리스도교 이데올로기나 제도들ㅡ과거에 공식적으로 그것을 지지하던 사람들 자신이 오늘에 와서는 이를 폐기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한데ㅡ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아차리기가 어렵지 않은 이 용례에 따르면, 잘못에 대한 책임이 개인의 윤리적 양심보다는 주변 상황, 조직, 사회, 구조, 제도 등 추상적이고 익명성을 띤 전체에 전가된다는 점에서, 사실상 모든 죄가 사회적 죄입니다.

 

 

교회가 죄의 상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크고 작은 규모의 사회적 집단이나 온 나라 또는 여러 나라들의 군집 전체가 놓인 상황이나 전체적 행동 양식을 사회적 죄라는 말로 단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교회는 그런 사회적 죄의 경우들이 모두 많은 개인적 죄가 쌓이고 응집된 결과임을 알고 이를 공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상 다음과 같은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저지르는 개인적 죄의 한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악을 조성하고 유지시키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죄입니다. 또 어떤 종류의 사회악을 피하거나 근절시키며 적어도 줄여나갈 수 있는 자리에 앉은 이들의 나태, 비겁, 침묵에 의한 방조, 비밀 공모, 무관심 등으로 해서, 이를 그대로 방치할 때, 그것은 그 개인의 잘못입니다. 또 세상을 개선하는 일은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나서, 그걸 구실로 자기의 작은 세계에 안주하는 인간들, 제법 고상하기까지 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들을 늘어놓으면서 의당한 노력이나 희생을 거부하는 인간들도 모두 개인적 잘못입니다. 또 세상을 개선하는 일은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나서, 그걸 구실로 자기의 작은 세계에 안주하는 인간들, 제법 고상하기까지 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들을 늘어놓으면서 의당한 노력이나 희생을 거부하는 인간들도 모두 개인적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참다운 책임성은 인간 각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상황이라는 것이ㅡ제도, 구조, 사회 자체도 마찬가지인데ㅡ그 자체로서 윤리적 행위로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이 그 자체로서 선하거나 악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모든 죄의 상황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죄 많은 인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법의 힘으로나ㅡ실제로는 불행히도 더 자주 일어나는 대로ㅡ힘의 법으로써 구조나 제도적 차원에서 어떤 상황이 바꿔진다 해도, 그 상황에 대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그런 외적 변화 자체는 불완전하고 오래가지 못하며, 궁극적으로는ㅡ더욱 비참한 결과를 산출한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나ㅡ어떤 의미나 효과도 내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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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서론: 본 문헌의 반포 및 의의


  분쇄된 세계
  화해를 향한 갈망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견해

 

제1부 교회의 책무이며 사명인 회개와 화해


  제1장 화해에 관한 비유
    잃었던 형제로부터
    집에 남아 있던 형제에게로
  제2장 화해의 원천에서
    화해자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화해를 이룩하는 교회
    화해에 이른 교회
  제3장 하느님의 주도권과 교회의 봉사 직무
    화해는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화해의 큰 성사인 교회
    화해의 다른 수단들

 

제2부 죄보다 더 큰 사랑


    인간의 비극


  제1장 죄의 신비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
    형제들 간의 분열
    개인적 죄와 사회적 죄
    죽을죄와 소죄
    죄에 대한 감각의 상실
  제2장 “우리 종교의 신비”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인의 노력
    화해를 이룩하는 삶을 향하여

 

제3부 참회와 화해를 위한 사목적 직무
    참회와 화해를 증진시키는 일
 

 제1장 참회와 화해의 증진, 그 수단과 방법
    대 화
    교리 교육
    성사들


  제2장 참회와 화해의 성사


    “너희가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
    용서의 성사
    몇 가지 기본적 신념
    고해성사의 거행 양식들
    공동 사죄를 하는 성사의 거행
    몇 가지 어려운 문제들

 

결론적으로 제시하는 희망의 표현

 

 

서 론(본 문헌의 반포 동기 및 의의)

 

1. 화해와 참회(RECONCILIATIO ET PAENITENTIA)를 우리 시대의 인간들에게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설교의 첫머리에서 선언하신 말씀을 두고, 이를 현대인의 언어로 바꾸어 그 참 의미를 다시 찾아내자는 뜻에서입니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1) 여기서 그분은 사랑의 기쁜 소식,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입적된 몸이고 따라서 인간들끼리는 서로 형제가 됨을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왜 새삼스럽게 이 문제를 다시 꺼내고,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습니까?현대인과 현대 세계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고,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며,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신비를 밝혀내기 위해, 또 그들 안에 숨겨져 있는 선과 악의 인자들을 식별해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각도에서 연구해왔습니다. 역사가, 사회학자, 철학자, 신학자, 심리학자, 인본주의자, 시인, 신비가 등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사목자들은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희망에 찬 눈길로 이들을 관찰해 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요한 문헌인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은 전편에 걸쳐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광범위하면서도 심도있게 작성된 그 서론 부분은 가히 모범적인 경우라 하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역사적이고도 예언적인 사건이었던 그 공의회 동안이나 그 후속 시기에 교황직을 수행한 본인의 존경하올 선임자들께서 지혜와 사랑으로 반포하신 몇몇 문헌들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되었습니다.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마찬가지로 사목자들도 현대의 세계와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불행한 특성 중 하나로서 여러 가지 깊고도 뼈아픈 분열상을 지적합니다.

 


분쇄된 세계

 

 

2. 이 분열상은 먼저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 사이에서 나타나고, 나아가 더 큰 규모의 단체 사이에서도 드러납니다. 국가와 국가가 맞서고, 몇몇 국가들이 합세하여 다른 국가군을 상대로 패권 쟁탈을 위해 무모한 전쟁을 벌입니다. 이러한 분열의 근원을 추적해볼 때, 우리는 거기서 흔히 대화로써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심한 충돌과 반목으로 치닫게 될 뿐인 알력이 깔려있음을 발견합니다.

 

무엇이 이런 분열을 초래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면밀히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원인으로서 대단히 다양한 요인들을 찾아냅니다. 단체사이나 사회적 계층 사이 또는 국가 간에 점점 더 확대되는 불균형으로부터 아직도 엄연히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상의 대립 관계에 이르기까지, 민족들 간의 차별 대우로부터 사회적 종교적 동기에 의한 차별 대우에 이르기까지, 그 요인들은 실로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그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훤히 드러나는 몇 가지 현상들은 이런 분열로부터 초래된 당연한 귀결로서, 그 분열상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우리 시대의 슬픈 사회적 현상들 중에서 우리는 특히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열거할 수 있겠습니다.

 

 

ㅡ인간의 기본권 침해,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에 대한 권리와 인간 존엄성에 합당하게 살 권리를 침해하는 사례.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런 권리들에 대해 적어도 말로는 인류가 전에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화려한 언사를 남발하는 가운데에서 이 분야의 권리 침해 사건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ㅡ사람이 자기의 신앙을 갖고 고백하며 실천할 수 있는 자유라고 하는, 가장 심한 위협의 대상이 되어있는 자유를 포함해서, 개인과 단체가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에 대해서 이를 암암리에 공격하고 압력을 가하는 사례.

 

ㅡ민족, 문화, 종교 등의 이유로 저질러지는 여러 가지 형태의 차별 대우.

 

ㅡ폭력과 테러.

 

ㅡ고문과 부당하고 불법적인 억압 수단의 사용.

 

ㅡ재래식 무기 및 원자 무기의 축적, 사회 및 경제적 압박 하에서 사는 백성들의 빈곤을 경감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었을 돈을 군사적 목적에 써가며 벌이는 무기 경쟁.

 

ㅡ세계의 자원과 문명 자산의 불공평한 분배 문제, 특히 이것이 어떤 형태의 사회조직으로 인해서 부자와 가난한 이들의 인간 조건 사이에 있는 격차가 점점 더 확대되는 사태.2) 이런 분열이 내포하고 있는 엄청난 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그 밑바탕에서부터 분쇄된 세계3)로 만들어 버립니다.

 

 

더욱이 교회는ㅡ자기를 세상과 동일시하거나 그 세상에 속하지는 않으면서도ㅡ세상 안에 머물면서 세상과 대화의 관계4)를 유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사회를 갈라놓는 분열상이 교회 자체의 구조 안에서까지 영향을 미치고, 그런 표지가 여기저기에 나타난다고 해서 놀라울 것은 없습니다. 과거 수세기 동안 교회를 괴롭혀온 그리스도교 교파 간의 분열에 더하여, 오늘의 교회는 간헐적으로 그 자체의 내부로부터 분열의 움직임을 체험합니다. 이런 분열은 교리나 사목 분야에 있어서의5) 상이한 견해나 선택상의 차이로부터 연유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분열들이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이런 분열이 아무리 혼란스러운 것이라 해도, 주의 깊게 관찰하면 그 원인을 추적해낼 수는 있습니다. 그 원인은 인간이 자기의 가장 깊은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상처에서 찾아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이를 죄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조상에게서 물려받아 태어나면서 이미 지니게 되는 원죄에서부터 우리가 스스로 자유를 남용함으로써 범하게 되는 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많은 죄를 안고 있습니다.

 


화해를 향한 갈망

 

 

3. 그러나 이 같은 연구와 탐색을 담당한 이들이 충분한 식별력을 지니고 있다면, 이런 분열상의 와중에서도 선의의 인간들과 참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 이 분열들을 교정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모든 수준에서 본래적인 일치를 되살리기 위한 열망을 반드시 발견해냅니다. 이런 열망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비록 이들이 화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도, 사실상 화해를 위한 원의를 불러일으킵니다.

 

 

어떤 이들은 관념적으로는 화해가 사회를 참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열쇠임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이 대단히 끈질긴 노력을 들이면 실현될 수 있다고 보고, 따라서 그것은 진지한 연구와 행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진지하고 견실한 화해에의 열망이 현대의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추진력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평화를 향한 현대인의 간절한 염원을 반영합니다. 역설적인 사실이지만 이런 추세는 분열의 요인 못지않게 강력합니다.

