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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민주주의


    46. 교회는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는데, 이 체제는 확실히 시민들에게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중요한 권한을 부여하며, 피지배자들에게는 지배자들을 선택하거나 통제하거나 필요한 경우에는 평화적으로 대치할 가능성을 보장해 준다.93)  따라서 교회는 사적 이익이나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하여 국가 체제를 점령하고 폐쇄된 지배자들의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도와주면 안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법치 국가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올바른 인간관의 기초 위에 성립한다. 이것은 가장 완전한 교육과 양성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모든 사람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필요하거나, 참여와 공동 책임 구조의 설립을 통하여 사회의 주체성에 필요한 조건들이 채워지기를 요청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불가지론과 회의적 상대주의가 민주 국가 형태에서 발견되는 철학이며 기본 자세라고 생각하고, 진리를 알고 진리에 집착하는 이들은 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신뢰를 받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진리가 시민 대다수에 의하여 결정되거나 정치적 변천의 다양성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만일 정치적 활동을 이끌어가고 통제할 최후의 진리가 없다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이념과 확신을 도구처럼 쉽게 조작할 수 있다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끝으로, 원칙 없는 민주주의는 역사가 증명하듯이 쉽게 공개된 또는 위장된 전체주의로 변한다. 


    교회는 과학적이거나 종교적이라고 자처하는 어떤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진리와 선에 대한 자신들의 개념을 다른 이들에게 부과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광신과 근본주의의 위험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이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데올로기가 아니기 때문에 변화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현실들을 일정한 한계 내에 국한시키려고 하지 않으며, 인간의 생활은 역사 안에서 다양하며 항상 완전하지는 못한 조건하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의 초월적 존엄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 방식으로써 자유를 수호한다.94) 


    그러나 자유는 진리가 수락될 때만 충만하고 완전하게 평가될 수 있다. 진리가 없는 세상에서 자유는 그 중요성을 상실하며, 인간은 쾌락의 격정에 직면하며 노출되었거나 숨겨진 조건들에 얽매인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생활하고(요한 8,31-32 참조) 자유를 받들며, 자신의 소명의 선교적 본질에 따라 자신이 인식한 진리를 항상 증거한다. 그리스도인은 개인들과 민족들의 생활 경험과 문화에서 일어나는 진리의 모든 요소들에 대하여 주의 깊게 다른 이들과 대화하면서, 인간에 대하여 신앙과 올바른 이성이 가르친 것을95) 긍정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소개]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10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발표하신 회칙이다. 「새로운 사태」에 담겨 있는 풍부한 기본 원리들을 재발견하고,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새롭게 도전하는 ‘새로운 것들’을 둘러보며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인간 중심으로 해명하고 제삼천년기를 바라보도록 권고한다.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100주년을 맞이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백 주 년
CENTESIMUS ANNUS
1991. 5. 1.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100주년을 맞이하여
존경하는 형제 주교들에게,
사제들과 수도자 가족들에게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회칙 

 

 

   1. 회칙 '새로운 사태'의 역사적 중요성
   2. 백주년 경축
   3. 회칙 '새로운 사태'의 재독
   제1장 회칙 [새로운 사태]의 특징들
   제2장 오늘날의 “새로운 것들”을 향하여
   제3장 1989년
   제4장 사유 재산과 물질적 재화의 보편적 목적
   제5장 국가와 문화
   제6장 인간은 교회의 길이다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인사와 더불어 사도적 축복을 보낸다.

 

회칙 [새로운 사태]의 역사적 중요성 *


   1. 「백주년」(Centesimus Annus)은 ‘새로운 사태’라는 말로 시작되는,1) 본인의 존경하는 선임자 레오 13세의 회칙 반포 백주년을 기념하는 것으로, 교회와 본인의 교황직의 현 역사 안에서 중차대한 의의를 지닌다. 확실히 이 회칙은 그 사십주년부터 시작해서 구십주년에 이르기까지 교황들의 성대한 문헌들에 의해서 기념되어 온 명성을 가지고 있다. 회칙 맛새로운 사태맜에 대하여 상기시키며 그 회칙을 실천하던 다른 문헌들에 의하여,2) 그 역사적 도정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주교들, 교회 기관들, 연구소들, 기업가들과 노동자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적으로 하는 요청을 받아들여, 본인도 그 회칙 반포 백주년에 그와 똑같은 일을 하기로 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그 “불후의 회칙”3) 을 남겨주신 위대한 교황님께 온 교회가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를 드리고 싶다. 본인은 또한 뿌리로부터 솟아나는 풍부한 활력은 해가 감에 따라 소모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들은 백주년 거행을 선행하고 현행하고 후행하는 다양한 주도들, 즉 주교회의들, 국제 기관들, 대학들과 학회들, 직업 단체들 그리고 세계 여러 곳에 있는 다른 많은 단체들과 개인들에 의하여 촉진된 주도들이다.


백주년 경축


   2. 교회와 세계 안에서 그 많은 선을 완성하고 그 많은 빛을 발하면서, 베드로좌에 의하여 백년 전에 반포된 문헌을 사용해 준 데 대하여 현 회칙은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야고 1,17)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그 기념제에 참여한다.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기념제가 레오 교황의 회칙에 관한 것이지만, 동시에 이 회칙을 역사 안에서 현존케 하며 효과적으로 만든, 그 후에 교회의 “사회 교시(Doctrina socialis)”, “사회 교육(Disciplina socialis)” 또는 “사회 교도권(Magisterium socialis)”이라고도 불리는 것을 성립시킨 본인의 선임자들의 회칙들과 다른 문헌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르침의 권위는, 본인의 교황직 수행 동안에 반포된 사회 문제에 대한 두 회칙에서, 즉 인간 노동에 관한 「노동하는 인간」과 인간 발전과 민족들의 현안 문제들에 관한 「사회적 관심」에서 이미 상존하였다.4)

회칙 [새로운 사태]의 재독


  3. 이제 본인은, 레오 교황의 회칙이 노동자들의 상황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명확하게 설명한 기본 원리들의 풍부함을 재발견하기 위해, 그 문헌 자체를 “돌이켜 보라”고 초대하면서 그 재독을 제안하고 싶다. 그러나 본인은 역시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안에 우리가 깊숙이 잠겨 있는 “새로운 것들”을, 말하자면 지난 세기의 마지막 십년 간을 특징짓던 “새로운 것들”과는 대단히 다른 것들을 “둘러보도록” 격려한다. 끝으로 본인은 미지의 것들로 그러나 역시 약속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교 시대의 삼천년대를 벌써 바라볼 때, “미래를 바라보도록” 권고한다. 이러한 미지의 것들과 약속은 우리의 생각과 창의력에 호소하며, 우리의 ‘유일한 스승이신’ 그리스도의(마태 23,8 참조) 제자로서의 책임 의식을 촉구하여, ‘길’을 보여주고 ‘진리’를 선언하며 ‘생명’이신 그리스도를(요한 14,6 참조) 전파하도록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가르침의 무궁한 가치가 확인될 뿐 아니라, 신앙 안에서 우리 선조들에 의하여 놓인 기초 위에, 특별히 대치될 수 없는 기초인(1고린 3,11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도들이 교회에 전해준,5) 기초 위에 항상 살아 있고 활기 넘치며 능동적으로 서 있는 교회 전통의 진정한 의미가 명시되는 것이다. 


   레오 13세가 발언한 것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사명 의식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오늘날에 베드로의 후계자는 같은 의식에서 행하는 것이다. 레오 13세와 그의 전후 교황들처럼 본인은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묵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마태 13,52)과 같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율법 학자의 복음적 비유를 따른다. 재보는 아무 중단없이 받아들여 전해내려 온 “묵은 것들”을 내포하며, 동시에 그 안에 교회와 세계의 생활이 전개하고 있는 “새로운 것들”을 해석할 수 있게 하는 교회의 위대한 전통이다. 


   전통이 병합되어 묵은 것이 되었으며, 전통과 신앙 생활을 풍요하게 만들기 위한 기회와 재료를 제공하는 것 중에는, 사회 교도권으로 격려되어 세계 안에서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 가르침을 따르는 수많은 민중의 풍옥한 노력도 있다.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들과 조직체들 안에서 다양하게 행동하면서, 민중은 인간과 존중받아야 할 그의 존엄성을 위한 광범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역사의 다양한 변천 속에서, 더욱 의로운 사회의 건설에 또는 적어도 불의의 억제와 감소에 기여했다. 


   현 회칙은 레오 13세가 선언한 원리들의 풍옥함, 교회의 교의적 유산에 속하는 원리들이며, 따라서 그 교도권의 권위를 갖는 원리들의 풍옥함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목적 배려도 또한 본인으로 하여금 최근 역사의 몇몇 사건들에 대한 검토를 제안하도록 한다. 복음화의 새로운 요청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건들의 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이 목자들의 직무에 속한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검토는 결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 자체로서 교도권의 고유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1장 회칙 [새로운 사태]의 특징들

새로운 유형의 사회

4. 지난 세기 말경에 교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그때에 크나큰 위기에 도달하게 된 역사적 과정에 당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의 결정적 요소들 중에는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분야에서뿐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도 일어난 근본적 변화들의 종합이 있으며, 다양한 지배 이데올로기들의 영향도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정치적 영역에서 사회와 국가의 새로운 개념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권위의 새로운 개념을 낳았다. 전통적 사회는 사라지고, 새로운 자유의 희망으로 가득 찬 다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역시 새로운 형태의 불의와 노예 상태의 위협을 초래하는 사회였다. 


    과학의 발명과 응용이 합류하는 경제적 분야에서는, 소비될 재화 생산을 위한 새로운 구조들에 점차적으로 도달했다. 새로운 형태의 소유 재산, 즉 자본과 새로운 종류의 노동, 즉 성이나 연령 또는 가정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다만 이윤의 증가만을 위하여 결정된 임금 노동과, 어려운 생산 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노동이 나타났다. 

 이렇게 노동은 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으며, 그 가격은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 유지에 필요한 것을 고려하지 않고, 수요 공급의 법칙에 의하여 결정되는 상품으로 변해갔다. 게다가 노동자는 계속해서 실직의 위협을 받았으며, 이것이 사회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노동자로 하여금 기아의 위험에 빠지게 했을 때, 자기 고유의 상품을 판매할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았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는 사회가 “큰 차이로 벌어지는, 두 계급으로의”6) 분열이다. 이러한 상황은 증가된 정치적 변화에 추가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때의 지배적 정치 이론은 적합한 법으로 또는 고의적 개입 중단으로 완전한 경제적 자유를 옹호하려고 했다. 같은 때에 조직적으로, 그러나 드물지 않게는 폭력적으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새로운 질서를 요청하는, 소유 재산과 경제 생활의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러 곳에 존재하던 사회 현실의 심한 불의와, 그 당시에 “사회주의” 이념이라고 불리던 것에 의하여 선동된 혁명의 위험이 분명히 나타나기 시작하던 그 대립의 절정에서, 레오 13세는 처음으로 노동자들의 조건을 체계적으로 다룬 문헌을 통하여 권위로써 개입했다. 그 회칙에 앞서 정치적 성격을 강조하던 회칙들이 있었으며, 다른 것들은 그 후에 나왔다.7) 이 맥락에서는 진리에 매이기를 거절하는 자유는 독단성에 빠지게 되고, 가장 타락적인 격정을 따르게 되며, 자신의 파괴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에서 인간 자유와 진리 간의 유대 관계를 특별히 논하고 있는 회칙 [탁월한 선인 자유](Libertas Praestantissimum)를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회칙 [새로운 사태]가 대응하려고 했던 모든 악이,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활동 영역에서 인간의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자유에서 오지 않고 어디에서 오겠는가? 


    다른 편으로 교황은 선임자들의 가르침, 주교들의 많은 문헌들, 평신도들에 의하여 촉진된 학문 연구, 가톨릭 운동과 단체들의 활동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사회적 분야에서 이룩한, 교회 생활의 실천적 성과로부터 착상을 얻었다.