 

 

실상 화해가 분열 자체보다 얕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화해에의 열망과 화해 자체가 성숙되고 실제적인 효력을 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일체 다른 상처들의 뿌리인 원초적 상처 즉 죄에까지 미쳐서 그것을 치유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견해

 

 

4.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그들 생활의 기본적인 측면에 관련하여 그들을 구원할 목적으로 설치된 모든 기관이나 조직체들은, 화해의 문제를 면밀하게 연구함으로써 그 뜻과 의의를 충분히 파악하고, 그에 따라 필요한 실제적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는 이런 연구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는 어머니로서의 자상한 태도와 스승으로서의 이해심을 가지고, 사회 안에 깔려있는 분열의 표지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뚜렷하고 의미 있는 화해추구의 표지도 정확하게 간파해내야 합니다. 교회는 스스로 화해가 갖는 깊은 종교적 의미와 그 범위를 올바로 알릴 수 있는 능력과 사명을 부여받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런 식으로 일치와 평화 문제에 관련된 기본 개념들을 분명히 하는 일에 이미 좋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본인의 선임자들께서는 화해에 대해서 끊임없이 설교하셨고, 전 인류 공동체와 특히 상처받고 분열된 부분과 분야의 사람들에게6) 화해를 촉구하셨습니다. 본인 역시ㅡ굳게 믿거니와ㅡ위로부터의 영감과 인류의 호소에 순응함으로써 느끼게 된 내적 충동에 따라, 화해라는 주제를 강조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본인은 또 이를 위해서, 다 같이 장엄하면서도 큰 노력이 따르는 두 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첫째는 제6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이하 “시노드”라 함)의 소집이고,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1950주년 기념 특별 성년의 중심 과제를 화해로 결정한 것입니다.7) 시노드의 주제를 선정함에 있어서, 본인은 본인의 형제 주교들 대다수로부터 제안해온 바가 본인 자신의 의견과 전적으로 일치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참회와 깊은 관계 하에 있는 화해라는 뜻 깊은 주제를8)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참회라는 말과 그 내용은 대단히 복잡합니다. 참회를 공관 복음에 나오는 회개(metanoia)와 관련지어 생각하면, 그 말은 하느님 말씀에 감복된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9) 내심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어떤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편에서 볼 때에, 참회는 마음을 고치는 일과 함께 외적인 생활까지도 바꾸는 일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로 참회는 그것이 진지한 것임을 보여줄 수 있는 외적 행위로써10) 완성됩니다. 그런 뜻에서 볼 때, 좀 더 나은 것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는 인간의 경우, 그의 삶 전체가 참회의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참회는 실질적인 행위와 그에 따른 결과로 나타날 때에만 참되고 효과적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참회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학적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금욕적 수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참회란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버텨나갈 목적으로 수행하는11)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노력을 모두 뜻합니다. 그것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기 위한12) 노력이고, 자신안의 육적인 것을 극복함으로써 영적인 것13)이 기선을 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한 노력이며, 지상의 것들을 벗어나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의 것들14)에게로 오르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참회는 마음에서 행위로 건너가고, 거기서 다시 그리스도 신자의 전 삶에로 건너가는 회전(회개, 회두)입니다.

 

 

 

이 여러 가지 의미 하나하나에서 참회는 화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과의 화해, 자신과의 화해, 나아가 다른 이들과의 화해가 모두 근본적인 분열인 죄를 극복하는 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참회의 행위를 통해 한 사람의 삶에서 구체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데에까지 이르는 내적 변화 또는 회개로써만 이루어집니다.

 

 

이 주제를 몇 가지 기본 측면들과 함께 미리 제시하기 위해 마련했던 시노드의 기본 문서(Lineamenta)를 중심으로 하여, 전 세계에 걸쳐 모든 교회 공동체들은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인 이 회개와 화해라는 문제를 두고 거의 2년 동안 반성하고 연구했습니다. 사람들은 또한 이 기본 문서를 중심으로 반성해 나가는 가운데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생활과 사도직 수행을 위해서도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시노드에 임박해서는 이에 직접 대비하기 위한 의안(Instrumentum Laboris)을 작성하여 요로를 통해 주교들과 그들의 협조자들에게 송달했는데, 이 문헌에서는 우리의 문제가 더 깊이 다루어졌습니다. 그 후 시노드에 참석한 교부들은 본회의 참석이 허락된 모든 이들의 협조를 얻어, 한 달 동안 이 주제와 여러 가지 다른 연관 문제들을 두고 진지하게 숙고했습니다. 이때, 수많은 토론, 공동 연구,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온갖 형태의 작업 등을 거쳐 광범위하고도 중요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주요 내용을 최종 건의안에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노드는 화해를 위해 오늘날 사람들이 실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활동들이(그중 어떤 것들은 그 일상적인 성격 때문에 주의를 끌지도 못한 채 진행되지만), 각 경우에 따라 그 효과가 천차만별하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긴장을 해소하고 갈등을 극복하며 크고 작은 분열상을 치유하여 일치를 이루게 해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시노드의 주 관심은 이 여러 가지 형태로 분쇄된 행위들 저변에 숨어있는 속 깊은 뿌리를 찾아내는데 불과 합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 안에 성취되는 “원천”으로부터의 화해에 그 주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수준에서 요청되는 화해이건 간에, 이 문제에 관해서 교회가 받은 은사(카리스카)와 그 특징적 성격은, 교회가 항상 이 원천적 화해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교회는 그 본질적 사명에 비추어 죄라는 원초적 상처에까지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는데, 이런 근원적 치료를 통해서만, 말하자면 원초적 상처에 상응한 원초적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원초적 화해야말로 일체의 참된 화해를 위한 첫걸음이며 원리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늘 생각해왔고 이번 시노드를 통해 제시하는 화해입니다.

 

 

성경은 이런 화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그 실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라고 촉구합니다.15) 그러나 한편, 성경은 이 화해가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인류에게 내리시는 선물이라고도 말합니다.16) 구원의 역사ㅡ인류 전체의 구원과, 어떤 시대에 살다간 사람이든지 간에 모든 인간 하나하나의 구원에 관한 역사ㅡ는 경탄할 만한 화해의 역사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당신 아들의 피와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고, 그렇게 화해에 이른 인간들로써 새로운 가족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화해가 필요하게 된 것은 먼저 죄로 인한 단절이 생기고, 그로부터 인간 내부와 그 주변에 갖가지 형태의 단절 현상들이 속출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화해가 완전하게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죄로부터의 해방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며, 이 죄가 그 가장 깊은 뿌리에서부터 근절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회개와 화해는 뗄 수 없을 만큼 속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을 분리시킨다든가, 그중 하나에 대해 말할 때 다른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노드는 동시에 전 인류 가족이 화해하고 각 개인이 마음으로부터 회개하며, 각기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노드는 각 개인의 내적 변화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백성들 사이의 일치가 실현도리 수 없음을 재확인하고 이를 선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각자가 인격체로서 먼저 회개하는 일이야말로 개인들 간의 조화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입니다.17) 교회가 화해의 복음을 선포하고 여러 가지 성사를 통해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할 때, 교회는 참으로 예언직을 수행하는 셈입니다. 교회가 부패된 인간의 내부 깊숙이 숨어있는 악을 몰아내고, 분열의 뿌리를 지적해내며, 사람들 사이의 긴장을 해소시키고, 갈등을 극복할 가능성에 대해 희망을 가지게 하며, 인간 사회의 모든 분야와 수준에 걸쳐 형제애와 합심 및 평화가 구현될 수 있게 함으로써, 이 예언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증오와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적 정황을 사랑의 문명으로 바꾸어나갑니다. 교회는 인간 각자에게 이 원천적 화해의 복음적이고 성사적인 원리를 제공하는 데, 일단 그런 화해가 정착되면 다른 일체의 화해적 행위나 태도들이 뒤따라 나타나게 되고, 사회적 수준에서까지도 그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본 교황 권고 주제도 회개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이런 화해입니다. 그리고 과거 3차에 걸친 시노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회의에 참석한 교부들 역시 회의의 결과를, 로마의 주교이며 교회의 보편적 목자요 주교단의 수장이며 시노드의 의장인 본인에게 제시했습니다. 본인은 본인에게 맡겨진 직무가 엄숙하게 요구하는 대로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시노드가 내놓은 엄청난 양의 업적들을 정리해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참회와 화해에 대한 교리적이고 사목적인 성격을 띠는 메시지를 보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제1부에서는, 교회가 자신에게 맡겨진 화해의 사명을 수행하고, 인간과 하느님, 인간과 그 형제, 인간과 전 창조계 사이를 새롭게 화해시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으로서의 마음의 회개를 이룩하는 일을 두고, 유념해야 할 점들을 제시하기로 하겠습니다. 제2부에서는, 여러 종류의 상처와 백성들 사이의 분열, 또 무엇보다도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분열을 초래하는 근본적인 죄에 대해서 고찰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완전한 화해를 성취하고, 그 결과로서 인간 상호간의 화해를 촉진하기 위해 교회가 활용할 수 있는 수단들에 대해서 언급하겠습니다.

 

 

본인이 교회의 자녀들과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이 문헌은 시노드의 요청에 의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ㅡ진리와 정의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거니와ㅡ 시노드 자체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문헌의 내용이 시노드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실상 시노드를 앞두고 멀리서 또는 가까이에서 준비했던 문서들, 의안, 본회의장에서 발표된 의견들, 분과 토의의 결론들, 특히 63개항에 달하는 최종 건의안 등, 시노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모든 형태와 연구와 고찰 결과가 본 권고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이 문헌은 시노드에 참석한 모든 교부들 중에는 신학, 영성, 전례 분야에서 풍부한 유산을 소유하고 있고, 특히 우리의 관심사인 화해의 문제에 관해서도 좋은 유산을 지니고 있는 동방 교회의 대표자들도 들어있었습니다. 또 시노드 사무국은 총회가 끝나자마자 두 차례의 중요한 회의를 통하여 그 총회의 절차와 전체적 흐름을 종합 평가하고, 특히 앞서 언급한 최종 건의안들 속에 깔려있는 기본 정신을 선명하게 부각시켰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무국은 본 문헌을 작성하기 위한 기본 방향을 설정했던 것입니다. 본인은 이 작업에 참여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며, 본인에게 맡겨진 사명에 따라, 시노드가 제시하는 교리 및 사목적 내용 중에서 역사상 경이롭고도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섭리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는 요인들을 추출하여 내놓는 바입니다.

 

 

참회와 회개 그리고 화해의 정신으로 지낸 성년의 기억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때, 이 문헌을 제시하게 됨은 시의적절하고 뜻 깊은 일입니다. 이 권고가 본인의 형제 주교들과 그들의 협조자들, 사제와 부제들, 남녀 수도자들,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각자의 신앙을 정화하고 풍부하게 하며 더욱 깊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또 이 권고가 세상에서 평화와 형제애, 희망과 기쁨을 촉진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가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신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묵상하며 매일의 삶에서 실천할 때, 거기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18)



제1부


교회의 책무이며 사명인 회개와 화해


 

 

 

제1장 화해에 관한 비유 5. 이 교황 권고를 시작함에 있어, 본인 마음에는 성 루카가 전하는 저 유명한 비유가 떠오릅니다. 그 비유가 지니는 온전히 종교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본인이 앞서 발표한 문헌19)에서 이미 설명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본인은 지금 탕자의 비유20)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잃었던 형제로부터…….“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이 젊은이에 관한 극적인 이야기를 예수께서는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이어서 그 젊은이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무절제하며 공허한 생활 가운데 자기의 전 재산을 탕진한 뒤, 고향을 떠나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살아야 하는 암울한 세월이 소개됩니다. 그에게 물질적인 고통보다 더욱 더한 괴로움을 주는 것은 위신을 잃고 굴욕과 수치 속에 던져진 채 살아가야 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차츰 자기의 옛집을 그리워하게 되고, 용기를 내어 돌아간다고 이야기하며, 아버지가 그를 따뜻하게 맞아들인다는 데까지 그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아버지는 줄곧 한 순간도 아들을 잊어본 적이 없으며 그에 대한 애정과 그를 존중하는 마음에 조금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항상 아들을 기다려왔고 그가 돌아오자마자 그를 얼싸안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다가 찾은” 그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큰 잔치를 베풀도록 했던 것입니다.