교회의 대답


    5. 로마 교황이 검토해 온 “새로운 것들”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회칙의 첫번째 절에서, 교황은 그 이름이 유래하는 “새로운 것들”(Rerum Novarum)을 강력한 어조로 묘사하고 있다. “새로운 사태의 열망이 한번 불타올라, 오랫동안 여러 나라들을 동요시켜 왔으며, 그러한 열망으로 인해 언제부터인가 변혁의 추구가 정치의 영역에서 경제 관련 분야로 옮겨가게 되었다. 실제로 새로운 산업의 성장과 새로운 기술의 발전, 변화된 노사 관계, 극소수의 막대한 부요와 대다수의 빈곤, 노동자들의 자기 신뢰 증가와 상호 결속의 필요성, 그 밖에 윤리의 타락이 투쟁을 일으키게 되었다.”8) 교황과 교회와 시민 공동체는 규율과 규칙이 전혀 무시된, 더 거칠고 비인도적인 투쟁으로 분열된 사회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본과 노동의 투쟁이거나 또는`─`회칙이 그렇게 표현하듯이─노동자들의 상황’인데, 그때에 나타나던 아주 어려운 조건들로 명확히 제한된 그 투쟁에 대하여, 교황은 자기 판단을 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여기에, 회칙이 우리 시대를 위하여 시사한 첫번째 반성이 있게 된다. 어떤 이들은 생계의 위험에 처하여 있는데 다른 어떤 이들은 풍부하게 살도록 놓아두기까지 하면서, 마치 “이리들”처럼 인간을 인간에게 대립시키는 투쟁에 반대하여 교황은 자신의 권위로써 개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사도적 직무”에 의하여 양심적으로,9) 즉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양을 먹이고 양을 돌보아야 할”(요한 21,15-17 참조), 하늘 나라를 위하여 “세상에서 묶고 매야 할”(마태 16,19 참조) 직무로 그렇게 한 것이다. 교황의 의도는 확실히 평화를 이룩하자는 것이었으며, 그 시대의 독자는 그가 공개적으로10) 선언한 계급 투쟁의 단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교황은 평화가 정의의 기초 위에 이룩된다는 것을 매우 의식하고 있었다. 회칙의 주된 내용은, 그 당시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에 있어서11) 정의의 기본 조건들이 선언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양식으로, 레오 13세는 그 선임자들의 선례에 따라 교회를 위한 영속적 모범을 보여주었다. 교회는 사적이고 공적인, 국가적이고 국제적으로 정해진 인간 조건들에 있어서 할 말이 있는데, 교회는 진정한 교의, 즉 이 교의를 사용하여 사회 현실들을 분석하고, 그것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제기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하여 취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의체를 제시한다. 


    레오 13세 때에 교회의 이러한 권리와 의무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기 어려웠다. 실은 두 가지 경향이 지배하고 있었다. 하나는 신앙이 무관하게 남아 있어야 하는 이 세계와 현 생활로 향하는 것이고, 다른 것은 지상 생활에 빛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방향을 제시해 주지도 못하는, 오직 초세간적인 구원으로만 향하는 것이다. 그때에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반포하면서 교황은 교회에, 인간과 국가의 공공 생활의 가변적 사건들 가운데서 일종의 “시민권 규약”을 부여했으며, 이것은 그 후에 더욱 강력하게 긍정되었다. 사실, 사회 교시를 가르치고 보급하는 것은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속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부분이다. 그 이유는 이 교시가 사회 생활에서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직접적 결과들을 제시하며, 증거해야 할 구원자 그리스도 안에 정의를 위한 일상 노동과 이와 관련된 투쟁을 두기 때문이다. 그 밖에, 이 교시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투쟁에 있어서, 일치와 평화의 원천이 된다. 이렇게 자신과 반대자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초월적 존엄성을 감소시키지 않고 새로운 조건에 따라 살 수 있으며, 정확한 해결책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백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러한 방향의 효력은 본인에게 “그리스도교 사회 교시”의 체계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현대 세계가 긴급히 요청하고 본인이 여러 번 강조한 “새로운 복음화”는, 그 본질적 요소들 안에 교회의 사회 교시의 선언을 포함해야 하며, 레오 13세 때와 같이, 이데올로기들이 점점 더 불신을 받는 현대의 큰 도전에 응답하는 바른길을 가리키기 위하여 적응해야 한다. 레오 교황이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 밖에서는 “사회 문제”의 해결이 없으며, 오히려 “새로운 것들”은 복음 안에서 진리의 공간과 정확한 윤리적 기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반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

 

6. 자본과 노동 간에 발생한 투쟁을 밝힐 의향이 있었기 때문에 레오 13세는 노동자들의 기본 권리를 긍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레오 교황의 회칙 본문을 읽는 관건은 노동자의 존엄성이며, 이와 같은 이유로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노동의 존엄성이다. “노동한다는 것은 생활의 다양한 요구, 특히 생계 유지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12) 교황은 노동은 ‘인격적인’ 것이라고 긍정했는데, “그 이유는 활동의 힘이 인격 안에 천부적으로 내포되어 있으며, 그 힘을 발휘하고 활용하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13) 이렇게 노동은 각 사람의 소명에 속한다. 실제로 인간은 자기 노동으로써 자신을 표현하며 실현한다. 동시에, 노동은 가정뿐 아니라 공동선과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해서만 국가의 부가 생산된다는 것이 아주 확실하기 때문이다.”14) 이러한 것들을 본인은 회칙 맛노동하는 인간맜에서15) 다시 받아들여 설명했다. 


    다른 중요한 원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사유 재산권의 원리이다.16) 그 회칙에서 이 권리에 할여한 지면이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교황은 사유 재산이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지상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와17) 같은 보완적 차원의 원리를 선언하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다른 편으로, 레오 13세가 주로 생각하는 사유 재산 형태는 확실히 토지 사유 재산 형태이다.18) 그러나 이것은 사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즉 개인과 가정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들의 소유권을 긍정하기 위하여─이 권리의 형태가 어떻게 정해지고 정의되든지─제시된 근거들이 유효하다는 데는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 그러한 권리는, 생산 수단의 집단 소유 재산이 지배하던 체제에서 우리가 목격한 변화에 당면하여 그리고 사유 재산권의 긍정에 기초한 체제들이 지배하는 곳까지 포함해서, 빈곤이 증가하는 추세의 또는 더 정확하게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사유 재산의 장애에 당면하여 다시 한번 긍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지적된 변화와 지속적 빈곤 때문에 더욱 심도 있는 모든 문제의 분석이 전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데, 이것은 차후에 하게 될 것이다.


노동 조합의 필요성

7. 소유권과 밀접한 관계에서, 레오 13세의 회칙은 또한 인간의 고유하고 양도할 수 없는 다른 권리들을 인정한다. 이러한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교황이 할여하는 지면과 부여하는 중요성 때문에, “인간에게 부여된 사적…결사체를 결성할 수 있는 그 권리”, 즉 “자연권”인데, 이것은 또한 고용주들과 노동자들의 결사체 또는 노동자들만의 결사체를19) 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흔히 노동 조합이라고 불리는 노동자 집단의 결성을, 왜 교회가 옹호하고 인정하는지 그 이유가 밝혀진다. 분명히 이데올로기적 편견 때문에 또는 계급적 사고 방식에 양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사한다는 것은 “자연권”이며, 즉 인간에게 내재적인, 따라서 사회의 정치적 인준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자연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없애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국가가 시민들의 단체 결성을 금지한다면 이는 명백히 국가의 존재 자체에 모순을 초래한다.”20)교황이 명시적으로 노동자들에게, 그의 용어를 빌린다면 ‘프롤레타리아’에게 인정하는-이것은 강조되어야 한다-그 권리와 함께, 역시 분명하게 ‘노동 시간의 제한’에 대한 권리, 휴식에 대한 권리, 노동의 형태와 노동 기간에21) 있어서 다르게 대우받아야 할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의 권리가 긍정되었다. 

 

그 외에 노동 시간이나 노동 장소의 공공 위생 조건들의 보장 없이, 또는 취업 지망자들의 연령이나 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고용에 있어서, 정당한 방법이나 적어도 법으로 금지되지 않은 방법에 대하여 역사가 전해주는 것을 생각한다면, 교황의 엄격한 발언이 올바르게 이해된다. “즉, 과중한 노동으로 정신이 무디어지고 육신이 핍진해지도록 노동을 요구한다는 것은”-교황 자신의 표현대로- “정의도 인간성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 관계’가 제대로 효과를 낼 수 있는 계약을 더욱 명확하게 정의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긍정했다. “고용주들과 노동자들이 서로 맺은 모든 협약에는”, “노동으로 소모된 체력에 비례하여” “노동자들에게 정신과 육신의 휴식을 보장하는, 명시적 또는 묵시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과 달리 합의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22)

 


공정한 임금에 대한 권리

8. 계속해서 교황은 인간으로서의 노동자의 다른 권리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공정한 임금의’ 권리인데, 고용주는 합의된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할 바를 다하고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더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합의에”23) 맡겨줄 수 있는 권리로서는 절대로 정의될 수 없다. 따라서 국가는-그 시대에 그렇게 표현했듯이-명시적으로 합의된 것의 이행을 일깨워주는 것 외에 계약의 결정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고용주들과 노동자들 간의 관계에 대한 그러한 관념, 단순히 실용주의적이고 인간의 철저한 이기주의에 젖은 관념은, 개인적인 것이며 필요한 것이 되어야 하는 노동의 양면적 본질에 반대되기 때문에, 회칙에서 엄하게 비판을 받는다. 그 이유는 만일 노동이 어떤 개인적인 것으로서 각자가 자유롭게 사용하는 고유 능력과 활력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 노동은 어떤 필요한 것으로서, 각자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중요한 의무에 의하여 합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교황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생계 유지를 위한 것을 취득할 권리가 나오며, 가난한 이는 노동으로 취득한 임금을 통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24) 

임금은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 유지를 위하여 충분한 것이어야 한다. “만일 노동자가 궁핍 때문에 강요되거나 더 큰 악이 두려워서 더욱 힘든 조건들을 받아들인다면, 또 원하지도 않는데 고용주와 기업주가 부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은 폭력을 당하는 것이며, 이에 정의가 항의하는 것이다.”25) “방종한 자본주의”라고 불리던 것이 발전하던 시대에 쓰여진 이러한 문구들은, 오늘에 와서 동일하게 엄격한 어조로 반복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불행하게 오늘에도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의 노동 문제, 노동 시간, 노동 장소의 위생적 조건과 공정한 임금에 있어서 최소한의 정의가 배제된 노동 계약들의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같은 주제에 대한 국제 선언들과 협정들26) 그리고 여러 나라의 고유한 국내법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따라서 교황은 “국민을 잘 돌봐야 할 공권력”의 “엄격한 직무에” 노동자들의 복지를 보살펴야 할 의무를 부과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의무가 없다면 정의가 유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분배 정의”27)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종교 자유에 대한 권리

 

9. 레오 13세는 그러한 권리들에 역시 노동자들의 조건과 관련된 다른 권리를 추가한다. 그것은 자유롭게 종교적 의무를 수행할 권리이다. 그 중요성 때문에 본인은 그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교황은, 그 당시 거의 모든 이의 생각이 어떤 문제들은 배타적으로 사적 생활에 속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다른 권리와 의무들 중에서 그 권리를 재론한다. 그는 인간이 천상적 선과 하느님 대전에 드려야 할28) 예배를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일 휴식의 필요성을 재확인한다. 명백하게 계명에도 기초를 둔 이러한 권리를 어느 누구에게서도 탈취할 수 없다. “하느님 자신이 대단한 존경심으로 다루는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는 자는 어느 누구도 벌을 면할 수 없다.” 따라서 국가는 노동자 자신에게 그러한 자유의 행사를 인정해야 한다.29) 


    이렇게 명확한 긍정에서, 여러 장엄한 국제 선언들과 협정들과30) 공의회 선언문과 동시에 본인 자신의 가르침의31) 근거가 된, 종교 자유의 권리에 대한 원리의 첫 출발점을 식별하는 이는 오류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오늘날 시행되는 법적 제도와 산업화된 사회의 관습이 실제로 주일 휴식에 대한 기본권을 보장해 주는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국가의 역할

10. 우리 시대에 있어서 유익한 가르침으로 풍부한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국가와 시민들 간의 관계의 인식이다.회칙 [새로운 사태]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두 체제, 즉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비판한다.

 

사유 재산의 권리가 재확인된 시작 부분은 사회주의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반대로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어떤 특별한 부분이 할여되지 않는다. 그러나-이것은 주의를 기울일 만하다-국가의 직무 문제가 다루어질 때32) 비판이 나온다. 국가는 “시민들의 한 부분”을, 즉 부유하고 유복한 이들을 “돌보며” 동시에 다른 “부분”, 의심 없이 사회의 대부분을 이루는 이들을 “등한히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각자에게 속하는 것이 각자에게 귀속되기를 명하는 정의(正義) 자체를 침해한다. “개인의 권리를 옹호함에 있어서, 국가는 특별히 약자들과 빈자들을 보살펴야 한다. 부유한 이들은 자기 방어 능력이 있으므로, 공적인 보호를 받을 필요가 덜하다. 이와는 반대로 빈곤한 대중은 든든한 재산이 없으므로, 국가의 재산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임금 노동자들이 빈곤한 대중에 속하기 때문에, 국가는 이들을 특별한 배려와 관심을 가지고 돌봐야 한다.”33)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에도 세계에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빈곤에 당면해서 그 가치가 있는데, 역시 어떤 확정된 국가관이나 유일한 정치 이론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에서 교황은 모든 정치 제도의 원리를 강화하는데, 이 원리는 개인 시민이 사회 안에서 보호를 덜 받으면, 그만큼 다른 이들의 관심 있는 도움과 보살핌을, 특히 국가의 보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시대가 그렇게 부르듯이 연대성의 원리는, 본인이 회칙 [사회적 관심]을 통하여 그 타당성을 각 나라의 국내 질서와 국제적 질서에서 상기시킨 바 있는,34) 그 연대성의 원리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조직에 대한 그리스도교 정신 자체의 기본 원리 중 하나로서 드러난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의 철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우정”이라는 말로, 레오 13세에 의하여 여러 번 사용되었다.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서 역시 의미 심장한 “사회적 애덕”이라는 말로 불렸으며, 바오로 6세는 사회 문제의 현대적 여러 차원에 따라 확대된 같은 개념으로 “사랑의 문화”35)를 논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

11. 우리 시대의 조건의 조명을 받아 행하는 그 회칙의 재독은, 주님이신 예수 자신의 사랑을 더욱 많이 받은 이들의 계급에 대한, 교회의 항구한 관심과 헌신을 바르게 평가하도록 해준다. 그 문헌의 내용은 교회 안에서 지속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이라고 불리는 것, 그리고 본인 자신이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실천에서 그 편을 먼저 선택하는 특별한 형태”36)라고 정의한 것을 탁월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자들의 문제”에 관한 회칙은, 빈곤한 이들과 동시에 공업화의 새로운 또 흔히 폭력적인 과정이 무수한 사람들을 밀어넣는 그 비참한 조건과 관련된다. 오늘날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유사한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변화 과정이 같은 악을 조장하고 있다. 