 

 

여기의 탕자는 인간을 뜻합니다. 사람 하나하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갈라서서 나름대로 독립생활을 영위해보고 싶은 유혹에 속아 넘어갑니다. 그런 다음 그는 처음에 그를 매혹시켰던 신기루의 허상으로 인해 쓴맛을 톡톡히 봅니다. 자기 혼자 나름대로의 세계를 건설해보려는 시도에서 오히려 이용만을 당하고, 그는 치욕을 뒤집어쓴 채 홀로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곤궁한 처지에 버려진 가운데에서도 그는 아버지께 되돌아가고 싶은 갈망을 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비유속의 아버지처럼 당신 자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항상 길 쪽을 바라보십니다. 마침내 그가 돌아오자 그를 껴안고 이 새로운 상봉을 기념하는 잔치를 베풀어 화해를 경축합니다.

 

 

이 비유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돌아온 아들을 그토록 큰 축제 속에 따뜻이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곧 용서하실 태세를 항상 갖추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거니와, 화해는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내리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집에 남았던 형제에게로 6. 그런데 이 비유에는 축제에 한몫 끼기를 거부하는 형도 등장합니다. 그는 방탕해서 싸돌아다닌 동생을 나무라고, 집에서 충실하게 아버지를 섬기느라 늘 절제 있게 살며 열심히 일해 온 자기에게는 친구들과 놀라고 잔치 한번 허락해주지 않던 아버지가, 방탕한 아들에게는 그토록 따뜻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못마땅하여 불만을 터뜨립니다. 이런 태도로 보아 그는 아버지의 선한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의 장점에 대해 지나치게 평가해서 자신감에 차 있으며 늘 시기와 오만한 마음에 잡혀 걸핏하면 화를 내고 신경질적인 이 형이 회개하여 자기 아버지와 형제와 더불어 진심으로 화해하지 않는 한, 그 잔치는 형제끼리 일치를 이루고 서로를 다시 찾아낸 기쁨의 축제가 되기에는 아직 미흡합니다.

 

 

인간ㅡ사람 하나하나ㅡ은 여기 나오는 형이기도 합니다. 이기심은 그를 시기에 차게 하고 마음을 굳게 하며 눈을 가려서 다른 사람들이나 하느님으로부터 그를 갈라 세웁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찬 친절과 자비는 오히려 그를 속상하게 하고 화나게 합니다. 그에게는 다시 찾은 동생의 행복이 쓴맛을 느끼게 할 뿐인 것입니다.21) 이런 점에서 볼 때,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그 사람 역시 회개할 필요가 있다 하겠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무엇보다도, 돌아오는 아들에게 완전한 화해의 선물을 허락하시는 아버지ㅡ하느님ㅡ의 말할 수 없이 큰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큰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형제들을 갈라놓은 이기심을 우리에게 보여줄 때, 그것은 인간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실상을 묘사해주고, 그런 우리가 화해를 위해서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해주기도 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모든 수준에서 아무 조건도 없이 완전한 화해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을 내심 깊이에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화해가 일차적이고 더욱 근원적인 화해, 즉 하느님으로부터의 결별 상태를 청산하고 무한히 자비로우신 그분과의 자녀적 효심을 회복시켜주는 이 화해가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마음으로부터 확신하는 이들입니다.

 

 

 회개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자기 아버지의 품속에 돌아가 용서받기를 갈망하는 탕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큰아들을 중심으로 이 비유를 해석하면,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분열된 인간 가족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로 화해되고 일치를 이룬 가족에 대한 열망과 꿈을 실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아버지의 자비를 재발견하고 오해를 쳐 이기며 형제자매들 간의 적개심을 극복함으로써만 실현되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변모가 얼마나 절실히 요청되는지 깨닫게 됩니다.교회는 죄를 씻어주는 자비에 대해서 말하는 이 뜻 깊은 비유를 두고 묵상함으로써 그것이 지니는 강한 호소력을 재발견하고, 주님을 본받아, 마음의 회개와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화해라고 하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있는 두 가지 화해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새삼 깨닫는 바입니다.

 

 



제2장 화해의 원천에서 화해자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7. 탕자의 비유로 미루어보건대, 화해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이에 관한 주도권은 그분이 잡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하느님의 이 주도권이 구속자이시며 화해자이시고 모든 형태의 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분이신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성 바오로께서도, 말씀이시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나자렛 예수의 사명을 서슴없이 그런 식으로 요약합니다.

 

우리도 성 바오로의 그리스도론에서 그 핵심을 이루는 구원 경륜상의 이 중심적 신비를 출발점으로 해서 이야기를 펴나갈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22) 실상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바오로는 영감을 받아 코린토 신자들에게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3) 하고 촉구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실현된 이 화해의 사명을 두고 복음사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흩어져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24)고 기술하심으로써 또 다른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하지만,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을 당신과 화해시켜주셨다고 기록함으로써,25) 그리스도의 업적을 보는 우리의 시야를 우주적 차원에까지 확대시킨 이는 역시 바오로입니다. 과연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진노하셨을 때에 그 화해자가 되었습니다.”26)고 옳게 말할 수 있습니다. 또 그분이 “우리의 평화”27)이시라면, 그분은 역시 우리의 화해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성사적으로 재현되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은 전례 안에서 정당하게도 “화해의 제사”28) 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사 봉헌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를 종용하신29) 점으로 보아, 여기서 하느님과의 화해와 형제들과의 화해를 동시에 의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이런 구절들과 기타 뜻 깊은 말씀들에 비추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명 전체를 두고 이를 화해의 성취자로서의 사명과 관련지어 생각해볼 만한 근거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와 인간의 화해를 이루어주는 원인으로서의 그리스도 파스카 신비에 대한 교회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지는 파스카 신비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은총에 의한 하느님과의 친교라는 인간의 이중적 화해를 실현시켜 줍니다.

 

 

여러 가지 형태의 분열상과, 백성들 사이에 화해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에서 봉착하게 되는 난관들과 분열의 슬픈 사태를 눈앞에 두고, 본인은 다함께 십자가의 신비를 바라볼 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이 십자가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간 인간의 비극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더할 수 없는 강도로 체험하셨던 가장 숭고한 사건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때 시편 작가의 말을 빌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30) 하고 외치셨고, 동시에 그 순간에 우리의 화해를 완성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골고타의 신비를 마음에 새겨, 분열과 화해가 지니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수직적” 차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이 수직적 차원이야말로 사람들 사이의 분열과 그에 따른 이간 상호간의 화해를 문제 삼는 “수평적” 차원보다 더욱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의 화해라는 것이, 죄의 세력을 쳐 이기시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다시 수립하시며 죄악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이게 된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31)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가 맺는 결과일 뿐이고 또 그런 것일 수밖에 없음을 믿는 바입니다.



화해를 이룩하는 교회 8. 그러나 성 레오 교황께서 그리스고의 수난에 관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화해시키기 위해 몸소 실천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는 그의 지나간 행업에 관한 역사를 통해서만 아는 것이 아니고, 지금 그분께서 일하시는 바를 우리가 실제로 체험함으로써도 알게 됩니다.”32) 우리는 그분께서 과거에 인간으로 오시어 이뤄놓으신 화해를, 당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하시고 구원의 표지와 수단으로 세워놓으신 당신의 교회 안에서 거행되는 여러 가지 거룩한 신비를 통해 지금도 실제적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하여금 당신의 화해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다고 말함으로써 이 사실을 표현하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33)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사자인 사도들의 손과 입을 빌려 당신께서 의도하시는 화해의 직무를 수행하시고,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동할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이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화해의 메시지는 전 신앙인 공동체, 교회의 모든 성원에게 맡겨진 것이기도 합니다. 화해를 증거하고 세상에서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사명이 교회 전체에 내려진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를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 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주는 표지요 도구인 성사”라고 규정하고,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 기술적 문화적 여러 가지 유대로 더욱 긴밀히 결합되어있으므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도 완전한 일치를 성취해야”34) 하는 일이 교회의 임무라고 선언합니다. 공의회는 이와 같이 교회가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의 화해를 성취시키기 위해 진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명에 비추어 풍부하고도 복합적인 교회의 사명을 요약하여 사람들 사이에 화해를 조성하는 임무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과 화해하고 다음으로 자기 자신, 이웃, 창조계 전체와 화해를 조성하는 일이 교회의 사명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본인이 다른 기회에 말한 바와 같이 계속적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입니다. “교회는 본질상 언제나 화해를 조성합니다.”35)

 

 

교회는 예루살렘 사도회의36)로부터 최근의 시노드와 구원 성년에 이르기까지 그 전 역사를 통하여 늘 그랬던 것처럼, 화해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한에서만 화해의 교회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선포하는 이 메시지의 특징은 교회로 볼 때 화해가 마음의 회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마음의 회개는 사람들이 상호 원만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교회가 이 4중의 화해에 이르기 위한 길과 수단을 인간에게 보여줄 수 있을 때, 그런 방식으로도 화해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하겠습니다. 그 길이란 마음의 회개와 죄에 대한 승리를 말하는데, 이때 죄는 이기심이나 불의, 남을 함부로 대하거나 착취하는 일, 물질적 재화에의 지나친 집착이나 절제 없는 쾌락의 추구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화해에 이르기 위한 수단들에는 사랑을 가지고 하느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 개인 및 공동체적 기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해의 참표지이며 도구인 각종 성사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지금까지 고해성사 또는 화해의 성사라 불러온 이 성사가 가장 대표적인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화해에 이른 교회 9. 본인의 존경하는 선임자이신 바오로 6세께서는 교회의 복음화 사업이 교회 스스로 복음화 되었음을 보여 주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정성으로 귀를 기울이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37) 스스로 먼저 그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본인 역시 제4차 시노드 총회의 결과를 하나의 문헌으로 정리하는 기회에, 교회가 교리 교육을 실시하면 할수록 스스로도 교리 교육을 받게 되는 셈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38)

 

 

본인이 지금 취급하고 있는 주제를 두고도 이 비슷한 논리가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아 본인은 다시 한 번 그런 식으로 말하겠습니다. 교회가 화해를 성취시키려면 먼저 자신부터 화해에 이른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표현 속에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화해를 외치고 제시하는 일이 더욱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끊임없이 주님께 회개하는 일에 진력하고, 화해의 정신과 그 실천을 통해 새로운 백성으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루는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처음에는 그것이 “작은 무리”에 불과했지만)을 점점 더 확실히 띠어가야 한다는 신념이 깔려있습니다.