    만일 레오 13세가 정의의 규범에 따라 가난한 이들의 입장을 보살피도록 국가에 호소한다면, 그 이유는 국가가 공동선을 다스리고, 모든 생활의 사회적이며 역시 경제적인 분야가 각 영역의 자립성을 존중하면서 그 공동선을 촉진시키는 데 기여하게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레오 교황의 생각은 사회 문제의 모든 해결이 국가 자체로부터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도록 하면 안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는 각 인간, 가정 그리고 사회가 국가에 우선하고, 국가는 인간의 권리나 가정과 사회의 권리를 옹호하며 억압하지 않기 때문에,37) 국가 개입의 필요한 한계와 그 도구적 성격을 자주 강조한다. 


    이러한 반성의 유익성을 아무도 모르지 않는다. 국가의 본질 자체에 내재적인 한계의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는 차후에 가서 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동안에 강조된 점들은, 회칙이 이것들만을 취급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사회 교도권에서 오는 것이며, 사유 재산, 노동, 경제 발전, 국가의 본질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에 대한 건전한 인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다른 문제들은 차후에 현대 상황의 어떤 양상들이 검토될 때 다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벌써 지금부터 목전에 두어야 할 것은, 회칙들과 교회의 사회적이고 보편적인 지도 원리에 진로를 만들어주며, 일정한 방법으로 길을 보여주는 것이 인간의 정확한 개념과 그의 유일한 가치라는 점인데, “인간이`…`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하여 원하신 지상의 유일한 피조물”38)인 한,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안에 자신의 모습과 유사성을 새겨주셨으며(창세 1,26 참조), 회칙이 흔히 강조하듯이 그분은 인간에게 비교할 수 없는 품위를 부여하셨다. 실제로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으로 얻는 권리 외에 인간이 하는 여하한 활동과도 상관없이, 인간 자신의 본질 자체에서 오는 권리들이 있는 것이다.

 

제2장 오늘날의 “새로운 것들”을 향하여 - 레오 13세의 예견


    12. 회칙 「새로운 사태」의 기념은 오늘날의 상황에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불완전할 것이다. 이 문헌은 벌써 그 내용 때문에 특히 이러한 반성의 여지를 보인다. 그 이유로 사건들의 역사적 서술과 거기에서 묘사된 미래의 예측은, 회칙 후에 일어난 사건들에 비추어볼 때, 놀랍게도 정밀하고 정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판단은 1989년 후반과 1990년 전반에 일어난 사건들에 의하여 확인된다. 이 사건들과 그 후에 일어난 근본적 변화들은, 레오 13세의 예견이 어느 정도까지는 적중되거나 그의 후임자들에 의하여 유사하게 포착된, 더욱 악화되는 시대의 징표가 확인되는 그 선행 조건들에 의해서만 설명된다.

실제로 레오 교황은, 사회 철학을 통하여 그 시대에 추구되던, 그리고 다소 조직된 운동처럼 여겨지던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사회 제도의 그 결과적 악을─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모든 관점에서 예견했다. 사회주의가 나중에는 그렇게 되지만, 아직 재력과 권력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강하고 권력 있는 국가 형태로서 존재하지 않을 때, 교황이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비판을 사회주의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에 어쩌면 놀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당시의 그렇게 단순하고 근본적인 “노동자들의 문제”의 해결 방법에 대중이 매혹될 위험을 정밀하게 판단했다. 이것은 근래에 산업화된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처하여 있던, 그 가공할 만한 불의의 상황에 비추어본다면 더욱 자명하다. 


    여기에서 두 가지가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는 그 모든 가혹성에 있어서 남자나 여자나 어린이나 프롤레타리아의 실제 상황을 파악하는 기묘한 명확성이고, 다른 것은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의 입장의 전복을 통하여, 도와주고자 하는 이들에게 사실은 손해를 끼치는 해결책의 악을 이해하는 명료성이다. 이렇게 악의 치유는 더 큰 악으로 나타난다. 레오 13세는 규명되어야 할 그 시대의 사회주의의 본질에서, 즉 철폐되어야 할 사유 재산에서, 문제의 핵심에 도달했다. 그의 말은 주의 깊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러한 악의 치유를 위하여, 사회주의자들은 부자들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면서 사유 재산을 없애야 하며 그 대신 모든 이를 위한 공동 재산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러나 투쟁을 종식시킬 수 없는 그들의 이론은 노동자 계급에 손해를 입히며, 그 밖에도 정당한 소유주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국가의 임무를 변질시키며,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기 때문에 부당하다.”39) 국가 제도를 점령한 이런 종류의 사회주의의 설립으로써 야기된 악을 더 잘 보여줄 수는 없었는데, 이것이 후에 “실제(로 존재한) 사회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근본적 오류


    13. 본인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과 [사회적 관심]에서 말한 것을 목전에 두고 반성을 심화시킨다면, “사회주의”의 근본적 오류는 인간학적 오류라는 것을 추가해야 한다. 실제로 사회주의는 인간을 단순히 사회 유기체의 한 가지 요소와 분자로 생각하여, 각자의 권익이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메커니즘의 작용에 전적으로 예속되게 한다. 동시에, 사회주의는 개인의 그 권익이 선이나 악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선택 없이, 그리고 그의 책임 의무가 최소한 존중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이렇게 인간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일련의 관계에 환원되고, 의지로써 사회 질서를 건설하는, 윤리적 의지의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인간의 개념은 사라진다. 이렇게 인간의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인간 자유의 한계와 조건을 정의하는 법의 결함과 사유 재산의 철폐가 유래한다. 실제로 인간은 “자기의 것”이라고 불릴 수 없도록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자유로운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능력을 빼앗기면, 사회적 메커니즘이나 이것을 통제하는 이들에게 종속된다. 따라서 이러한 것은 인간 존엄성의 인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며, 진정한 인간 공동체의 건설로 이끌어주는 길에 방해가 된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 교의에서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정확한 개념이 나온다. [새로운 사태]와 교회의 모든 사회 교시에 따르면, 인간의 사회성은 결코 국가 안에 흡수되지 않고 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집단들에 이르기까지, 인간 본질에서 유래하며-항상 공동선 내에서-그들 지체의 자유를 누리는 다양한 중간 집단들 안에서 실현된다. 바로 이것을 본인은 “사회의 주체성”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개인의 주체성과 함께 “실제(로 존재한) 사회주의”에 의하여 제거되었다.40) 


    이제 더 나아가, 인간 본질과 사회의 “주체성”의 잘못된 개념이 어디에서 오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주로 무신론으로부터 온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것들을 통하여 부르시는 하느님 자신에게 인간이 응답할 때, 인간은 자신의 초월적 존엄성을 의식한다. 각 개인은 이러한 응답을 해야 하는데, 이 안에서 그는 인간성의 절정에 도달하며, 여하한 사회적 메커니즘이나 집단적 주체도 그것을 대치할 수 없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인간 자신의 기초를 박탈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인간의 책임과 존엄성을 완전히 도외시한 사회 질서가 재건되도록 자극할 것이다. 그 외에, 여기에서 논의되는 무신론은 인간적 현실을 기계론적 관점에서 보는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진정한 위대성에 대한 최고의 평가, 지상 사물에 대한 인간의 초월성, 인간의 마음속에서 선의 충만과 이것을 달성할 무능력 간에 일어나는 모순, 특히 이러한 데서 오는 구원에 대한 열망이 부인된다.

 


무신론에 기초한 계급 투쟁


    14. [새로운 사태]에서 단죄 받은 사회주의의 고유한 활동에 속하는 수단은 무신론자들의 동일한 근원과 근거에서 나온다. 이것은 계급 투쟁의 문제이다. 교황 자신은 물론 어떤 형태의 것이든지 모든 사회적 쟁의를 단죄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회는 사회 집단들간에 필연적인 것처럼 투쟁이 일어나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재빠르게 분별하여 조리 있게 입장을 취해야 한다. 그 외에 회칙 [노동하는 인간]은 쟁의가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41)일 때 그 정당성을 인정했다. 회칙 [사십주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만일 계급 투쟁이 적대감과 서로의 증오를 멀리한다면, 점차적으로 정의의 추구에 기초를 둔 정직한 토의로 변한다.”42) 


    계급 투쟁에서 단죄받는 것은, 투쟁이 윤리적이거나 법적인 동기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거부하며 (따라서 자신의 존엄성을 거부하며), 모든 타협을 거절하며,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공동선을 부분적 선으로 대치하며, 반대하는 모든 것을 없애려고 하는 투쟁의 개념이다. 한마디로 그 시대에 군국주의와 제국주의가 국제 관계에서 행하던 그 “전면 전쟁”에 대한 가르침이, 사회 계급에 대한 쟁론의 이론적 관점에서 재연된다. 여러 나라들간에 추구해야 할 합당한 균형은, 거짓말, 시민들에 대한 테러 행위, 철저한 파괴의 무기들을 (그때에 생각하기 시작한) 사용해서라도 자기 당이 절대적으로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리한 가르침에 의하여 대치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의 계급 투쟁과 군국주의는 동일한 기원, 즉 무신론과 인간 멸시의 근거에서 이성과 법의 원리보다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이다.

 


국가의 의무

15. 회칙 [새로운 사태]는 시민이 국가 안에서 하나의 톱니바퀴 “부속품”처럼 될 때마다 공공 통제의 생산 수단에 반대한다. 동시에 회칙은 경제적 관계를 완전히 국가 영역 밖에 두려고 하는 이론을 역시 단호하게 배격한다. 물론, 국가가 개입하지 말아야 할 고유의 것이 경제 활동에는 당연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경제적 관계들이 전개되는 법률적 조건들을 결정하고, 이렇게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들을 실제로 노예 상태에 환원시키지 않도록,43) 부분들간에 평등을 요청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들을 경제적 자유 안에서 준수할 의무가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 회칙 [새로운 사태]는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요구하는 품위를 노동에 회복시키는 적합한 개혁들을 위한 길을 제시한다. 이러한 개혁들은 특별히 노동자가 실직의 악몽으로부터 보호를 받도록 하기 위하여, 사회와 국가에 책임을 지도록 요청한다. 과거에는 이것이 같은 방향으로 일치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일어났다. 균형 잡힌 성장을 보장해 주는 경제 정책을 통하여 또는 노동자들이 위기의 직업이나 직무로부터 발전하는 분야로 옮겨가도록 실업 보험 그리고 기술과 직업의 재교육을 통하여 일어났다. 