 

 

 

만사에 구체적이고 생생한 증거를 통해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안에서 화해가 이루어 졌음을 예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람들이 그 마음에 평화를 얻고, 긴장을 완화하며, 분열을 극복하고, 선택의 자유에 맡겨진 문제를 놓고, 실제로 택하는 단계에서 상충된 견해가 발생할 때 형제끼리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상처를 치유해주는 등의 일에 모두가 나서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이나 삶에 관해 근본적인 중요성을 띠는 점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합니다. 예부터 전해오는 격언도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심스런 일에는 자유를, 필연적인 일에는 일치를, 그리고 모든 일에는 사랑을” 앞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재일치 활동을 전개하면서도 이 같은 준칙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완전히 화해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이 교파 상호간에 갈라져있고 또는 로마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가 있는 처지를 청산하고 다시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일치를 추구하는 데, 그것이 진정한 화해의 결과이며 그 표현이 되기 위해서는 분열의 원인이 되는 점들을 적당히 호도한다든가, 용이한 대신 피상적이고 견실하지 못한 타협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참된 일치는 각자의 진정한 회개와 상호 용서, 신학적 대화와 형제적 친교관계, 기도, 그리고 화해의 영이시기도 한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순응하는 태도 등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완전한 화해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신앙에 참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속되는 세속주의의 결과로서 교회와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거나, 실제로 교회를 배척하거나 박해하지는 않는다 해도 냉담한 무관심주의로 맞서 있는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구원의 대화”39)를 촉진시킴으로써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하는 자신의 의무를 느끼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 바오로의 말씀을 받아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말해주어야 할 의무를 느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40) 여하튼 교회는 진리를 벗어나거나 그에 반해서는 참된 화해나 일치가 불가능함을 잘 알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의 화해를 촉진시키려는 것입니다.

 

제3장 하느님의 주도권과 교회의 봉사 직무 10. 스스로 먼저 화해한 후 다른 사람들의 화해를 촉진시키기 위해 일해야 하는 교회는 자기가 받고 있는 이 화해의 선물과 사명의 근원에 하느님의 주도권이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스스로 사랑이시며41) 이 사랑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신42)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과 자비에 넘치는 손길이 먼저 미쳤기 때문에, 또 그때에만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창조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당신과의 친교와 동료 인간 상호간의 우정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화해는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인간이 악마의 충동43)이나 스스로의 교만에 휩쓸려, 본래 남을 사랑하고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주어진 자유를 남용하고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분께 순종하기를 거부할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계획을 취소하거나 바꾸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기는커녕 스스로 환상에 빠져 자신의 힘만 믿고 당신을 마치 경쟁 상대처럼 생각하여 대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기를 창조해주신 분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마는 경우까지도, 당신의 충실한 태도를 바꾸시지 않으십니다. 인간 편에서 이렇게 배신을 해도 하느님께서는 사랑에 충실하십니다.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하느님을 거부하는 데 따르는 결과의 심각성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사실이고, 그 비참한 결과의 일단을 우리가 인간의 내적 무질서와 남녀 관계, 형제 관계의 조화가 깨뜨려지는 사실44)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도 확실합니다. 인류의 분열상을 추적해 올라가면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아버지다운 사랑과 그분의 애정 어린 선물을 거부하는 데서부터 문제가 싹트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느님”45)께서 비유 속의 아버지처럼 어떤 자녀에게나 당신의 마음을 닫지 않으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항상 자녀들을 기다리시고 지켜보시며, 친교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이 묶여있게 된 소외와 분열의 현장에 까지 몸소 가셔서 그들을 만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당신 식탁에 불러 모으시고 용서와 화해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먼저 손써주시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를 통해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방식으로 드러났고, 그것은 다시 교회의 봉사 직무를 통해 온 세상에 까지 퍼져나가야 합니다.우리의 신앙에 의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육체가 되어 세상에 사시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역사 안에 들어오시어 당신 안에서 역사 전체를 수렴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46) 그분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셨고, 사랑의 “새 계명”47)을 주셨으며, 사랑의 길이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범세계적 형제 관계를 수립하려는 노력이 헛된 꿈이 아님을48) 믿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통해 악과 죄의 세력을 쳐 이기셨고, 사랑의 순종으로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줌으로써 만민의 “화해”가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서 인간을 당신과 화해 시키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갈릴래아와 팔레스티나의 온 마을과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외치시던 그 화해49)를 계속 선포하고,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회개하여 복음을 믿도록 권하는 일을 끊임없이 추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언하고 우리가 이미 상기한 바 있는 성 바오로의 호소를 그대로 받아 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이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켜 호소하시는 말씀입니다.”50)

 

 

이 호소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화해의 길목에 들어서며 성 바오로의 다른 말씀 속에 깃들어있는 진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51)

 

 

이 말씀이 직접 의도한 것은 물론 구약 선민으로서 이스라엘과 신약에 와서 이 계약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모든 백성들 사이의 종교적 분단 상태를 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하느님께서 의도하셨고, 사람이 된 말씀이신 당신 아들의 희생을 통해 실현시켜주신 새로운 영적 보편성이 강조되어있습니다. 과연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차별이나 제약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 개인이나 백성들은 예외 없이 하느님께서 원하신 이 화해의 열매를 누리도록 모두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화해의 큰 성사인 교회 11. 교회는 이 화해를 선포하고, 또 세상에서 화해의 성사가 되기 위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화해의 성사라 함은 그것이 화해를 나타내는 표지이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를 실현시켜주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화해를 실현하기 위해 동원하는 방법들은 다양하고 효력의 면에서도 서로 다르지만, 그 모두가 모여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내려주시고자 하시는 바를 사람들이 얻을 수 있게 해줍니다.교회가 성사로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역사(役事)를 증거하고 또 이를 재현하는 화해된 공동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써 이루어집니다.교회는 또한 성경을 관리하고 해석하는 그 임무를 통해서도 하나의 성사가 되는데, 성경은 각 세대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에 찬 계획을 이야기해주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보편적인 화해를 이루는 길을 보여 주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성사가 되는 것은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교회를 이루는”52) 칠성사를 통해서입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를 기념하고 이를 다시 실현한다는 점에서 모든 성사들은 교회 생명의 원천이고, 사람들이 교회의 손을 통해 하느님께 회개하며 백성들이 서로 화해하는 데 있어서도 성사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화해의 다른 수단들 12. 화해의 사명은 전교회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히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과 동정 마리아를 항상 뵈오며 공경하는 천사 및 성인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영광에 온전히 참여하고 있는 그 교회에 이 화해의 사명은 더욱 뚜렷한 모습으로 해당됩니다. 하늘의 교회, 지상의 교회, 연옥의 교회는 신비스럽게 협력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도와 세상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일에 참여합니다.

이 구원 활동에서 동원하는 제일 중요한 수단은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어머니인 복되신 동정녀53)와 지상 여행을 마치고 하느님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성인들께서는, 아직 지상을 순례하고 있는 자기의 형제들을 위해 중개자 역할을 해 주심으로써 이들을 후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지상의 인간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넘어진 후에도 즉시 일어나며, 교회와 세상 안에 친교와 평화가 증진되도록 돕는 일에 적극 뛰어들 수 있는 정신을 가지도록 도와주십니다.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신비 안에서 가장 심오한 모습의 보편적 화해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가장 큰 효력을 냅니다.

 

화해를 이루기 위한 두 번째 수단은 설교입니다. 단 한분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교회는, 어머니이며 스승인 자기 자신으로서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화해를 촉구합니다. 교회는 또한 죄의 악을 서슴없이 단죄하고, 화해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화해의 기운에 몸을 맡기도록” 권고합니다. 실상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세상에서도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예언적 사명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스승이시며 수장이신 예수의 사명과 일치합니다. 그분처럼 교회도 언제나 자비로운 사랑의 정신으로 이 사명을 수행할 것이며, 십자가로부터 들려온 저 놀라운 용서의 말씀과 희망에의 초대를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줄 것입니다.

 

화해를 촉진하기 위한 수단에는, 모든 사람들을 이끌어 형제들 간의 친교 안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도록 인도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목표를 가지고 전개하는 사목 활동에는 흔히 큰 어려움과 희생이 따릅니다.

 

마지막으로, 증거에 의한 수단이 있는데 이 경우는 거의 말이 없는 가운데에 이루어집니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면에서 교회가 특히 각성해야 합니다. 첫째는 교회 스스로가 먼저 “결합 없이 거룩해야”54) 하고, 다음으로는 교회가 항상 더욱 전진하며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때나 주름이 없는 영광스러운 당신 교회로 삼으실 때까지, 날로 더욱 깨끗하게 하고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습”이 가끔 자신의 죄로 인하여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 “빛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55)

 

이 증거는 두 가지 근본적인 특성을 지녀야만 합니다. 첫째, 모든 증언은 어떤 사람이 참으로 당신 나라에 속함을 보여 주는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남겨주신 보편적 사랑의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모든 증언은 긴장을 극복하고 서로 용서하며 온 세상에 걸쳐서 확산될 형제애와 평화의 정신을 키워감으로써 회개와 화해가 교회 안팎에서 늘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본인의 선임자이신 바오로 6세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문명”을 실질적으로 창조해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2부

 

죄보다 더 큰 사랑

 


 

인간의 비극 13. 사도 요한의 말씀대로 “만일 우리가 죄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면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를 깨끗이 씻어 줄 것입니다.”56) 교회의 여명기에 쓰여진 이 영감받은 말씀은 화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죄에 대해 묵상하는 자리에서 어떤 인간적인 표현보다도 좋은 원칙을 제공합니다. 이 말씀은 죄의 문제가 지니는 인간적 차원을 제시합니다. 즉 인간의 실제 모습을 구성하는 한 요인으로서의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죄의 인간적 차원을 즉시 그 신적 차원에 연결시키는데, 거기서 죄는 의로우시고 관대하시며 충실하신 하느님의 사랑, 어디서보다도 용서와 구속에서 드러나는 그 사랑에 의해 퇴치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성 요한도 조금 뒤에는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57) 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ㅡ자기 안에 깊이 들어가 자신을 살펴봄으로써ㅡ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일과, 언제나 범죄할 수 있고 죄에의 경향을 늘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 자신을 죄인으로 승복하는 일, 이것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데 있어서 근본적이고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바로 이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고” 예언자 나단으로부터 질책을 받고58)는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오며,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죄를 얻었삽고,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59)  예수께서도 탕자로 하여금 입과 마음으로 비슷한 말을 하게 하십니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60)

 

 

확실히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저지른 죄를 의식적으로 또 결연한 태도로 끊어버려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참회를 위해서는 참된 의미의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뉘우치고, 이 뉘우침의 증거를 보이고, 진정으로 뉘우친 사람다운 태도를 가지는 등,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목에 들어선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녀야 할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각자 자기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해야 할 일반 법칙입니다. 죄와 회개의 문제를 단순히 추상적인 말로써만 다룰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참된 회개가 불가능한 죄 많은 인류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교회의 화해직무는 매 경우에 알맞은 방식으로 참회를 성취시키기 위해 개입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직무가 개입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ㅡ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께서 말씀하신 대로61)ㅡ “자신을 알고,” 악을 물리치며, 하느님과 친교 관계를 회복하고, 자신의 내적 질서를 바로잡으며, 교회 안에서 새롭게 회개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참회의 메시지와 이를 위한 직무는 교회와 믿는 이들의 공동체라고 하는 경계선을 넘어서 실로 모든 인류에게까지 미칩니다. 모든 사람들이 회개와 화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62)

 

 

이 참회의 직무를 적절히 수행하기 이해서는 우리가 신앙으로 “밝혀진 눈”63)을 가지고 죄에 따라오는 결과들을 정확히 평가해야 합니다. 죄에서 파생하는 이런 결과들이 각 개인의 내부에서 뿐 아니라, 한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관계하게 되는 여러 가지 단체 안에서도 분리와 분열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바와 같이 가정과의 관계, 직장이나 사회적 환경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분열의 원인이 됩니다. 이런 사리는 바벨이라는 도시와 그 탑에 관한 성경의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64) 그 도시의 사람들은 자기네 일치를 나타내는 상징과 그것을 보장해주는 원천으로 삼기 위해서 착수한 건축물이, 결과적으로는 자기네들을 전보다 더 심하게 분열시키고, 언어를 갈라놓으며 의견이 일치나 조화가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사태를 체험한 것입니다.