    그 외에 사회와 국가는,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 유지가 적합하게 될 수 있을 만큼, 좀 저축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임금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노동이 좀더 향상되고 생산할 수 있도록, 계속 적응되는 그들의 지식과 능력을 위하여 미온적 노력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시 이것은 특별히 비천한 계급의 노동자들, 이주민들 그리고 사회 변두리에 처하여 있는 이들에 대한 수치스러운 착취가 없어지도록, 아주 적합한 법적 조치와 더불어 꾸준한 감시를 요청한다. 이 점에 있어서 최저 임금과 노동 조건을 교섭하는 노동자들의 노동 조합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끝으로 노동과 휴식의 “인간적” 시간의 존중과, 노동 장소에서 자신의 양심과 존엄성이 모독을 받지 않고 자신의 성격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계약의 진정한 도구로서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성격이 선언되는 “장소”로서 노동 조합의 역할은 확실히 여기에서 재론되는 것이다. 노동 조합은 확실한 노동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며, 또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정말로 인간적으로 기업 생활에 참여하도록 도와준다.44) 


    국가는 이러한 것들을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자기 몫을 해야 하는데, 간접적으로 그리고 보조성의 원리에 따라서는, 많은 고용 기회와 부의 원천을 제공하는 경제적 활동의 자유로운 수행에 유리한 생산 조건들을 만들어줌으로써, 직접적으로 그리고 연대성의 원리에 따라서는, 더욱 비천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동 조건을 결정하는 집단들의 자립성에 일정한 제한을 두고 실직한 노동자가 최소한 생계 유지에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45)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회칙과 이와 결부된 교회의 사회 교도권은 19세기와 20세기를 잇는 시대에 다양하고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더욱더 존중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46) 사회 보장, 연금, 건강과 사고 보험으로 실시된 수많은 개혁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노동자 운동의 활동


    16. 이러한 개혁들은 국가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운동이 큰 역할을 했다. 이 운동은 불의와 손해를 제거하기 위해 윤리적 양심에서 출발하여, 막연한 이데올로기와는 멀리 그러나 노동자들과 노동자들의 일용 필수품과는 가깝게, 노동 조합과 개혁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광범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이 영역에서 노동자 운동의 노력은 노동자 생활의 조건들을 향상시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노력과 합치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이 운동이, 회칙 [새로운 사태]가 반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러나 그 동일한 개혁들은 역시, 인간의 선을 더 존중하는 경제 성장을 지원할 수 있는 연대성의 효과적 수단의 설치와 함께 자율적인 사회 조직의 개방적인 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이다. 여기에서는 조직해야 할 생산 협동 조합, 소비자 협동 조합, 신용 협동 조합, 향상시켜야 할 대중 교육, 직업 교육, 참여해야 할 기업체 생활과 일반 사회 생활의 다양한 형태와 같은 수많은 활동을,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기억해야 한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 위대한 회칙이 인간 마음속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관대함과 능력을 발휘하도록 했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회칙의 예언적 메시지가 그 시대의 사람들에 의하여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큰 불행이 초래되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진정한 자유와 거짓의 자유


    17. 레오 교황의 풍부한 교도권47)을 염두에 두고 그 회칙을 읽어보면,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영역에 있어서 더욱 큰 오류의 결과들이 지적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오류는 자유를 진리에 대한 순종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의 권리를 존중할 의무로부터 분리시키는, 인간 자유에 대한 가르침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경멸에까지 가는 이기주의가 되어, 자기 이익을 무한히 자극하며 어떠한 관계로도 정의에 매이지 않는다.48) 


    바로 이러한 오류가 1914년과 1945년 사이에 유럽과 세계를 황폐하게 만든 전쟁의 연속으로 아주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전쟁들은 군국주의와 과장된 국가주의에서 일어났고, 그와 연결된 전체주의 전쟁을 유발하고, 계급 투쟁에서 일어난 전쟁은 내란 또는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변하였다. 사회적 불의 때문에 국가들을 국제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자극한 그 가혹한 증오와 혐오가 제거되었더라면, 강대국들이 모든 힘을 소모해서 온갖 신성한 인권을 침해하며, 모든 국민과 사회 집단들을 말살하는 전쟁의 황폐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 민족을 기억하게 된다. 그들이 당한 참상은 하느님을 등지는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극악 무도한 광란의 가장 뚜렷한 사례로 여겨진다. 


    그러나 증오와 불의는 인간의 진리에 기초하기보다는49) 스스로 기초가 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정되고 형성될 때, 많은 나라를 지배하며 이들이 행동을 취하도록 만든다. 회칙 [새로운 사태]는 증오를 자극하는 이데올로기를 논박했으며 정의를 통하여 폭력과 원한을 제거할 방도를 제시했다. 그 불행한 사건들의 기억이 모든 사람의 행동, 특히 다른 불의가 새로운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폭력을 찬양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예견되는 우리 시대에, 국민을 다스리는 이들의 행동을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전쟁의 근원

 


    18. 1945년 이후 유럽에서 무기는 조용하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이것을 기억해야 한다─군사적 승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 원인들의 제거와 민족들간의 진정한 화해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유럽과 세계에서는 진정한 평화라기보다는 비전쟁(非戰爭)의 상태가 있었다. 유럽 대륙의 반쪽은 마르크스주의적 독재가 지배했으며, 다른 반쪽은 그러한 위협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많은 사람이 그들 자신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고 질식시키는 제국의 한계 내에 억압적으로 수용되어, 그들의 역사적 기억과 문화의 세속적 근본들이 파괴된다. 폭력적 분할의 결과로써 수없이 많은 이들이 그들의 토지를 포기하도록 강요되어 어디로인가 추방된다. 


    건전하지 못한 군비 경쟁은 각국의 경제 발전과 후진국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필요한 재원을 탕진해 버린다. 인간의 복지에 기여해야 할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발전은 전쟁의 도구로 변했다. 과학과 기술은 점점 더 완성된 파괴적 무기의 생산에 적용되며, 진정한 철학의 퇴폐인 이데올로기에 새로운 전쟁의 정당화를 요청한다. 그리고 전쟁은 예측되고 준비될 뿐 아니라, 현재 세계 여러 곳에서 유혈 사태를 일으키고 있다. 교회의 문헌들과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 고발된50) 진영 또는 제국의 논리는, 제3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논쟁과 불화가 자극되고 확장되도록 하여, 반대자의 제국을 난관에 봉착하도록 한다. 


    무기의 사용으로 논쟁을 해결하려는 극단주의 집단들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지원을 받으며, 물론 전쟁을 위하여 무장되고 훈련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모든 부분들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정당한 권리를 지키려는 이들은 아주 고립되어, 그들의 반대자들의 희생이 된다. “제3세계”의 많은 나라의 군국주의화와, 이들을 괴롭히는 내란들, 테러리즘의 유포 그리고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전쟁을 위하여 사용된 점점 더 야만적인 수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불안정한 평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끝으로 전세계가 인류를 근절할 수 있는 핵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다.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 기술과 과학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 확대된 증오에 최상의 도구를 제공해 준다.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인간들 자신에 의한 인간들의 살해로 끝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이끄는 길을 피하고 다음과 같은 이념을 배격해야 한다. 반대자를 없애려는 투쟁, 경쟁 그리고 전쟁 자체가 역사의 전진과 발전을 가져온다.51) 확실히 이러한 이념을 변경시킬 필요성이 이해된다면, 분명히 “전면 전쟁”과 “계급 투쟁”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재론되어야 한다.

 

전쟁의 결과


    19.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말에, 그러한 발전이 인간의 의식 속에 형성되고 있었다. 특별히 나타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전체주의가 유럽의 반 이상과 세계의 대부분에 확산되는 것이다. 전쟁의 목적이 각자를 위한 자유를 회복시키고, 민족들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것이라고 믿어져오던 것이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한 목적과는 반대로 많은 이를 위해서, 특별히 전쟁 동안에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한 이들을 위해서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렇게 일어난 상황은 다양한 응답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할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된 후, 몇몇 나라에서는 일정한 관점에서 민주 사회를 재건하려는 노력과 시도가 보인다. 이 사회는 사회 정의로 침투되고,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혁명적 잠재력을 공산주의 자체로부터 빼앗는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안정된 통화로 그리고 진정한 화목을 통한 사회 관계에서, 사람들이 자신과 그 가족들을 위하여 더 낫게 노동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하는, 건전하고 안정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는 조건들을 보장하면서, 자유 시장의 메커니즘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동시에 그러한 시도들은 시장의 메커니즘이 인간의 전체 생활을 위한 최후 목적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이 메커니즘을 공공 통제에 맡겨 지상 재화의 공동 목적의 원리가 효과적으로 부과되기를 원한다. 
   

더욱 흔한 고용 기회, 노동을 제공하는 사회 보장의 견고한 체제, 효과적으로 활동하는 노동 조합의 자유로운 결사, 실업에 대한 보장, 사회 생활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도구는 여기에서 노동 자체를 그 “상품” 조건으로부터 빼내어 그 품위를 보장받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가 침투할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하여, 치밀하게 사회 전체를 감시하는 “국가 안보” 체제로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다른 사회적 세력과 운동이 있다. 그들은 국가의 권력을 증가시키고 축적시킴으로써 공산주의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근거가 되는 인간의 자유와 선이 제거될 위험이 있다. 


    또 다른 설명과 관습은, 단순한 물질주의의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보다 우세하다고 생각하며, 양쪽이 똑같이 정신적 선을 배제한다면, 자유 시장의 사회가 마르크스주의보다 욕구들을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복지 사회 또는 소비 사회 안에 남아 있다. 실제로 그러한 유형의 사회가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원리가 새롭게 향상된 사회를 창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다른 편으로는 윤리와 법과 인간 문화와 종교의 자립적 실존과 가치를 부정하고, 인간을 경제적 분야와 물질적 욕구의 충족에 환원시킨다는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일치한다.

 

탈식민주의


    20. 같은 시기에 광범위한 “탈식민화” 과정이 시작되는데, 많은 나라가 독립과 자기 운명을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를 얻거나 다시 얻는다. 그러나 이렇게 국가의 주권을 되찾았지만, 곧 이어서 이 나라들은 안정되어야 할 진정한 독립을 위해 초보 단계를 걷기 시작한다. 실은 경제의 결정적 영역들은 다른 나라의 발전에 장기적으로 투신하려고 하지 않는 외국인 회사들의 수중에 아직도 남아 있다. 국가의 경계 내에서는 이렇게 정치 생활 자체가 외국 권력들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으며, 아직도 진정한 국가 공동체로 통합되지 않은 부족들이 있으며 또 살고 있다. 그 외에, 청렴하고 정직하게 국가 기구를 운영할 수 있는 유능한 공무원들의 수가 요청되며, 효과적으로 경제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전문 인력 또한 필요하다. 


    민족들의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이 민족과 국가의 건설을 위하여 일종의 지름길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생각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부터 사회주의의 다양한 형태들이 각 나라의 고유한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해서 합류되는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와 함께 조국 해방의 정당한 요청들, 국가주의와 군국주의의 열망,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교시와 항상 부합하지 않는 대중적 전통으로부터 오는 원리들, 그리고 끝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개념들이 혼합된다.

국제 연합의 조직


    21.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 대전 후 그 공포에 대한 반응으로 여러 국제 문헌52)과 사도좌가 항상 기여해 온, 새로운 “만민법”-확실히 그렇게 부를 수 있다-의 작성 자체에서 드디어 인정되고 수용된 인간 권리에 대한 더욱 생생한 관심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 문제의 중심을 국가 수준으로부터 국제 수준으로 옮겨놓은, 세계 여러 지역간에 존재하는 심각한 불균형이 수정되도록 무엇인가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이해되었기 때문에, 각 사람의 권리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권리의 의식이 성장했다.53) 


   이러한 발전을 만족하게 지적하면서도, 원조 정책의 총괄적 검토는 그 발전에 있어서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 없다. 그 외에 국제 연합은 전쟁이 아닌 국제 분쟁의 해결을 위한 적합한 수단을 설립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것이 국제 공동체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가장 중대한 문제로 보이는 것이다.

 

제3장 1989년  - 교회의 역할


    22. 지금까지 서술하고, 본인의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도 이미 충분히 설명한 세계적 상황으로부터 누가 출발한다면, 최근 몇 년 동안에 일어난, 예기치 못한 그러나 커다란 희망으로 가득 찬 사건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 사건들의 절정은 1989년 중부/동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이것들은 더욱 광범위한 시간적 간격과 지리적 공간을 포함한다. 1980년부터 1990년까지,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독재와 압제의 정권들이 무너진다. 다른 경우에 있어서, 더 많은 참여를 하고 더 많은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적 구조의 형태로의, 어려우나 생산적인 전이가 시작된다. 교회는 자신의 직무로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고 향상시키기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그리고 결정적이기도 한 공헌을 했다. 다양한 집단들의 합류된 이데올로기가 인간에게 공통된 존엄성의 의미를 흐리게 하는 곳,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철저하게 영향을 받는 그 곳에서 교회는, 각 사람은 그의 내적 확신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의 모습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대우와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분명하고 강력하게 가르쳤다. 흔히 이러한 주장에 대다수 국민은 동의했으며,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투쟁 방법과 정치적 문제 해결의 근거를 찾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형태들이 나왔는데, 여기에서 불의와 증오의 고통스러운 연속 그리고 비참한 경제 상태와 사회의 심각한 투쟁으로 얽매인,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구조들의 불안한 은폐 속에서 현실들이 변하리라는 희망이 비춘다. 그러므로 온 교회와 더불어 본인은 많은 목자들, 모든 공동체들, 그리스도인 개인들 그리고 다른 선의의 사람들이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보여준, 때로는 영웅적 증거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동시에 본인은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하여, 모든 이들의 노력을 북돋워주시기를 간청하는 바이다. 그러한 의무는 이 나라들의 국민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것이다. 그 민족들이 당면한 복잡한 문제들이 반대자를 없애려는 투쟁과 전쟁의 힘을 배제하고, 대화와 연대성을 통하여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압제 정권의 몰락


  23. 압제 정권들의 몰락의 여러 가지 요인 중 어떤 것들은 여기에서 특별히 제시될 만한 것이다. 확실히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한 결정적 요인은 노동 권리의 침해이다. 노동자들의 정부이며 독재라고 감히 선언하는, 그들 정부의 결정적 위기는 폴란드에서 연대성의 이름으로 일어난 거대한 운동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망각하면 안될 것이다. 노동자 군중 자신이 그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이데올로기가 효력을 상실토록 하며-노동과 억압의 확고한 그리고 어려운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서-교회의 사회 교시의 가르침과 원리들을 되찾았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재발견했다.


    그 다음에는 이러한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거의 도처에서 진리와 정의의 무기만을 사용하는 전적으로 평화적 투쟁으로, 그러한 “블록”이나 제국의 멸망에 도달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원리는 사회적 모순들을 극단으로 밀고 감으로써, 이것들이 폭력적 투쟁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제거한 투쟁들은 확고 부동하게 토론, 대화 그리고 진리의 증거의 모든 방법을 끈질기게 시도하며, 반대자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인간에게 공통된 존엄성의 의미를 깨우쳐주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결과된 그리고 얄타 협정에 의하여 인정된, 전유럽의 질서는 다른 전쟁에 의해서만 흔들릴 수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항상 폭력의 충동에 따르기를 거절하면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진리를 증거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을 발견한 사람들의 비폭력적 행동과 역할이 그 질서를 극복하였다. 진리가 반대자의 무장을 해제시킨 것이다. 폭력 자체는 거짓을 정당한 것으로 옹호하고, 비록 거짓임에도 다른 이의 권리를 보호하고 다른 이가 받는 위협에 대해54) 책임을 지는 척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본인은 어려운 때에 사람들의 마음을 견고케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러한 예가 다른 곳과 다른 환경에서도 유용할 수 있도록 간청한다. 사람들은 모든 폭력을 배제하고 정의를 위하여 투쟁하며, 내부적 분쟁에서의 계급 투쟁과 국제적 분쟁에서의 전쟁을 배격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몰락의 원


    24. 확실히 이러한 위기의 다른 요소는 단순히 기술적 장애물로뿐 아니라 자유로운 주도, 사유 재산 그리고 경제 분야에 있어서의 자유에 대한 인권 침해의 결과로 생각해야 할, 모든 경제 체제의 비능률성이다. 그것에는 인간 문화와 조국의 차원이 추가된다. 인간은 경제적 평가의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 없으며, 단순히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에 따라서 정의될 수 없다. 만일 인간이 그의 언어, 역사 그리고 실존의 주요 사건들 안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로서 출생, 사랑, 노동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문화권 내에 놓여질 때에, 그는 더욱 완전히 이해된다. 모든 것 중 가장 위대한 신비, 즉 하느님의 신비 앞에 서 있는 인간이 모든 문화의 핵심을 차지한다. 모든 나라의 인간 문화의 형태들은 결국 각 사람의 실존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큼 여러 가지이다. 이러한 문제가 배제되면 민족들의 문화와 윤리 생활은 붕괴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 노동을 위한 투쟁은, 인간 정신 문화와 민족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과 저절로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새로움의 진정한 원인은 무신론에 의하여 야기된 영적 공허인데, 이것이 젊은 세대들을 올바른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로 방치했으며, 이들이 불가항력적 열의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동안, 각 사람의 마음에 있는 진리와 선과 생명의 갈증에 자연적으로 적합한 응답처럼, 자기 민족들의 문화의 종교적 뿌리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을 다시 발견하도록 그들을 자극했다. 이러한 추구는 하느님에게 충실히 남아 있었던 이들의 증거로써 재확인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의 필요성을 근절할 것이라고 약속했으나, 그 결과는 마음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선과 악의 투쟁

   

 25. 1989년의 사건들은, 윤리적 원리에 의하여 묶이지 않겠다는 입장이 분명한 반대자들에 대하여, 교섭할 굳은 의지와 복음 정신의 다행한 결과의 가르침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 사건들은 어떤 정치적 현실주의의 이름으로 정치 분야에서 권리와 윤리를 추방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물론 1989년의 결과로 이끌어간 투쟁은 명철한 생각, 절제, 고통 그리고 희생을 요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기도에서 나온 투쟁이며, 자신의 손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잡고 계신, 역사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 없이는 그런 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당하는 인간이 권리와 자유를 위한 자신의 고통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결합시킬 수 있다면, 인간은 평화의 기적을 이룩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 악에 떨어지는 비열한 마음과 다른 편으로 악을 쳐이길 수 있다고 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그 악을 증가시키는 폭력간의 좁은 길을 흔히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각자의 자유가 행사되어야 하는, 그 무수한 상황들을 간과해 버릴 수는 없다. 분명히 그 상황들은 자유에 영향을 미치지만, 자유를 결정하지는 못한다. 그것들이 자유의 행사를 더 어렵게 또는 덜 어렵게 만들지만, 자유를 파괴할 수는 없다. 자유를 위해 있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는 것은 윤리적 관점에서 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유가 정당하게 행사되는 영역이 독단적으로 축소되거나 없어지도록 사회가 조직될 때마다, 사회 생활은 점차적으로 그 조직이 파괴되며 쇠약해지는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그 외에 자유를 위해 창조된 인간은 자신 안에 계속해서 그를 악으로 이끌며 그로 하여금 구원이 필요하도록 하는 원죄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이 교의는 그리스도교 계시의 필수적 부분일 뿐 아니라, 인간적 현실을 이해하도록 많이 도와주는 한, 큰 해석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선을 향하고 있으나, 악을 행할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의 직접적 이익을 초월할 수 있으나, 동시에 그것에 매여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더 많이 고려할수록, 개인들의 이익을 전체 사회의 선에 선행시키기를 거부하며, 오히려 풍옥한 조화를 찾을수록 사회 질서는 그만큼 안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이익이 강제로 억압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 대신 자유로운 주도와 창의력의 원천을 말라붙게 하는, 견디기 어려운 관료주의 통제 체제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악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절대적 사회 조직의 극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실현을 위해서는 역시 모든 수단을, 거짓말과 폭력까지도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정치는 이 세계에서 낙원을 짓는다고 착각을 일으키는 “세속적 종교”가 된다. 그러나 고유한 자립성과 법을 가지고 있는 어떠한 정치적 사회도 하느님 나라와 혼동될 수는 없을 것이다.55) 밀과 가라지에 대한 복음의 비유(마태 13,24-30. 36-43 참조)는 하느님만이 악의 동료들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동료들을 구분할 수 있으며, 이러한 심판은 종말에 올 것이라는 것을 잘 가르쳐주고 있다. 만일 누가 감히 지금부터 미리 심판을 한다면, 인간은 하느님을 대신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인내에 반대하는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승리는 한번이자 영원히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은 악의 유혹과 세력에 반대하는 투쟁을 요청한다. 역사의 종말에나 주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확립(2베드 3,13; 묵시 21,1 참조)과 더불어, 최후 심판을 하기 위하여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마태 25,31 참조). 그러나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선과 악의 투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계속된다. 

    성서가 하느님 나라의 종말적 운명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그 이름이 지적하듯이-모든 불완전성과 그 일시적인 것과 함께 실제로 시간의 상태에 속하는 현세 사회들의 생활에도 자극을 준다. 은총의 능력이 인간 사회의 질서에 침투하고 그 질서에 생기를 줄 때,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것이 아니면서도 세상에 있으면서 그 질서를 비춰준다. 이렇게 인간에게 합당한 어떤 사회의 요청들이 더 잘 파악되고, 오류들이 수정되고, 인간 현실들의 복음적 활성화의 봉사에 그리스도인들, 특히 평신도들이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부름을 받았다.56)

 


교회와 노동 운동


    26. 1989년의 사건들은 주로 중부·동부 유럽 나라들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모든 인류 가족과 관련되는 좋고 나쁜 결과들이 거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사건들은 보편적 중요성과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 결과들은 기계적이거나 운명적인 자연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획에 협조하도록, 인간들의 자유에 제공된 기회들이다. 그 첫번째 결과는 몇몇 나라에서 사방에 확산된 불의의 상황에 대한, 윤리적이고 명시적으로는 그리스도교적인 성격의 어떤 반대 충격으로 생겨난, 교회와 노동자들의 운동 간의 만남이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노동자들의 운동은, 프롤레타리아가 압제에 반대하여 효과적으로 투쟁하기 위해서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이고 경제적인 이론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지배하에 떨어졌다. 


    마르크스주의의 붕괴 자체에서, 교회의 사회 교시에 따라57) 정의와 인간 노동의 존엄성 인정의 요청을 선언하는, 노동자들의 양심의 자발적 표현들이 다시 나타났다. 노동자들의 운동은 인간을 해방하고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노동자들과 선의의 사람들의 광범위한 대중 집단으로 변한다. 그 운동은 오늘날 여러 나라에 확산되고 있으나, 가톨릭 교회에 반대하기는커녕 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교회를 바라본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마르크스주의가 과격하게 남용하면서 근거를 확보하던, 그 불의와 억압의 상황을 세계로부터 제거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해방의 새롭고 진정한 이론과 실천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교회는 그 사회 교도권,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된 인간에 대한 가르침뿐 아니라, 인간들의 주변화와 고통이 극복되도록 확고한 보조적 역할을 제공한다.


    최근에 와서 억압당하는 이들 측에 서려고 하며, 역사의 과정으로부터 단절되지 않으려고 하는 열의는, 많은 신앙인들로 하여금 다양한 방법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그리스도교 간의 불가능한 타협을 찾게 하였다. 현 시대는 그러한 노력에 있어서 낡은 것이 다 추월될 때, 오히려 인간의 전체적 해방을58) 바라보는 진정한 신학의 긍정적 가치가 다시 선언되도록 권고한다. 끝으로, 이러한 판단의 기준에서 본 1989년의 사건들은, 중부·동부 유럽의 나라들이 그렇게 했듯이, 자신들의 발전의 길을 찾는 제3세계 국가들을 위해서 중요성을 보여준다.


민족들의 상호 의존


    27. 두번째 결과는 유럽 민족들 자신과 관련된다.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와 그 전에도 개인 인간들에게, 사회에, 지역에 그리고 민족들에게 많은 불의가 행해졌다. 많은 증오와 원한이 축적되었다. 만일 과거에 모든 노력을 하도록 격려한 그 윤리적 투쟁과 진리를 증거할 의식적 노력이 결여된다면, 독재가 몰락해도 그 증오와 원한은 다시 살아나고, 심각한 투쟁과 고통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증오와 폭력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특별히 정의를 위하여 투쟁하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평화와 용서의 정신이 모든 이들에게서 성장하기를 바라고 싶다.


    국가들간에 야기되는 분쟁들에 있어서, 적당한 조정을 위해서 개입하는 국제적 조직을 설립하거나 강화하기 위한 어떤 확고한 계획이 필요한데, 이렇게 각 나라는 자기 고유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른 나라들의 권리와의 합의와 평화적 타협에 도달하도록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공동 문화와 오랜 세기의 역사적 관계로 밀접하게 맺어진 유럽의 나라들을 위하여 특별히 필요하다. 공산주의를 포기한 나라들이 윤리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재건되기 위해서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기본적인 경제적 관계가 뒤틀렸고, 성실, 신뢰, 근면한 노력과 같은 경제적 분야와 결부되는 기본적 덕이 손상을 입었다. 오랫동안 궁핍 중에 방치되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정당한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기 위한 어떤 복지를 위하여, 그들의 정부에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를 요청하기 때문에, 인내력 있는 물질적이고 윤리적인 재건이 요청된다.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은 지구를 서로 대립하고 시기로 경쟁하는 폐쇄된 진영으로 분열된 세계 구조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역시 민족들간의 상호 의존성의 진리 자체를 밝혀주는 동시에 인간 노동은 자연적으로 사람들의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지향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조명해 주었다. 평화와 번영은 온 인류의 고유한 선이므로, 만일 그것이 다른 민족과 나라에 손상을 입히면서 취득되고 보유된다면, 그들의 권리가 침해되거나 이것이 번영의 원천으로부터 제외되기 때문에, 정당하게 그리고 계속해서 오랫동안 그 선을 향유할 수 없다.


동부 유럽과 제3세계를 위한 원조


    28. 유럽의 몇몇 나라들에는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전후’(戰後) 시대가 비로소 시작되고 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집단화”되어 있던 경제 체제들의 근본적인 조직 개편은, 서구 대륙의 나라들이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재건되기 위하여 감수했던 희생과 손해에 비교할 만한 어려움과 희생을 안고 있다. 이러한 난관에서, 전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정부의 통제를 받던 나라들이 다른 나라들의 연대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타 나라들의 도움 없이는 달성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기 위한 합리적 가능성이 주어져야 한다. 그 외의 어려움과 부족의 현 상황은, 전에 공산주의였던 나라들이 흔히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었던 역사적 과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들은 자기 자유 의사는 아니고 자기가 범한 오류 때문도 아니며, 강제로 부과된 비참한 역사적 사건들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 처하여 있으며, 이렇게 그 나라들이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길을 더 이상 걷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는다. 