 

 

어째서 이 야심에 찬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까? 왜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게”65) 끝나버렸습니까? 그들이 실패한 것은 그들 스스로 이루는 업적으로써 자기네들이 바라는 일치의 표지와 보장을 삼으려 하고, 주님의 행위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과 사회생활에서 수평적 차원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수직적 차원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자기네 창조자이시며 주님이신 하느님 안에 뿌리를 둔 수직적 차원을 잊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이룩하는 진보의 최종 목표로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비극이, 역사의 어떤 시대에 있었던 비극과 마찬가지로, 바벨의 체험과 정확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1장  죄의 신비 14. 우리가 도시 바벨과 그 탑에 관한 성경 말씀을 복음이 제공하는 새로운 시각에서 관찰하고, 이를 다시 우리 첫 조상들의 실추에 관한 성경의 다른 말씀들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죄의 신비를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요인들을 거기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성 바오로께서 악의 신비66)에 관해 기록하신 바를 따라 생각해본 이 죄의 신비라는 표현은, 죄 안에 깃든 어둡고 잘 잡혀지지 않는 어떤 요인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두말할 것 없이 죄는 인간의 자유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실재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한계 안에 단순히 들어오지 않고 그를 뛰어넘는 어떤 요인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양심과 의지, 또 그 감각이 이 어두운 세력과 접하게 되는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에 의하면 이 어두운 세력은 세상에서 큰 힘을 떨치고 있어서 세상을 거의 지배할 지경입니다.67)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 죄를 이해하기 위한 첫째 요점은 바벨탑 건설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로부터 나옵니다. 백성들은 하나의 도시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스스로 하나의 사회를 결성했으며 강하고 힘 있는 백성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하느님을 거슬렀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하느님 없이 이를 해내려고 했던 것입니다.68) 이런 의미에서 에덴에서의 첫 범죄에 관한 이야기와 바벨의 이야기는 그 내용과 형태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 경우 모두 하느님을 제외시켰다는 점입니다.

 

 

먼저, 그분이 내리신 명령에 대한 정면 대결, 경쟁적 행위, “그분처럼 되려는”69) 빗나간 허세 등을 통해서 하느님을 제외시켰던 것입니다. 바벨 이야기에서는 하느님을 제외시키는 일이 그분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으로서보다는, 인간들끼리의 합작 사업 분야에서 그분이 하실 만한 일이란 전혀 없다는 듯이 그분을 망각하고 무관심에 빠지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하느님과 관계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맙니다. 에덴의 경우, 죄의 종국적인 본질과 어두움을 구성하고 있는 요인이 그 심각성과 비극적 모습 그대로 잘 나타납니다.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 그분의 법, 그분께서 인간에게 내려주신 윤리 규범ㅡ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주시고 계시를 통해 확인 완성시켜주신 그 규범에 대한 불순종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을 제외시키는 일,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ㅡ인류 역사를 통해서 그 형태는 달라질지 모르나, 요컨대 이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이 죄가 하느님과 그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데까지 갈 수도 있는데, 이런 현상을 보통 무신론이라고들 합니다.누가 적어도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그 순간에, 하느님께서 자기 삶을 지배하신다는 사실을 자유로운 행동으로써 인정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의 이 행동은 불순종이 됩니다.


 


형제들 간의 분열 15. 위에 살펴본 두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단절되면 그것이 필연적으로 형제들과의 분열까지 초래함을 알 수 있습니다.“첫 죄”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야훼로부터 단절은 인간 가족을 결속시켜주었던 우정의 끈마저 동시에 끊어놓고 맙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그 다음 장면들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상대방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70) 이어서 형제가 자기 형제를 미워하고 결국 그를 죽이기까지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71)

 

 

성경 이야기에 의하면, 죄의 결과는 인간 가족의 붕괴인바, 이 현상은 첫 죄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은 사회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취해 나타납니다.죄의 신비를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원인과 결과 사이의 연계 관계를 모르는 채 지나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단절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죄는, 피조물로서 제 생명을 창조해주시고 계속 붙들어주시는 분을 적어도 함축적으로 거부하는 불순종의 행위입니다. 그런 뜻에서 죄는 자살 행위입니다. 인간은 범죄 함으로써 하느님께 복종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의 내적 조화를 깨뜨리고 자기 안에 갈등과 자가당착의 현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이 일단 이런 식으로 상처를 받으면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피조물과의 관계에서도 거의 필연적으로 해악을 끼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심리 및 정신생활에서 뿐 아니라 내적 무질서의 표지와 그 결과를 그대로 반영하는 사회생활에서도 너무나 자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법칙이며 현실입니다.

 

 

죄의 신비는 죄인이 자기 자신 안에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 끼치는 이 이중적 상처로 구성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적인 죄와 사회적 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볼 때 모든 죄는 개인적인가 하면, 다른 면에서 볼 때에는, 모든 죄가 어떤 형태로든지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일체의 죄는 사회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 죄와 사회적 죄 16. 죄란 한 인간이 개인으로서 자유로이 저지르는 행동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한 집단이나 공동체의 행위가 아니고 언제나 개인적 행위입니다. 다만 이 개인이 여러 가지 외부 환경들로부터 영향과 충동 또 제약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는 또 자기가 개인적으로 처한 환경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성향과 결점 또는 습관에 예속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크게든 작게든 간에 그런 외적 및 내적 요인들이 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제한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롭다고 하는 것이 신앙의 진리이며 우리의 체험과 이성도 확인하는 바입니다.

 

개인의 죄에 대한 책임을 구조라든지 조직 또는 다른 사람 등, 자기 외부의 어떤 대상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이 기본적 진리가 부인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같이 거부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는ㅡ부정적이고 파멸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ㅡ그가 저지르는 죄에 대한 책임을 통해서도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 있어서 덕행에 따르는 공로와 죄에 따르는 책임보다 더 타인에게 전가시킬 수없이 끝까지 스스로 떠맡아야 하는 것도 없습니다.

 

 

개인적 행위로서의 죄 때문에 제일 먼저 가장 큰 손해를 입는 사람은 죄인 자신입니다. 죄는 우선 인간 생명의 근거인 하느님과 맺은 그의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또 그의 의지를 약하게 하고 지성을 둔화시킴으로써 그의 정신생활에 중대한 혼란을 야기시킵니다.이제 우리는 시노드의 준비 단계와 본회의 진행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주 언급한 사회적 죄란 실제로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이 표현과 그 저변에 깔린 개념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람들 사이의 연대관계는 신비스럽고 쉽게 잡혀지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사회적 죄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개인적인 죄가 어떤 식으로든지 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인정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종교적으로는 옛날부터 모든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의미심장하고 놀라운 관념이 발전했는데, 사회적 죄라는 관념은 이 신비를 뒤집어놓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진리로 해서, “스스로를 자기보다 더 높이 끌어올리는 모든 영혼은 실제로 세계를 들어 올리는 셈입니다.”72)고 하는 말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승의 법칙에는 불행히도 하강의 법칙이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통교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신보다 밑으로 끌어내리는 영혼은 자신과 함께 교회, 나아가서는 어떤 의미로 세계 전체를 끌어내리는 셈이라는 말이 타당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가장 내밀하고 비밀스런 죄, 철저하게 개인적인 죄라 해도, 엄격히 말해서 그것을 범하는 사람 하나에게만 관계되는 죄란 사실상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파괴력의 양이나 그것이 미치는 해악의 정도에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으나, 모든 죄는 교회 공동체 전체와 전 인류 가족에 반드시 영향을 끼치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이 지니는 이 첫째 의미에 따르면 모든 죄를 가리켜 사회적 죄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죄들은 그 소재 자체가 이웃, 더 복음적 언어를 써서 표현하자면 자기의 형제에 대해서 직접적인 공격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웃에 대해 저지르는 잘못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해서 하느님에 대한 잘못으로도 됩니다. 이런 죄들을 가리켜 흔히 사회적 죄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이 말이 갖는 둘째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로 사회적 죄는 이웃 사랑을 위반하는 죄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법에 다라 “첫째 계명과 같은”78) 둘째 계명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웃 사랑의 계명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띱니다.

 

같은 모양으로, 개인이 공동체에 대해서 저지르는 것이거나 반대로 공동체가 개인에 대해 저지르는 것이거나 간에, 인간관계에서 정의 문제와 관련하여 저질러지는 모든 죄에는 사회적이라는 말이 해당됩니다. 또 사람의 생존권으로부터 시작해서 태아의 생명을 거쳐 사람의 육체적 건강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죄는 모두 사회적 죄입니다. 이웃의 존엄성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죄도 사회적 죄이며, 공동선과 시민들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망라하여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각종 요구들을 짓밟는 죄도 사회적 죄입니다. 사회적이라는 말은 행함이나 궐함으로 짓는 죄에 대해 두루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정치, 경제계나 노동조합의 지도자들로서 자기가 근면하고 현명하게 일하면 어떤 역사적 순간의 요청과 가능성에 따라 사회를 개선하고 변개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나태로 인해 이를 하지 않을 때에는 궐함에 의한 사회적 죄를 짓게 됩니다. 노동자들 측으로서도, 그들이 태업이나 비협조적 태도로 해서 소속 산업체들로 하여금 노동자 자신들과 그 가족, 나아가서 사회 전체의 복지 증진 사업에 실패하도록 한다면, 그 역시 궐함에 의한 죄를 범하는 일입니다.

 

 

사회적 죄라는 말의 셋째 의미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인간 공동 단체들 간의 관계에 적용됩니다. 세상에 정의가 지배하고, 개인, 단체, 백성들 사이에 자유와 평화가 늘 보장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본래 의도에 비추어볼 때, 이 여러 등급에 실재하는 관계들이 항상 거기에 부합하지 않음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계급투쟁은 누가 이를 주도하고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려 하든지 간에, 그것이 사회적 악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몇몇 나라들이 이루는 국가군 사이의 고질적 충돌 관계, 한 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나, 동일 국가 안의 여러 가지 다른 단체들 사이의 갈등은 모두 사회적 악입니다.

 

이 두 경우에서 우리는 이런 악에 대한 윤리적 책임과 그에 따른 죄과를 과연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과 실재들이 일반화하여 사회적 현상을 이룰 정도로 확대되면 이들은 더욱 익명성을 띠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원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정확히 가려내기가 대단히 어렵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사회적 죄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이 말은 유추적 의미만을 지니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적 죄라는 말을 유추적 의미로만 쓴다고 해서, 거기에 연루된 개인들의 책임성을 과소평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 말은 오히려 모든 사람의 양심에 호소하여 각자로 하여금 진지하고 용기 있게 자기의 책임을 떠맡게 함으로써, 이와 같이 비참한 조건과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을 개선해나가도록 하기 위해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회적 죄에 대하여 명료하고 분명한 언어로 이야기했는데, 이에 대한 고찰을 마치기 전에, 우리는 이 말이 오늘날 일부에서 매우 흔히 사용되면서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정당하지 못한 의미로 오용되고 있음을 지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74) 이 용례에 따르면, 사회적 죄와 개인적 죄를 대립시켜서 바라보고, 그중에서도 사회적 잘못과 책임만을 일방적으로 인정하여 개인적 죄는 의식 무의식중에 아주 싱겁게 만들거나 거의 폐기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비그리스도교 이데올로기나 제도들ㅡ과거에 공식적으로 그것을 지지하던 사람들 자신이 오늘에 와서는 이를 폐기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한데ㅡ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아차리기가 어렵지 않은 이 용례에 따르면, 잘못에 대한 책임이 개인의 윤리적 양심보다는 주변 상황, 조직, 사회, 구조, 제도 등 추상적이고 익명성을 띤 전체에 전가된다는 점에서, 사실상 모든 죄가 사회적 죄입니다.

 

교회가 죄의 상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크고 작은 규모의 사회적 집단이나 온 나라 또는 여러 나라들의 군집 전체가 놓인 상황이나 전체적 행동 양식을 사회적 죄라는 말로 단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교회는 그런 사회적 죄의 경우들이 모두 많은 개인적 죄가 쌓이고 응집된 결과임을 알고 이를 공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상 다음과 같은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저지르는 개인적 죄의 한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악을 조성하고 유지시키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죄입니다. 또 어떤 종류의 사회악을 피하거나 근절시키며 적어도 줄여나갈 수 있는 자리에 앉은 이들의 나태, 비겁, 침묵에 의한 방조, 비밀 공모, 무관심 등으로 해서, 이를 그대로 방치할 때, 그것은 그 개인의 잘못입니다. 또 세상을 개선하는 일은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나서, 그걸 구실로 자기의 작은 세계에 안주하는 인간들, 제법 고상하기까지 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들을 늘어놓으면서 의당한 노력이나 희생을 거부하는 인간들도 모두 개인적 잘못입니다. 또 세상을 개선하는 일은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나서, 그걸 구실로 자기의 작은 세계에 안주하는 인간들, 제법 고상하기까지 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들을 늘어놓으면서 의당한 노력이나 희생을 거부하는 인간들도 모두 개인적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참다운 책임성은 인간 각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상황이라는 것이ㅡ제도, 구조, 사회 자체도 마찬가지인데ㅡ그 자체로서 윤리적 행위로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이 그 자체로서 선하거나 악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모든 죄의 상황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죄 많은 인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법의 힘으로나ㅡ실제로는 불행히도 더 자주 일어나는 대로ㅡ힘의 법으로써 구조나 제도적 차원에서 어떤 상황이 바꿔진다 해도, 그 상황에 대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그런 외적 변화 자체는 불완전하고 오래가지 못하며, 궁극적으로는ㅡ더욱 비참한 결과를 산출한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나ㅡ어떤 의미나 효과도 내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죽을죄와 소죄 17. 이제 우리는 여기서 죄의 신비가 지니고 있는 더욱 근원적인 측면을 두고 생각해야 할 단계에 와있습니다. 인간 정신이 끊임없이 궁구해온 이 문제는 바로 죄의 중대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이며 그리스도교적 양심으로서도 답변을 거부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죄가 왜 그리고 얼마만큼이나 하느님에 대한 불경이 되고, 그 결과가 인간에 미치는 것인가? 교회가 이 문제를 두고 구체적인 상황에 비추어 그 정확한 한계를 그어주는 일이 항상 쉽지는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견지해온 가르침이 있고, 본질적인 점에 있어서는 오늘날에도 이를 계속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미 구약 시대에도 몇 가지 종류의 죄를 범한 사람들은ㅡ의도적으로 저지른 죄,75) 여러 형태의 부정,76) 거짓 신 숭배78) 등ㅡ”백성으로부터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심할 경우에는 이 벌이 사형79)에까지 이를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죄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죄들, 특히 무지 때문에 범하게 된 죄들이 있었는데, 그런 죄에 대해서는 희생 제물을 바침으로써80) 용서를 받았습니다.

 

 

교회는 이 모든 성경 말씀들을 근거로 해서,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죽을죄와 소죄라는 표현을 사용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과 용어에 대해서 확실한 근거를 제공한 것은 무엇보다도 신약입니다. 신약에서는 특별히 단죄해야 할 죄들의 목록과 그 각각을 엄중하게 처단하는 표현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81) 또 예수께서도 몸소 십계명을 재확인하셨습니다.82) 여기서 우리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의미 깊고 인상적인 구절을 두고 생각해보려 합니다.

 

 

성 요한께서는 당신의 첫째 편지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이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는 죄83)와 대조 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죽음이라는 개념은 영신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참된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뜻하는데, 요한에게 있어서 이 영원한 생명이란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일,84) 또는 그분과의 친교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앞의 구절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란 아들을 거부하는 일,85)또는 거짓 신의 경배86)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요한은 이와 같은 개념 구분을 통해서 죄의 본질, 즉 하느님의 거부라는 엄청난 의미를 띠는 죄의 정체를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배교우상숭배의 경우에 잘 드러납니다. 계시된 진리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고, 어떤 피조물들을 하느님과 동등한 자리에 앉힘으로써 이들을 우상이나 거짓 신으로 떠받드는87) 일에서 죄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들의 내림을 통해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에서 얻게 되는 확신, 즉 그가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강조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보호해주시기 때문에 “악마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고,” 만일 그가 나약성이나 무지로 인해 범죄하게 될 경우에는 공동체의 기도에 힘입어 그 죄로부터 용서를 받는 데 대한 신뢰를 가지게 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는86) 예수께서 친히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 죄는 외적으로 나타나는 그 표현 자체가 자비로운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로 돌아서기(회개)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물론 극단적이고 결정적인 거부의 표현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거부하고 그 은총을 물리치며 따라서 구원의 원천 자체를 반대하는89) 등, 이 모든 표현들은 그 사람이 용서의 길목으로부터 일부러 달아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실제는 하느님께 반항하고 나아가서 도전적인 태도까지 보이는 사람들도 그런 자세를 끝까지 고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또 그렇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더욱이, 성 요한께서 그 다음에 알려주시는 바와 같이,90) 자비에 찬 사랑을 지니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더 크시고, 따라서 우리로부터의 심리적이나 영신적인 저항을 극복하실 만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 토마스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전능과 자비를 생각하면, 지상에서는 어떤 사람의 경우를 두고도 그의 구원에 대해 절망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91)

 

 

그러나 다른 한편, 무한히 정의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반항의 자세를 고집하는 사람의 경우를 두고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성 바오로께서 귀띔해주시는92) “구원적 공포와 떨림”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께서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경고하신 것을 보면, 죄인을 “영원한 죽음”에까지 이끌 수 있는 죄가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성경의 이런 구절들과 다른 여러 말씀들을 기초로 하여 교수, 신학자, 영성지도자, 사목자들은 죄를 죽을죄와 소죄로 구분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성 아우구스티노께서는 죽을죄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이를 소죄(또는 일상적인 죄)와 대조하십니다.93) 그분이 이 여러 가지 수식어에 매겼던 의미는 후대의 교회 교도권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이후에는 성 토마스가 나타나 이 교리를 명확한 개념으로 표현했는데 그것이 이후 교회 안에서 지속적인 자리를 차지해 왔습니다.

 

 

성 토마스와 그를 계승하는 신학이 죽을죄와 소죄를 정의하고 그 사이를 구분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성서적 근거와 영적 죽음이라고 하는 개념을 캐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 토마스에 의하면 인간이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생명의 궁극 원천인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존재와 행위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죄란 인간이 자기 생명의 원천을 거슬러 저지르는 질서 교란 행위입니다.

 

 

“영혼이 범죄함으로써, 자기 최종 목표인 하느님과 사랑으로 맺고 있던 관계를 단절할 정도로 심하게 질서를 교란시키면, 이때의 죄는 죽을죄에 해당됩니다. 한편, 이때 질서 교란의 정도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데에까지 이르지 않았으면 이는 소죄에 해당됩니다.”94) 그렇기 때문에 소죄는 죄인으로부터 성화은총, 하느님과의 친교관계, 애덕, 영원한 행복 등을 박탈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죽을죄의 결과로써만 잃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그에 따르는 벌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 성 토마스와 다른 교회학자들에 의하면 죽을죄란 이를 용서받지 못했을 때 영원한 벌을 받게 되는 죄를 말합니다. 거기에 비해, 소죄란 일시적인 벌(즉 지상에서나 연옥에서 보상할 가능성이 있는 유한한 벌)만을 초래하는 죄입니다.

 

 

죄를 또 그 내용에 따라 고찰할 때 우리는 이를 죽음, 최고선인 하느님과의 최종적 결별, 하느님께 이르는 길목으로부터의 탈선 또는 그분께로 가는 여정의 중단(이 모든 것들은 죽을죄를 정의하기 위한 표현들인데)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런 관념은 죄가 지니는 객관적 내용의 중대성에 대한 관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교리나 사목실천에 있어서 대죄는 사실상 죽을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가 간직해온 전통적 가르침의 핵심에 들어와 있는데, 최근의 시노드에서는 이 가르침이 반복해서 아주 강력한 어조로 표현되었습니다. 사실상 이 시노드는 죽을죄와 소죄의 존재와 성격에 대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을95) 재확인했을 뿐 아니라, 죽을죄란 그 내용이 중대한데다가 이를 온전히 알고 자유로운 동의하에 범하는 죄를 가리킨다는 사실도 다시 한 번 상기시켰습니다. 시노드에서처럼, 우리도 여기서 몇 가지 죄들이 그 내용의 성격상 본질적으로 중대하고 치명적이라고 하는 말을 덧붙여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행위들은 그 내용의 성격상 구체적 상황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언제나 중대한 잘못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들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자유로이 저질렀을 때에는 항상 중대한 죄가 됩니다.96)

 

 

십계명과 구약의 설교에 바탕을 둔 이 교리는 사도들의 복음 선포(Kerygma)에도 수용되었고, 그 뒤 교회의 가장 오랜 가르침에도 도입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교회가 끊임없이 재확인해온 바입니다. 한편, 이것은 모든 시대의 인간들이 쌓아온 체험과도 잘 부합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현세에서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영원한 나라에서 그분과 완전한 일치에 이르기 위한 신앙과 정의의 길목에서, 하느님께로 통하는 그 길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서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길을 잃고 헤매일 수가 있음을 사람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소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과소평가해서는 그것이 마치 무시해도 좋은 것이라거나 “별 중요성을 띠지 못하는 죄” 정도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의지의 행위로써 가던 길의 방향을 바꾸어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쪽으로 나아가고, 그렇게 해서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며, 그분과의 사랑에 찬 친교를 거부하고,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떠나, 결국 죽음을 택하기에 이를 수 있음을 쓰라린 체험을 통해서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유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법, 또 그분이 제공하시는 사랑의 계약 등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이나 어떤 유한한 피조물 등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을 선택하는 행위를 우리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 죽을죄라고 부릅니다.