    그 사건들에 참여했고, 따라서 그 책임을 지는 다른 나라들, 특히 유럽 국가들의 원조는 갚아야 할 정의에 해당되는 것이다. 만일 과거로부터 일어나는 다양한 성격의 분쟁들이 경제적 무질서, 정신적 불안, 그리고 실망의 상태로 인하여 더 격심해지면, 유럽은 평화롭게 살 수 없기 때문에 그 원조는 유럽의 이익과 복지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성으로 인해, 흔히 더 심각한 궁핍과 빈곤의 상황에 시달리는 “제3세계” 국가들을 도와주고 지원하려는 계획과 노력들이 늦추어져서는 안된다.59) 먼저 우선적인 것들과 복지의 등급을 규명하고, 경제적 성장과 공동 발전의 목적을 향하여 온 세계가 필요로 하는, 모든 풍부한 재원을 동원할 특별한 노력이 요청된다. 동서간의 분쟁에서 실시된 군비가 철폐되면 무한한 재원이 처분 가능하게 될 것이다. 무기 거래를 반대하는 조치를 취하면서,60) 만일 일반 전쟁 대신 쟁의를 해결하는 전적으로 믿을 만한 협정이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제3세계 국가들에서 군비를 조정하거나 감축할 원칙이 효력을 발생한다면, 그 재원은 더욱더 풍부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이들-개인으로서 그리고 민족으로서-을 어떤 짐으로, 그리고 다른 이들이 생산한 것을 소비하려는 배은 망덕하는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사고 방식은 버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모든 이를 위하여 더 의로우며 동시에 번영하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물질 재화의 용익권과 자신의 노동 능력을 유용한 결실을 위해 제공할 권리를 주장한다. 가난한 이들의 향상은 모든 사람들의 윤리적이고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발전을 위한 큰 기회가 된다.

 


전인적 발전


    29. 끝으로 발전은 다만 경제적 이유에서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인간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61)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 더욱더 부유한 나라들이 즐기는 정도의 번영의 수준에 모든 민족들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연대적 노동에서 더욱 품위 있는 삶이 이룩되고, 각 사람의 창조적 열의가 실제로 향상되며 자신의 소명에 응답할, 따라서 그 안에 감춰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그의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발전의 정상에는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인식하고, 이 인식에 따라 살 권리와 의무의 수행이 있다.62) 전체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하에서, 이성에 대한 폭력 지배의 원칙은 극단으로까지 이끌어졌다. 인간은 이성의 힘이나 자유의 행사로 달성하지 못하고 강제로 부과된, 현실의 개념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어 있다. 따라서 이 원리는 전도되어야 하며, 자연적인 그리고 계시된 진리에만 매이는 인간 양심의 권리가 전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권리가 인정될 때 진정으로 자유로운 모든 정치적 질서의 기본 권리가 존재하는 것이다.63) 따라서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원리를 재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1) 전체주의와 권위주의의 구형태들은 아직 완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어서 그것들이 되살아날 위험이 있으며, 모든 나라간의 협동과 연대에서 새로운 노력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2) 선진국에서는, 인간 실존의 진정한 가치들의 질서가 인정되고 존중되기가 어렵도록 자연적 본능과 돌발적인 욕정을 자극하면서, 어떤 때는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한 가치들의 과도한 선전과 선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3) 어떤 나라에서는, 은밀히 또는 공개적으로 대다수 서민들과는 다른 종교를 가진 시민들에게는 시민적이고 종교적인 완전 권리 행사를 부인하며, 그들이 문화적 토론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고, 복음을 설교할 교회의 권리와 그리스도에게 회개하기 위하여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종교적 근본주의의 새로운 형태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진정한 이름의 발전도 진리를 인식하고 이 진리에 따라 살, 자연적이고 기본적인 권리 자체가 존중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자연적 권리에 인간의 진정한 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받아들일 권리가 그 실행과 탐구로서 연결된다.64)


제4장 사유 재산과 물질적 재화의 보편적 목적

사유 재산권과 그 한계


    30. 회칙 「새로운 사태」에서, 레오 13세는 그 당시의 사회주의에 반대하여 다양한 논증으로 사유 재산권의 자연적 성격을 단호하게 긍정했다.65) 인간의 자립과 발전을 위하여 대단히 필요한 이 권리는,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에 의하여 항상 옹호되었다. 교회는 또한 재화의 소유를 절대적 권리가 아니라, 인권으로서의 본질 안에 그 한계가 포함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교황은 사유 재산권을 선언하면서, 자유에 맡겨진 재화의 “사용”은 창조된 재화의 그 본래의 공동 목적과 또한 복음에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종속한다고 역시 명확하게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부유한 이들은 경고를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협에 떨어야 하며… 그들의 재화의 사용에 대하여 심판관이신 하느님께 가장 엄격한 셈을 바쳐야 한다.” 그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를 인용하여 첨가했다. “재화의 사용이 어떠해야 하느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교회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인간은 물질적 재화를 자신의 것으로뿐 아니라, 공동의 것으로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법과 판단에 그리스도의 법과 판단이 선행하기 때문이다.”66) 


    레오 13세의 후임자들은 다음의 이중적 긍정을 반복했다. 사유 재산은 필요하다. 따라서 가하며 동시에 제한되어 있다.67)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확고할 만한 전통적 교의를 다음과 같이 주의 깊게 제안했다. “누구나 이 재화를 사용함에 있어서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외적 사물을 사유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공유물로도 여겨야 한다. 즉, 자신에게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유익을 줄 수 있도록 사용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서 계속한다. “사유 재산이나 외적 재화에 대한 일정한 지배권은 모든 개인과 가정의 자립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생활권을 제공하는 것이며 인간 자유의 연장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사유 재산 자체는 공동 목적에 바탕을 둔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68) 본인은 같은 교시를 우선 푸에블라에서 개최된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제3차 총회 연설에서, 그 다음에는 회칙 맛노동하는 인간맜과 맛사회적 관심맜에서 반복했다.69)


지상 재화의 보편적 목적


    31. 소유 재산권과 재화의 공동 목적에 대한 가르침을 다시 읽을 때,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며, 그의 권리의 대상인 재화의 기원에 대하여 물어볼 수 있다.

 

선한 모든 것들의 제일의 기원은 땅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땅을 주어 자신의 노동으로 땅을 지배하고 그 결실을 사용하도록 하신 하느님 자신의 행위이다(창세 1,28-29 참조).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땅을 주시어 아무도 제외되거나 특권을 누리지 않고 그 모든 성원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하셨다. 여기에서 지상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근거가 발견된다. 그런데 땅은 결실을 가져오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생계 유지를 위한 하느님의 첫번째 선물이다. 그러나 땅은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인간의 특별한 응답 없이, 즉 노동 없이 결실을 가져오지 못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신의 지성과 자유를 사용하여 땅을 지배하고 땅을 자신의 합당한 거처로 만든다. 이러한 양식으로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취득한, 땅의 그 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여기에 사유 재산의 기원이 있다. 물론 인간은 다른 이들이 하느님의 선물에서 그들의 부분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오히려 반대로 그는 온 땅을 함께 지배하기 위하여 다른 이들과 함께 협동해야 한다. 


    역사 안에서는 모든 인간 사회의 시초에 항상 노동과 땅, 이 두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그들간에 항상 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는 땅의 자연적 결실성이 나타났고, 이것은 실제로 부의 주요 부분이었으며, 따라서 노동은 결실성의 보조였고 조역이었다. 우리 시대에는 인간 노동이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부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 역할이 점점 더 중요시된다. 그 외에 각 사람의 노동은, 그 자체로써 다른 사람들의 노동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특히 오늘날에 노동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노동하는 것이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노동하는 것이며, 어떤 이를 위하여 어떤 것을 하는 것이다. 인간이 땅의 생산 능력을 인식하기 위하여, 그리고 노동하는 목적이 되는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알아듣는 데 총명할수록 그만큼 노동은 풍옥하고 생산적이다.


기술과 지식


    32. 그러나 이 시대에는 땅보다 덜 중요하지 않은,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 다른 종류의 소유 재산이 있다. 이 소유 재산은 지식, 기술적 숙련, 모든 과학의 소유이다. 자연적 재원의 소유보다는 그러한 종류의 소유에 산업화된 나라들의 부가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위에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노동한다고, 점차적으로 넓어지는 범위와 세계까지도 포함하는 “사회적 노동”에 참여한다고 했다. 누가 자신이 사용할 것 외에 어떤 것을 생산한다면, 자유로운 교섭을 통한 공동 협의로 결정된 정당한 값을 치르고 사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욕구와 생산적이며 이들의 욕구를 더욱 적합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요소들의 조화를 적당한 때에 분명히 인식할 능력 자체는, 오늘의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른 또 하나의 부의 원천이다. 게다가 많은 재화가 한 사람의 활동으로 효과적으로 생산될 수 없으며, 많은 이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같은 노동으로 협력하기를 요청한다. 이러한 노력을 조직하고, 시간을 계획하며, 받아들이는 것 모두가 오늘의 사회 안에서 부의 결실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렇게 질서 정연하고 생산적인 인간 노동의 역할, 그리고 노동의 주요한 부분처럼 주도적이고 기업적인 능력의 역할은 더욱 자명하고 결정적인 것이 된다.70) 


    그리스도교 신앙이 중단 없이 긍정해 온, 인간에 대한 진리를 조명하는 이 과정을 주의 깊게 그리고 성실하게 검토해야 한다. 인간의 실제 중요한 재원은 땅과 함께 인간 자신이다. 그의 지성은 그로 하여금 땅의 생산적 능력, 그리고 인간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많은 형태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연대적 협동으로 잘 조정된 그의 노동은, 노동 공동체들이 더욱 넓게 그리고 인간의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신뢰받을 만하게 형성되도록 한다. 이러한 과정에는 중요한 덕들이 포함되는데, 근면, 열의, 정당하게 받아들여야 할 위험에 있어서의 조심성, 인간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권위와 충실, 기업의 공동 노동을 위하여 그리고 일어날 수 있는 운명의 타격에 대처하기 위하여, 어렵고 힘들기는 하지만 필요한 결정들을 수행하는 용기이다.


    오늘날의 기업 경제는 다른 여러 분야와 같이, 경제 분야에서 표현되는 인간 자유가 그 기초를 이루는 유익한 양상들을 띠고 있다. 실은 경제가 인간 활동의 여러 가지 형태의 한 부분이며, 다른 어떤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 분야에서도 책임 있게 자유를 사용할 의무가 있듯이, 자유의 권리가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와, 최근일지라도 과거 사회의 경향들은 서로가 독특하게 다르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전에는 생산의 결정적 요인이 땅이었다면, 그 후에는 기계와 생산 수단의 총체로서의 화폐의 자본이고, 이제는 그 주요인이 점점 더 인간 자신이 된다. 즉, 인식과 학문을 통해 나타나는 인식 능력, 연대적 의지를 조직할 능력, 다른 이의 욕구를 이해하고 그것을 충족시킬 능력이다.


주변화된 제3세계


    33. 그러나 이러한 과정과 결부된 위험이나 폐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많은 사람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생산 체제에, 확실하며 인간적으로 품위 있는 방법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들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게 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증진시켜 줄 수 있는 기초 지식을 갖출 수가 없다. 또한 이들은 전적으로 착취당하고 있거나 아니면 심각하게 주변화되어 있으며, 경제 발전도 이를테면 그들의 머리 위에서만 동떨어지게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오로지 생존에만 급급했던 구경제의 이미 좁혀진 영역이 완전히 줄어들고 마는 것이다. 전에는 전통적 조직 형태로 대처하여 왔으나, 새로운 방법으로 생산되고 새로운 요청에 제대로 부응하는 상품들의 경쟁에 맞설 수 없는, 그러한 사람들은 결코 이룰 수 없는 눈부신 부요의 과시에 현혹되어, 동시에 빈곤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제3세계의 도시들로 모여들고 있다. 거기서 그들은 흔히 문화의 뿌리가 뽑힌 채 가혹한 유랑 상황에 빠져들어, 전혀 다른 사람들과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존엄성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때는 인간 존엄성에 반대되는 강압적인 인구 통제로 그들을 역사로부터 제거하려는 시도까지도 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완전히 주변화되지는 않았어도 필요한 것을 위한 투쟁이 가장 중요시되는, 초기 자본주의 법칙이 산업화 초기 단계의 지극히 암울한 시대의 냉혹성 못지 않은 “잔인성”으로 성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살고 있다. 다른 경우에는 땅이 아직은 경제 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으며, 땅을 경작하는 이들은 그 소유에서 제외되면 반노예 상태로 떨어진다.71) 이러한 경우에는 회칙 [새로운 사태] 당시와 같이 아직도 비인간적 착취를 논할 수 있다. 더욱 문화가 발달한 사회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물의 지배와 더불어 인간적 폐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는 물질적 재화의 부족에, 그들을 굴욕적인 예속으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지식과 교육의 결핍이 추가된다. 