 

 

 우상 숭배, 배교, 무신론 등은 가장 대표적이고 뚜렷한 예입니다. 또 중대한 문제를 두고 하느님의 계명에 불복할 때에도 그때마다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셈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이와 같은 불순종이 자기의 생명 원리와 자신을 연결시켜주던 끈을 끊어버리는 일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감지합니다. 그것은 죽을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느님께 중대한 모욕이 되는 행위이며, 결국은 컴컴하고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인간에게로 달려들어 그를 멸망시키고 마는 죄악인 것입니다.

 

 

시노드 총회 기간 동안 어떤 교부들은 죄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소죄(小罪), 대죄(大罪), 죽을죄(死罪)로 나누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렇게 죄를 세 종류로 구분하면 대죄 안에도 그 중대성의 정도에는 여러 등급이 있음을 잘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구분은, 애덕을 파괴하는 죄와 초자연적 생명까지는 파괴하지 않는 죄 사이를 구별하는 일이라고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사실입니다. 생명과 죽음 사이에 어떤 중간 상태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 죽을죄를, 오늘날 흔히 이야기하듯이, 하느님을 반대하는 방향으로 취하는 “근본적인 선택” 행위와 단순히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근본적 선택이라는 말로써 사람들은 흔히 분명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경멸하는 행위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죽을죄는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분명히 알고 의도적으로 어떤 중대하게 무질서한 것을 선택할 때에도 성립하는 것입니다. 실상 그런 선택 속에는 하느님의 법을 경멸하는 태도와, 인간과 전 창조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자세가 이미 들어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고 사랑을 잃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삶의 근본적인 방향은 개별 행위를 통해서도 바꿔질 수가 있습니다.

 

 

심리학적 견지에서 볼 때, 때로는 상황 자체가 대단히 복잡하고 미묘한데다가 그것이 죄인의 주관적 인책성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적인 분야에 있어서의 어떤 현상을 기점으로 하여 “근본적 선택”과 같은 신학적 범주에로 직접 건너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특히 이 말이 전통적인 죽을죄의 개념을 객관적으로 바꾸어놓거나 의심하게 하는 식으로 이해될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죄의 신비를 밝혀내기 위한 심리학 및 신학적 시도들은 그것을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로 추진할 경우에 높이 평가해야 하겠으나, 교회로서는 이 분야의 학자들로 하여금 죄의 문제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먼저 충실하도록 당부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죄에 대한 현대인들의 둔화된 감각을 신학자들이 더욱 둔화시킬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해야 하겠습니다.

 



죄에 대한 감각의 상실 18. 그리스도교 정신은 누대에 걸쳐 교회 공동체 안에서 복음을 읽고 해석해온 결과 죄 안에 깃들어 있는 죽음의 씨에 대해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식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죄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간에 이를 정확히 식별해낼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를 흔히 죄에 대한 감각이라고 부릅니다.

 

 

이 감각은 인간의 윤리적 양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말하자면 그것을 잴 수 있는 계량기 역할을 합니다. 이 감각은 인간의 자기의 창조주요, 주님이며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맺은 의식적인 관계로부터 나오는 것인 만큼, 하느님에 대한 감각과도 긴밀히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감각을 송두리째 근절시키거나 양심의 소리를 완전히 억누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감각을 깡그리 제거시키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볼 때, 여러 가지 요인들의 영향을 받아 많은 사람들의 윤리적 양심이 얼마 동안 심각할 정도로 흐려지는 일은 종종 있습니다. 본인은 2년 전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훈화에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에 관해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현대인들이 양심의 둔화나 사멸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97) 우리 시대에 이런 위협이 엄존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현상이 더욱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은, 공의회가 “인간의 가장 은밀한 방이요, 인간이 저 혼자서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98)라고 규정한 양심이 “인간의 자유와도 절대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인간의 내적 존엄성과 하느님에 대한 그의 관계에 있어서 그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99)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 속에서 윤리적 양심, 진리의 추구, 자유를 책임 있게 사용하려는 의지 등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죄에 대한 감각이 흐려진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양심이 둔화되면 하느님에 대한 감각도 따라서 흐려지고, 그렇게 되면 이 결정적인 내적 규준의 상실과 함께 죄에 대한 감각도 소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선임자이신 비오 12세께서는 이제 거의 금언이 되다시피 한 표현을 써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금세기의 대표적인 죄는 죄에 대한 감각의 상실에 있습니다.”100)

 

 

 

우리 시대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현대 문화의 몇 가지 측면을 일별해 보기만 해도 죄에 대한 감각이 점차 약화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에 대한 감각의 위기와 양심의 위기에서 오는 현상입니다.

 

 

“세속주의”란 말 그대로 또한 그 본질상 하느님을 완전히 배제한 채 인간의 행위와 생산만을 중심적 가치로 추켜올리는 일종의 인본주의입니다. 그것은 소비와 쾌락에만 온 정신이 팔려 “제 영혼을 잃을” 위험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입니다. 이런 세속주의가 죄에 대한 감각을 파괴시킬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쉽게 이해합니다. 죄는 기껏해야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우리는 본인이 본인의 첫 회칙에서 지적한 뼈아픈 경험을 두고 다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인간이 원한다면 하느님 없는 세상을 건설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세상은 결국 인간을 향해 대들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101) 실상 하느님은 인간의 기원이자 최종 목적이며, 인간은 자기 안에 신적 씨앗을 지니고 있습니다.102) 그래서 인간의 신비를 계시하고 밝혀주는 것은 하느님의 실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란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거슬러 저질러지는 잘못이라는, 본래적 의미의 죄에 대한 감각이 정립되지 못한 채, 인간과 인간적 가치를 거슬러 행해지는 잘못이라는 정도의 죄에 대한 감각이 사람들 사이에 뿌리내리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죄에 대한 감각이 사라져가는 또 하나의 이유를 우리는 현대 인문 과학 분야에서 발견해낸 몇 가지 사실들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저질러진 잘못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심리학이 내세우는 몇 가지 주장을 근거로 해서 죄의식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면 한사코 피하려 드는 태도라든지, 자유가 크게 제약을 받고 있음을 과장하는 학설들로 인해서 어떤 과오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입장이 나타납니다. 사회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비판 기준을 지나치게 확대 적용함으로써ㅡ본인이 이미 지적한 대로ㅡ 모든 잘못의 책임을 사회에 전가 시키고 개인은 무고한 것처럼 주장하는 태도도 있습니다. 또 일부의 문화 인류학에서는 한 인간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적 요인, 역사적 조건 및 여러 방면으로부터 받는 영향 등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발견한 데까지는 옳다고 하겠으나, 그 주장이 너무 지나쳐서 사람이 참으로 인간다운 행동을 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책임성을 부인하고 따라서 죄를 범할 능력마저 인정치 않는 수가 있습니다.

 

 

역사적 상대주의 사상에 기원을 둔 일부의 윤리 체제로부터도 죄에 대한 감각이 쉽게 감소되는 원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입장은 윤리 규준을 상대화하고, 그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가치를 부인하기 때문에, 주체가 처해있는 주변 상황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불법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윤리 체계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 체계 속에서는 사실상 “윤리적 가치가 붕괴되고 전도되며,” 이제는 “그리스도교 윤리를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고, “일체의 윤리적 태도가 갖는 의미와 그 기반 및 규준”이103) 문제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윤리가 전도될 때, 그것이 산출시키는 또 하나의 결과는 항상 죄에 대한 관념이 약해진다는 것인데, 이때에 사람들은 죄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누가 그 죄를 저지르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릅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는 현상은 마지막으로ㅡ청소년 교육이나 홍보 수단 또는 가정교육에 있어서까지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데ㅡ죄를 병적인 죄의식이나 법적 기준이나 명령에 대한 단순한 위반과 동일한 것으로 잘못 보는 데서도 기인합니다.

 

 

죄에 대한 감각의 상실은 이처럼 하느님 거부의 한 형태이거나 그 결과입니다. 이 하느님의 거부는 무신론뿐 아니라 세속주의라는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죄란 사람이 하느님에 대한 순종 관계를 떠난 자리에 자기 삶을 구축하기 위해서 그분과의 자녀적 연줄을 끊어버리는 태도를 의미한다면,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게 됩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그 분께서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것을 의미하며, 매일의 삶에서 그분을 제거 시키는 일을 뜻합니다. 어떤 의미로든지 병들고 변질된 사회는 흔히 홍보  수단의 부추김까지 받아 죄에 대한 감각을 차츰 상실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런 상황 안에서 죄에 대한 감각의 둔화나 약화 현상을 유발시키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개인의 독립을 내세워 일체의 초자연적 준거를 거절하는 태도, 개인의 양심이 용납할 수 없는 경우에까지도 다수의 의견이나 행동 방식이라는 명목으로 그것을 윤리적 범형으로서 받아들이는 일, 인류의 많은 부분을 압박하는 사회 및 경제적 조건을 용인함으로써, 오류와 잘못을 사회적 상항에서만 찾는 경향을 생성시키는 현실, 마지막으로 또 특별히,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한 관념과 인간의 삶을 지배하신다는 사상이 곡해되는 경우 등등.

 

 

 

게다가 교회의 사상이나 생활에서조차 발견되는 몇 가지 경향들은 죄에 대한 감각을 불가피하게 소멸시키는 결과를 빚어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이러저러한 문제에 대한 과거의 과장된 태도 대신에, 이번에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과장된 입장을 취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모든 곳에서 죄를 발견하던 태도 대신에, 이제는 아무데서도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벌에 대한 공포를 지나치게 강조하던 과거의 태도 대신에, 이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죄에 따르는 벌에 대한 관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듯이 그것을 제시하는 경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잘못된 양심을 교정해주기 위해서 보였던 엄격한 태도로부터 이제 그들은 진실을 고백해야 할 의무까지 제거해 버릴 정도로 이른바 양심을 존중한다는 자세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윤리 가운데 중대하고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까지, 신학, 설교, 교리, 영성 지도 등에서 제시하는 견해나 가르침들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의 양심에 큰 혼란이 일어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죄에 대한 감각을 약하게 하고 거의 소멸시켜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성사적 참회의 실천에서 엿보이는 몇 가지 결함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죄와 회개의 교회적 의미를 소홀히 하고 이들을 순전히 개인적인 일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면 정반대로, 선악의 개인적인 가치를 전혀 무시하고 공동체적 가치만을 인정하는 태도도 있습니다. 그뿐 이니라 성사를 대하는 사람이 일상적 의식주의에 빠짐으로써 그것이 지니는 풍부한 의미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 형성을 위한 그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될 위험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합당한 감각을 회복하는 일은 현대인을 위협하는 심각한 정신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각을 회복하려면 무엇보다도, 교회가 그 윤리적 가르침을 통해서 늘 존중해온 바와 같은 이성과 신앙의 불변하는 원칙들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죄에 대한 건전한 감각이 특히 그리스도교 세계와 교회 안에서 다시 한 번 꽃피게 되리라는 희망을 충분히 뒷받침해주는 근거들이 있습니다. 계약에 관한 성경 신학의 비추임을 받아 수행하는 건전한 교리 교육은 죄에 대한 감각의 회복을 도와줄 것입니다. 또 끊임없이 양심을 밝혀주는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고해성사를 더욱 조심성 있게 실천하는 일들도 모두 이를 위해 큰 도움이 됩니다.