    불행하게도 “제3세계”의 대다수 주민들은 아직도 그러한 상황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제3세계”를 단순히 지리적 의미에서만 이해하면 안된다. 이러한 세계의 어떤 지역과 사회 분야에서는 물질적 재원보다는 “인간적 자원”의 존중에 기반을 둔 발전 계획이 수립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시장으로부터 고립해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발전은 그 고유한 능력에 대한 희망에 의존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최근의 경험은, 국제적 수준에서 상호간의 일반적 교역의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나라들은 번영했지만, 고립된 나라들은 반대로 침체와 불경기에 빠졌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가장 큰 문제는, 자연 자원을 남용하는 일방적인 시장 원리가 아니라, 인간적 자원의 존중에 기초한, 국제 시장에 대한 공정한 접근의 확보일 것이다.72) 


    그러나 “제3세계”의 전형적 양상들은, 생산과 소비 양식의 지속적 변화가 이미 획득한 지식과 익숙한 직업의 품위를 감소시키며, 이렇게 재훈련과 재교육의 지속적 노력을 요청하는 선진국에서 나타난다. 시대의 추세에 뒤지는 이들은 쉽게 주변화될 수 있는데, 이들은 연로한 이들, 사회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제4세계”라고도 불리는 약소한 이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의 입장도 결코 편안하지 않다.

 


시장 경제


    34. 국제 관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개별적 국가들에게 있어서 자유 시장은 재원을 배치하고 다행하게도 욕구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지불 능력이 있는”, 구매력을 가진 욕구에 대해서만 그리고 “시장에 판매될 수 있는”, 정당한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재원에 대해서만 그렇다. 그러나 시장으로 충족되지 않는 인간 욕구들이 있다. 인간의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채 남아 있지 않고 그 결핍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멸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사랑과 정의의 엄격한 의무이다. 그 외에 궁핍한 사람들이 지식을 얻고, 상호 관계를 맺고 자신들의 재원과 능력들의 힘을 증가할 수 있는 재질과 적성을 발전시키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동등한 상품들의 교환 논리에 앞서 그리고 정의의 고유한 종류들의 논리에 앞서, 그 존엄성을 근거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귀속하는 어떤 것이 있다. 이렇게 귀속하는 어떤 것은 존속하면서 실지로 온 인류의 공동선으로 이끌어갈 가능성을 요청한다. 


    인간의 노동과 인간 자신이 단순한 상품이 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하여, 회칙 [새로운 사태]가 지적한 목표들 자체가 “제3세계”의 맥락에서 전적으로 유효하게 남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아직도 달성해야 할 목표로 남아 있다: 가정의 생활을 위한 충분한 임금, 연로와 실직에 대한 사회 보장, 노동 조건들의 적합한 규제.

 


이윤의 역할과 한계


    35. 더욱 완전하고 품위 있게 그들의 국가 생활에 참여하고 그 발전 과정을 돕기 위하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그들의 주관적 성격을 존중하며, 동시에 문화와 관련된 가장 본질적인 임무를 수행케 하는 노동자들의 노동 조합과 다른 결사체들을 위하여, 정의의 이름으로 광범위하고 풍부한 열의와 투쟁의 분야가 열린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 노동의 자유로운 주관적 성격에73) 비추어 볼 때, 자본, 생산 수단과 토지 소유의 절대적 지배를 확보하려는 방법으로서 이해되는 경제 체제에 반대하여, 정당하게 투쟁을 논할 수 있다. 이러한 체제를 반대하는 투쟁에는 사실상 국가 자본주의로 보이는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노동, 기업 그리고 참여의 사회가 제안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는 시장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사회 전체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국가 권위에 의해 적당하게 조절되어야 한다. 


    교회는 이윤의 정당한 역할을 기업체의 번영 지표처럼 인정한다. 하나의 기업체가 이윤을 남기면, 재화 생산 방법이 적합하게 사용되었으며, 그 대상이 되는 인간 욕구들이 정당하게 충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윤이 기업 조건의 유일한 지표는 아니다. 경제적 계산이 제대로 되어 있으며, 동시에 기업체의 가장 고귀한 자산인 사람들은 그들의 품위에 손상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윤리적 이유로써만 배척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경제적 효율성에도 확실히 손상을 끼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사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을 남기는 것만이 아니라, 기업체 자체가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며, 전체 사회에 봉사할 특별한 집단을 형성하는 인간들의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윤이 기업 생활의 한 가지 조절의 역할을 하지만 유일한 것은 아니며, 그 외에도 장기적으로는 기업 생활을 위하여 적어도 같은 정도로 중요한, 다른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듯이 “실제(로 존재한) 사회주의”의 실태는, 자본주의가 경제적 체제의 유일한 모델처럼 평가된다는 긍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미 위에서 본 바 있다. 그렇게 많은 민족들을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과 독점들을 분쇄해야 하며, 인간들과 나라들에게 발전에 참여하는 주요 조건들을 배려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은 모든 국제 공동체에 구체적이고 책임 있는 노력을 요청한다. 강대국들은 약소국들에게 이들이 국제 생활에 진출할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하며, 약소국들은 필요한 노력과 희생에 뛰어들면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안정, 미래에 대한 확실한 기대, 노동자들의 숙련의 향상, 생산 기업자들과 책임자들의 교육을 보장하면서 그러한 기회들을 포착해야 한다.74)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현재의 유익한 노력들은 아직도 대부분 해결되지 않은, 즉 나라들의 대외 부채의 어려움으로 압박을 받는다. 부채를 갚아야 하는 것은 분명히 옳지만, 그 상환이 실제로 온 국민을 기아와 실망으로 이끌어가는, 그러한 정치적 선택의 부과가 되는 것이라면, 이러한 상환을 청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불가하다. 차용한 부채가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의 대가로 상환되도록 요구하는 것은 불가하다. 이러한 경우에는-실제로 부분적으로는 이미 실시하고 있음-부채를 감소시키거나 연기하거나 또는 탕감하는, 민족들의 존속과 발전을 위한 기본 권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소비 사회의 과도


    36. 이제는 더욱 발전한 경제들이 존재하며, 그들의 고유한 특징들과 결부된 특별한 문제들과 위협에로 주의를 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초기 발전 단계에서 인간은 항상 필요성에 얽매여 살았다. 그의 욕구는 적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육체적 구조에 의하여 정의되었다. 그리고 경제 활동은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문제는 충분한 양의 물품들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뿐 아니라, 품질의 요청에 대응하는 것이다: 생산하고 소비할 물품들의 품질, 인간이 받아야 할 공공 봉사의 품성, 환경과 일반적 생활의 품격. 


    자연적으로 더욱 만족스럽고 부유한 생활의 요청 자체는 정당하지만, 이 역사적 시간과 결부되는 새로운 책임과 위험은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욕구들이 생기고 정의되는 양식에는, 항상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선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개념이 잠재한다. 생산하고 소비할 재화의 선택에서 일정한 문화가 일반 생활의 개념과 함께 나타난다. 여기에서 소비주의 현상이 나오는 것이다. 새로운 욕구들과 이것들을 충족시킬 새로운 방법을 파악하려면, 인간의 모든 차원을 존중하고 인간의 물질적이고 본능적인 차원을 내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에 종속시키는, 인간의 전체적 모습에 의하여 인도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누가 직접 자기 본능에 따르며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자기 인격의 본질을 소홀히 한다면, 그 자체로써 타락하며 인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건강에 해로운 소비 관습과 생활 양식이 생겨날 수 있다. 경제 체제 자체는 새로운 방법들을 올바로 구별할 수 있고, 더욱 고차적인 인간의 욕구를 성숙한 인격 형성에 방해되는, 인위적으로 조장된 새로운 욕구들로부터 구별할 규범을 갖고 있지 않다. 이렇게 공권력의 필요한 개입은 논하지 않고도, 선택할 자기 능력의 현명한 사용을 위한 구매인들의 교육과 예민한 책임 의식을 위한 생산자들 자신의, 특히 매스컴의 기술직에 종사하는 이들의 교육을 포함하는,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거대한 노력이 필요하며 요청된다. 


    인간의 건강과 존엄성에 반대되는 인위적 소비의 현저한 예가, 물론 통제하기가 어렵지만, 마약의 경우이다. 이 확산은 사회 질서의 심각한 악기능의 표시이다. 마약에는 인간 욕구의 물질주의적인,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적 사용의 파괴적인 “해석”이 종속된다. 이렇게 자유 경제의 능력은 일방적이고 적합하지 않은 결과에 도달한다. 마약과 외설 그리고 다른 과소비 형태 또한 약자들의 결점을 남용하면서 그 동안에 생긴 정신적 공허를 채우려고 한다. 


    더욱 잘 살기를 원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존재보다는 소유로 향할 때, 더욱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향락을 목적으로 살기 위하여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할 때, 이것을 나은 것이라고 여기는 생활 양식이 잘못이다.75) 따라서 진리와 미와 선의 추구와 공동 발전을 위한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가 소비, 절약 그리고 투자의 선택을 결정하는 생활 양식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제공하기 위해서 나온 사랑의 의무에만, 즉 “남는 것”으로 도와줄 의무에 호소하지 않고 어떤 때는 “필요한 것”으로 도와야 할 의무에 호소한다. 저기보다는 여기에, 저 분야보다는 풍옥한 이 분야에 투자하는 결정은 항상 윤리적이고 문화적인 선택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일정한 경제적 현실과 정치적 안정의 도외시할 수 없는 조건들이 이루어진다면, 투자의 목적, 즉 어떤 국민에게 자신들의 노동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목적은, 이러한 결정을 하는 이의 인간적 품격을 드러내 보여주는, 섭리에 대한 공감과 신뢰에서 오는 것이다.

 


생태계의 요구


    37. 소비 문제 외에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생태학적 문제도 염려된다. 인간은 존재와 성장보다 소유와 향락을 더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과도하게 그리고 무절제하게 땅의 재원과 자신의 생활을 남용한다. 자연적 환경의 무모한 파괴의 원인에는, 우리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인간학적 오류가 잠재한다. 자신의 노동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알아듣는 인간은, 그 노동이 언제나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물들의 원초적 선물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다. 마치 땅에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원초적인 형태나 목적이 없는 것처럼, 인간은 발전시킬 수는 있어도 배반하면 안되는, 그 땅을 인간이 제한 없이 자의로 사용하고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면서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세계에서 하느님의 협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 부당하게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으며, 이렇게 인간은 자연의 반항을 자극하고, 자연을 다스리기보다는 학대한다.76) 


    이러한 점에 있어서, 인간의 전망의 빈곤 또는 편협을 주의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들을 진리와의 관계에서 생각하기보다는 소유하려고 하며, 존재하는 사물들의 그리고 사물들을 창조한 불가시적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시적 사물 안에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미의 감탄에서 나오는, 이해 관계에 매이지 않는, 무상적인 심미적인 태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류는 오늘날 미래의 세대들을 위한 직무와 의무를 의식해야 한다.

 


인간 환경의 파괴


    38. 자연 환경의 비합리적 파괴에 추가해서, 주의를 기울이기에는 아직도 먼, 인간 환경에 대한 더 심각한 파괴를 상기시켜야 한다. 아직도 부족하기는 하지만, 각 종류의 동물이 특별히 지상의 일반적 균형 유지에 기여한다는 것을 알아듣기 때문에, 정당하게 사람들은 멸종 위기에 처한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의 서식처를 보호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인간 생태학”의 윤리적 환경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념한다. 인간이 그 본래의 선한 목적을 따라 사용하도록 땅이 하느님에 의하여 그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 인간도 인간 자신에게 하느님에 의하여 주어졌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간은 자신이 타고나는 자연적이고 윤리적인 구조를 존중해야 한다. 최근에 제기된 도시 생활의 심각한 문제들, 이러한 도시 계획에서 사람들의 생활을 보살필 필요성 그리고 “노동의 사회 생태학”에 대한 관심이 논의되어야 한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자신의 본질적 존엄성을 받으며, 동시에 진리와 선으로 향하기 위하여 사회적 모든 조직을 초월할 능력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 구조의 조건에 의하여, 그가 받은 교육에 의하여 그리고 그의 주위 환경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이 진리를 따라 더욱 쉽게 또는 어렵게 살도록 한다. 따라서 인간 환경을 형성하는 그 결정은 죄의 고유한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 구조에 의하여 다양하게 억압당하는 이들은, 같은 구조에 의하여 이들이 충만히 완성되지 못하도록 지장을 받는다. 그러한 구조를 무너뜨리고 더욱 진정한 공동체 생활의 형태들로 대치하는 것은 용기와 인내를 필요로 하는 과제이다.77)


생명의 성역인 가정


    39. 인간 생태계를 위한 제일의 기본 구조는 가정인데, 이 안에서 인간은 진리와 선에 대한 첫번째 결정적 개념을 얻으며,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이렇게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여기에서는 혼인에 기초한 가정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상호 선물은 생명의 조건을 만들어내며, 어린이가 태어날 수 있고, 자신의 능력들을 기를 수 있고, 자신의 존엄성을 의식할 수 있고, 반복될 수 없는 자신의 유일한 운명에 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은 가끔 인간 번식의 조건들을 채우는 데 겁을 내고 물러서며, 자신과 자신의 생활을 달성해야 할 과업보다는 경험해야 할 감각들의 총체로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다른 인간과 결합하고 자녀를 낳을 의무를 포기하게 하거나, 또는 취미에 따라 가질 수도 갖지 않을 수도 있는, 다른 가능성들과 경쟁이 되는 그 많은 “것들” 중 하나로 자녀들을 생각하도록 이끄는 자유의 결핍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반대로 가정을 “생명의 성역”처럼 생각해야 한다. 가정은 신성하며, 하느님의 선물인 생명을 적합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당면한 많은 침해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진정한 인간 성장이 요구하듯이 발달할 수 있는 장소이다. 가정은 죽음의 문화라고 불리는 것에 반대하여 생명 문화의 중심을 이룬다.
    인간의 지혜는 생명의 가능성들을 옹호하고 개발하기보다는, 세계에 확산되어 있는 낙태 실시까지 포함해서 오히려 생명의 원천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하거나 파괴하려는 경향을 띤 것같이 보인다.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는 인구 문제의 왜곡된 개념에 기초한 산아 제한의 체계적 선전이 비판을 받았다. “이 새로운 형태의 압제에 굴종하도록 강박하려는… 용납 못할 압력으로 흔히 고통을 받고 있는`…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대한 막대한 침해가 이루어지고 있다.”78) 이러한 조처들은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여, 마치 “화학 전쟁”에서와 같이 무방비 상태에 있는 수백만 인간의 생명을 파괴할 정도로 확대된다. 