 

 



제2장 “우리 종교의 신비”

 

 

19. 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구원 경륜의 계시를 통해 알려진 죄의 본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죄악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 경륜 속에서 죄는 주된 원리도 아니고 승리자는 더욱 아닙니다. 죄는 우리가ㅡ성 바오로의 아름답고도 의미 있는 표현에 따르자면ㅡ종교의 신비 또는 생사라고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원리와 대치하여 겨룹니다. 이 종교의 신비가 인간의 죄를 정복하기 위해서 역사의 역동적 세력 속으로 뛰어 들어오지 않았던들, 인간의 죄가 승리했을 것이며 종국적 파괴 세력으로 나타나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불완전한 모습으로 머물거나 나아가서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성 바오로의 사목 서간 가운데 하나인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견하는데, 그것은 마치 넘치는 영감에 의한 것처럼 전혀 뜻밖의 상황에 불쑥 나타납니다. 사도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공동체 안에서 지켜야 할 질서(전례적 질서와 그와 관련 위계적 질서)의 뜻을 먼저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다음 그분은 공동체의 수장들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셨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진리의 기둥이며 보루인 “살아계신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티모테오 자신이 지녀야 할 몸가짐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단락의 끝에 가서 그분은 돌연히 그러나 아주 의도적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기록한 모든 것에 의미를 주는 그 핵심적인 요인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우리가 고백하거니와 우리 종교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104)

 

 

우리는 이 문장이 지니는 글자 그대로의 뜻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여기에 나타난 성 바오로의 놀라운 신학적 통찰을 확대 적용시켜, 구원 경륜의 더욱 완전한 시야에서 그것이 같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오로의 말씀에 화답하면서 이렇게 외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종교는 죄를 물리치기에, 과연 “우리 종교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그러면 이제 바오로 사도의 마음속에 이 말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20. 바오로께서 이 “종교의 신비”를 제시하실 때, 자신이 그 직전에 기록하신 부분과의 문법적인 연계를 무시하고,105) (권위 있는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어 사용 그리스도 공동체들이 즐겨 쓰던 그리스도 찬가 중의 세 줄을 그대로 옮겨놓으셨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사실입니다.신학적 의미가 풍부하고 고상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그 찬가의 말들을 통해 초세기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고백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런 것들입니다.

 

 

ㅡ그분은 인간의 육체를 통해 나타나셨는데, 성령께서는 그분을 불의한 이들을 위해 몸 바치실 의로운 분으로 만드셨다.

 

ㅡ그분은 천사들보다도 더 위대한 분이 되시어 그들에게 나타나셨고, 구원을 가져오실 분으로서 이교인들에게까지 선포되셨다.

 

ㅡ세상은 그분을 아버지께서 보내시어 세상에 오시고 역시 같은 아버지께서 들어 올리신 분을 믿었다.106)

 

 

 

따라서 종교의 신비 또는 성사는 그리스도 자신의 신비입니다. 요약하면, 그것은 강생과 구속의 신비이고, 하느님의 아들이며 마리아의 아들이신 예수의 충만한 파스카 신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분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 부활과 영광의 신비입니다. 성 바오로께서 찬가의 몇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강조하고자 하신 것은, 바로 이 신비가 교회로 하여금 하느님의 집이 되고, 진리의 기둥과 보루가 되게 해주는 숨겨져 있으면서도 생명력 있는 원리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오로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라고 하는 이 신비가 우리 죄악의 숨겨진 뿌리 깊숙이에까지 파고들어가, 영혼 안에 회개의 움직임을 일으킴으로써 영혼을 구속해주시고, 화해에로의 길목에 들어서도록 해주실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확언할 수 있습니다.

 

 

성 요한께서는 성 바오로와는 다르게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시면서도 분명히 이 신비를 염두에 두시고 이렇게 쓰셨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그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악마가 그를 다치지 못합니다.”107) 요한의 이런 확신 속에는 하느님의 약속에 바탕을 둔 희망의 표지가 엿보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보장과 거기에 필요한 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덕으로 달성해낸 무죄 상태나, 영지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인간 속에 깃들어 있는 무죄성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해주시는 바의 결과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 요한께서 같은 곳에서 깨우쳐 주셨듯이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조금 앞에서 그분은 이미 이렇게 쓰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씨앗(본성)을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108) 우리가 “하느님의 씨앗”을 어떤 주석가들이 알려주는 대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죄를 짓지 않거나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보장책으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그분의 현존과 하느님 사랑의 신비인 그리스도의 신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노력  21. 그런데 우리 종교의 신비에는 또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찬 친절에는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태도)가 대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의미대로는, 종교라는 말이 하느님으로부터의 자부적 사랑에 찬 친절에 대해서 자녀다운 효심으로 응답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를 따라서도 우리는 성 바오로와 함께 “우리 종교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의미로도, 회개와 화해를 촉구하는 힘으로서의 종교는 악과 죄에 맞서 싸웁니다. 이 경우에도 역시 그리스도 신비의 본질적인 면들은 종교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 신비를 받아들이고 관상하며 복음에 맞춰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적 힘을 거기서부터 길어내기 때문입니다. 이 두 의미로도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여기서 명령적인 색조를 띠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영적 힘의 공급을 위한 내적 원천으로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를 받는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죄를 짓지 말고 “하느님의 집인 살아계신 하느님의 교회”109)에 맞갖은 태도로 살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화해를 이룩하는 삶을 향하여  22. 이처럼 성경의 말씀은 우리 종교의 신비를 계시함으로써, 구름을 잡는 듯한 추상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성취해야 할 구체적인 그리스도교 가치로서의 회개와 화해에로 인간의 지성을 인도합니다.

 

 

현대인들은 죄에 대한 감각의 상실이 가져다주는 쓴맛을 체험하고, 전혀 그리스도교적이라 할 수 없는 종류의 무죄 상태에 대한 망상에 가끔 현혹되었기 때문에, 성 요한의 권고를 가자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알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110) 그리고 과연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111) 그러므로 각자는 숨김없이 자기 양심을 성찰하고, 시편의 말씀처럼112) 자기가 죄 중에 태어났음을 고백하라고 촉구하는 신적 진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공포와 절망의 위협을 받고 있는 가운데에도, 완전한 화해에의 희망을 갖게 해주는 하느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 편에서 볼 때, 종교의 신비는 ㅡ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ㅡ 우리의 주님이시고 아버지이신 분께서 가지고 계신 무한한 자비를113) 가리킵니다. 본인이 하느님의 자비에 관해서 내놓은 회칙114)에서 밝힌 대로 그것은 죄보다 힘 있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 때문에 중지되거나 우리의 잘못 때문에 취소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자상하고 강렬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때, 몸이 되신 말씀,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를 구속하시기로 작정하신 그분께서 수난과 죽음까지 당하신 것은 바로 이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달을 때, 그때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자비가 넘치는 분이십니다.” 또는 이렇게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비 자체이십니다.” 종교의 신비는 화해를 성취한 삶에 이르기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개설해주신 길입니다.



 

 

 


 

 

 

 

 

 

 

 

성공스토리의 주인공들의 배후엔 언제나 그에게 영감을 준 사람들이 있다.' 미래로 가는 길'을 읽기 전에,난 빌 게이츠에게 운좋고 탐욕스런 억만장자를 연상할 뿐,별 관심이 없었다.독서를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사고를 할 수 있고,그 사유의 과정이 실생활 속에 접목됐을 때 인류의 역사마저 새롭게 바뀔 수 있다는 걸 그 책에서 새삼 느꼈다.결국, 빌 게이츠를 만든건 그의 동네에 있었던 도서관이었다.그의 책 속에서 그는 단순히 컴퓨터영역의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우리 인류문명이 어디서 시작됐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사유한 그의 청소년기와 청년기의 사유과정들이 그에게 미래를 분석하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져다 주었던 것.

그는 경제학 공부를 좋아했고 그래서 대학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미래를 읽은 그의 눈엔 성공이 뚜렷하게 보였을 것이다.이 책을 읽는 동안 난 빌 게이츠의 열정과 흥분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고, 그의 영혼을 느꼈다.그 이후 난 빌 게이츠에게 관심을 갖게됐고 그에 관련된 기사는 쉽게 놓치지 않았다.언젠가는 이런 기사를 읽엇다.그가 사회기증을 많이 하는데 그건 그의 아내의 영향이라는..그는 대학 때 만난 아내와 결혼했는데,그건 당시 그의 지위에선 너무 의외의 혼인이었다고.그의 아내는 지극히 평범한 외모와 배경을 가진 여자였으므로.빌 게이츠를 사로잡은 여자는 그의 철학적 안목에 알맞는 신념과 따뜻한 성품을 지닌 여자였나보다.그런 아내를 선택한 그의 안목마저 나에겐 멋지다.

 

 

Bill Gates -자료 출처 yes24- 480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한 세계 최고의 갑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리더, 디지털 제국의 제왕, 컴퓨터 천재, IT 혁명의 기수……. 바로 빌 게이츠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1955년 10월 28일 출생한 빌 게이츠는 13세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독학으로 터득했다. 1967년 레이크사이드에 입학하면서부터 컴퓨터와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이 곳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社)의 공동창업자인 P.앨런을 만났다. 하버드 대학을 중퇴하고 19세에 두 살 위인 폴 앨런과 1,500달러를 자본으로 마이크로소프트(MS)사를 설립했다.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회장으로 재직중이다. 아직 컴퓨터가 상용화되지 않았던 시절, 빌 게이츠는 ‘모든 책상 위에 컴퓨터를, 모든 가정에 컴퓨터를’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실현하고 있다. 1995년 Windows의 개발로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을 석권했으며 지금 MS의 매출은 연 140억 달러를 넘는다. 1986년 MS사가 상장되면서 빌 게이츠는 서른한 살의 나이에 역사상 가장 어린 억만장자가 되었으며 포브스 선정 세계의 갑부 1위에 11년째 올라 있다. (2007년 멕시코의 통신 재벌 카를로스 슬림이 빌 게이츠를 제치고 세계 최고 갑부 자리에 올라섰다는 기사가 게재되어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선정한 2004년 존경받는 세계의 비즈니스 리더 1위에도 올랐으며 총 200억 달러를 기부한 세계 최고의 자선가이기도 하다.

 

 

『빌 게이츠&워렌 버핏 성공을 말하다』는 컴퓨터 황제이자 세계 최고의 부자 빌 게이츠와 세계 증시의 큰손이자 투자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세계 2위 부자 워렌 버핏이 변화의 시대를 앞서가는 리더에게 전하는 열정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책이다. 비즈니스와 성공, 그리고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가득하다. 저서로 『빌게이츠 @ 생각의 속도』,『미래로 가는 길』,『위대함의 법칙』등이 있다.

 

 

 

 

1. 혁명이 시작된다 .

2. 정보시대의 개막 
3. 컴퓨터 산업계 최후의 패자 
4. 손가락 하나로 모든 정보를 
5. 꿈의 통신망 정보고속도로 
6. 멀티 미디어 문서 혁명 
7. 기업이 달라진다 
8. 이상적인 시장 
9. 미래의 학교 
10. 집은 우주의 중심 
11. 황금을 찾아서 
12. 황홀한 여행






Posted by T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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