    이러한 비판들은 윤리-문화적 체제보다는, 경제 체제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사실 경제는 여러 인간 활동의 한 가지 양상이며 차원이다. 만일 경제 생활이 절대화되면, 상품들의 생산과 소비가 사회 생활의 중심이 되고 다른 어느 가치에도 종속되지 않는, 사회의 유일한 가치가 된다면, 이것은 오로지 경제적 체제 때문에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을79) 모르는 사회 문화적 체제가 왜소해져,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에만 힘을 기울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경제적 자유가 다만 인간 자유의 한 부분이라고 긍정된다면, 다시 한번 요약될 수 있겠다. 경제적 자유가 자립할 때, 인간이 살기 위하여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라기보다 재화의 생산자나 소비자로 여겨진다면, 이러한 경제적 자유는 인간에 대한 필연적인 관계를 상실하며 인간을 소외시키고 억압함으로써 끝난다.80)


국가에 의한 공동 재화의 보호


    40. 국가는 공동 재화를 옹호하고 보호할 의무가 있는데, 이것들은 시장의 메커니즘만으로 보호될 수 없는 자연과 인간의 외적 환경이다. 구자본 시대에 국가가 노동의 기본 권리를 옹호해야 했듯이, 신자본주의에서는 국가와 사회는 공동 재화를 옹호해야 하는데, 그 범위 내에서 각자 자신의 목적을 정당하게 달성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시장의 다른 한계를 발견한다. 시장의 메커니즘에 의하여 충족될 수 없는 공동의 그리고 질적인 욕구들이 있다. 논리를 벗어나는 인간적 욕구들이 있다. 본질적으로 매매될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시장의 메커니즘이 많은 이익을 제공해 준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여러 가지 중에서도 그 메커니즘은 재원을 더 잘 사용하도록 도와주며, 생산품들의 교환을 도우며, 특히 계약으로 다른 이들의 원의와 선호들과 만나는, 한 인간의 원의와 선호가 중요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메커니즘은 본질적으로 단순한 상품들이 아니거나 또 될 수도 없는 선(善)이 존재하고 있음을 모르는, 시장의 “우상 숭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소외의 원인


    41.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부르주아 사회들이 인간 실존을 상품화하고 소외시켰다고 비난하면서 이들을 비판했다. 그 소외 개념을 유물론에 입각하여 해석하면서, 게다가 시장 관계가 그 고유한 영역에 있어서 정당하고 유익하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오직 생산과 소유 재산의 관계로부터 그 비난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은, 생활 필수품의 부족과 경제적 비능률성을 결부시킨다면, 사회주의 나라들의 소외가 공산주의로써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외의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근거가 틀렸다면, 이번에는 서구의 역사적 경험이 소외는 참된 삶의 의미의 상실과 더불어 서구 사회에서 하나의 현실로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외는, 인간이 진실로 그리고 실제로 인간성을 경험하도록 도움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잘못되고 경솔한 쾌락에 빠질 때, 소비에서 생기는 것이다. 진정한 공동체의 연대 참여가 증가하느냐 또는 인간의 인간성이 하나의 수단일뿐 목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치열한 경쟁과 상호 배타성의 관계가 증가하느냐에 따라서, 만일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으로써 자신을 인간으로 다소 완성하도록 하는 것에는 관심 없이, 노동이 그 생산과 소득만을 극대화하도록 조직되면, 이 노동에는 소외가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는 소외의 개념을 그리스도교적 전망과 대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우월성과 위대성을 자신과 다른 이 안에서 인식하지 못하면, 자신의 인간성을 누릴 수 없으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인, 사람들과의 그 연대와 친교에 참여할 수 없다. 사실 자신의 자유로운 봉헌을 통해서 인간은 진정으로 완성되어야 할 인간이 되는 것이다.81) 이러한 봉헌은 인간의 본질적 초월 능력 때문에 가능하다. 인간은 다만 현실에 대한 계획, 어떤 추상적 이상 또는 그릇된 유토피아에 자신을 봉헌할 수 없다. 인간은 인격체로서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사람들 그리고 결국은 인간 존재의 창조주이시며 홀로 인간의 봉헌을 받으실 수 있는 하느님께 자신을 바칠 수 있다.82) 자신을 초월하기를 거절하며 자신의 헌신을, 그리고 진정으로 인간적이며 궁극 목적인 하느님을 향한 공동체의 형성을 경험하기를 거절하는 인간은 소외된다. 사회 조직, 생산 그리고 소비의 형태들이 그러한 봉헌의 실현과 인간들간의 연대성의 형성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사회는 소외된다.


    서구 사회에서는, 착취가 적어도 칼 마르크스가 분석하고 서술한 형태에 있어서 극복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착취 형태에 있어서의 소외는 극복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서로 이용하고, 항상 세련되어 가는 이차적인 욕구들은 충족시키면서, 다른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들을 제시해야 할 주요하고 진정한 욕구들을 도외시한다.83) 사물을 소유하고 향락하는 데만 관심을 두고, 자신의 탐욕과 격정을 제지하여 진리에 대한 순종으로 다스릴 능력이 없는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진리에 순종하는 것은 자유의 첫째 조건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고유의 욕구, 본능 그리고 이것들을 합당한 질서에 따라 충족시켜 사물의 소유가 인간이 성장하는 방법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장에는 매스컴의 조작이 방해가 될 수 있는데, 이 조작이 집요한 조직력으로 부과하는 여론의 습성과 운동을 그 근거에 있어서 비판할 수 없을 때 그렇다.


자본주의의 두 가지 측면


    42. 이제 처음 문제로 다시 돌아오면, 공산주의의 몰락 후 자본주의가 승리를 거두는 사회 체제인가, 또 자본주의를 경제와 사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나라들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 이것이 실제 경제적이고 정치적 발전의 길을 찾고 있는 제3세계의 국가들에게 제안되어야 할 모형인가?
    그 대답은 분명히 복합적이다. 만일 “자본주의”가 기업, 시장, 사유 재산과 여기에 따르는 생산 수단의 책임, 경제 분야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로운 창의력의 기본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인정하는 경제 체제를 의미한다면, “기업 경제”, “시장 경제” 또는 단순히 “자유 경제”를 논하는 것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지만, 대답은 분명히 긍정적이다. 그러나 만일 “자본주의”가, 경제 영역의 자유를 전체적이며 인간적인 자유의 봉사에 두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것을 핵심으로 하는 자유의 특수한 차원과 같이 경제적 자유를 보는, 확고 부동한 형태로서의 정치적 구조 내에 제한되지 않는 체제를 의미한다면, 그러면 대답은 부정적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해결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주변화와 착취의 현실들(특히 제3세계) 그리고 인간 소외의 현실들(특히 선진국들)은 세계에 남아 있다. 이러한 것들을 반대하여 교회는 강력하게 소리 높여 외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빈곤에서 살고 있다.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은 여러 나라에서 정확하게 현실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들에 있어서 장애물들을 제거하지만, 그러나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하다. 실은 어떠한 시도도 처음부터 실패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들을 취급조차 하지 않으려는 그리고 시장 능력의 발전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경솔하게 믿는, 자본주의에 일치하는 근본적 이데올로기가 확산될 위험까지도 있다.

 


교회의 사회적 방향 제시


        43. 교회는 제시할 모형을 갖고 있지 않다. 만일 책임자들이 결정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당면하여 상호 관련된 모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관점에서 노력한다면,84)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다양한 역사적 환경에서만 나올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을 위하여 교회는 필수적이고 가장 완전한 방향, 자신의 사회 교시를 제시하는데, 이것은-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시장과 기업의 유용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시장과 기업은 공동선에로 향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사회 교시는 노동자들이 다른 이들과 함께 다른 이들의 지시에 따라 협력하지만, 자신들의 지성과 자유를 행사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노동할”85) 수 있도록, 그들의 존엄성에 대한 전적인 존경을 받고 기업체 생활에 더욱 광범위하게 참여하려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노력을 인정한다. 


    노동을 통한 인간의 전체적 발전은, 비록 확립된 권력 구조를 문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노동의 생산성과 효율성에 기여한다. 기업체를 “자본의 사회”처럼만 생각하면 안되며, 기업체는 동시에 기업 활동을 위하여 다양한 방법과 고유한 책임을 가지고 필요한 자본을 공급하는 이론과 동시에 노동을 통하여 협조하는 이들이 참여하는 “인간의 사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해방과 전인적 발전을 위한 광범위하게 결사된 노동자 운동이 아직도 필요하다. 


    이 시대의 “새로운 것들”이 조명됨으로써 개인의 소유 재산, 즉 사유 재산과 재화의 보편적 목적 간의 관계가 재고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지성과 자유를 통하여 자신을 완성시키며, 이렇게 하면서 이 세계의 사물들을 대상과 도구로서 취하며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활동 자체에 사물을 취하고 사적으로 소유할 권리가 기초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서도 그리고 다른 이와 함께 진력한다. 각자는 다른 이의 노동과 선에 협조한다. 인간은 자기 가정, 자신이 구성원으로 되어 있는 공동체, 민족 그리고 끝으로 온 인류의 요구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하여 노동한다.86) 더욱이 그는 같은 기업체에서 일하는 다른 이들의 노동에, 그의 공급자들의 노동과 구매인들의 소비에도 점차적으로 확장되는 연대 관계에서 협력한다. 공업에 있어서나 농업에 있어서, 생산 수단의 소유는 유익한 노동에 봉사한다면 정당하고 합법적인 것이지만, 노동과 사회적 부의 보편적 발전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것들의 억제에서, 착취에서, 투기에서, 노동 영역에서의 연대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이들을 얻기 위하여, 생산 수단의 소유 재산이 사용되지 않거나 다른 이의 노동을 방해하게 되면 부당한 것이 된다.87) 이런 형태의 소유는 정당화될 수 없으며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 부당한 남용인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의 대가로 빵을 얻을 의무는 동시에 그렇게 할 권리를 전제한다. 이러한 권리가 체계적으로 부정되며, 경제 정책의 결정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합당한 조건들을 달성하도록 해주지 못하게 하는 사회는 윤리에 합당하다고 인정될 수 없으며 사회적 평화를 달성할 수 없다.88) 마치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운 헌신으로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과 같이, 사유 재산은 적당한 때에 적당한 방법으로, 모든 이를 위한 노동과 인간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면 옳게 정당화된다.


제5장 국가와 문화

현대 전체주의의 근원


    44. 레오 13세는 인간 활동의 발전, 즉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두 가지 필요한 현실들의 발전이 정당하게 시작되는89) 건전한 국가론이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새로운 사태]의 어디에선가 사회의 구조를 삼권-입법, 행정, 사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그 당시 교회의 교도권에 어떤 새로운 것이었다.90) 이러한 체제는, 모든 이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하여 적합한 입법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사회적 본질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이해를 보여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각 권력은 같은 목적에 봉사하는 다른 기능들과 다른 권력들에 의하여 더욱 원만하게 균형을 유지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독단적 의사가 아니라 법이 다스리는 “법치국”의 원리이다. 


    현대에는 이러한 가르침에,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형태를 띠고 어떤 사회 발전 법칙의 경험자들과 전문가들 또는 어떤 계급 출신들과 심원한 집단 인식의 원천에 가까운 이들은 전적으로 오류에서 면제되어 있으며, 따라서 절대적 권력 행사를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체주의가 대립한다. 여기에 부언해야 할 것은, 전체주의는 객관적으로 부정된 진리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만일 인간이 순종하면서 자신의 완전한 정체성을 얻는 그 초월적 진리가 없다면, 사람들간에 의로운 관계를 보장해 주는 확실한 원리는 없다. 계급, 어떤 대중 집단, 민족의 이익은 필연적으로 이들이 서로 대립하도록 만든다. 만일 초월적 진리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권력의 힘이 우세해지며, 각자는 다른 이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견해를 부과하기 위하여, 갖고 있는 수단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한다. 이렇게 인간은 지배하는 이들의 발전만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만큼 존중된다. 따라서 현대 전체주의의 근원은 인간의 초월적 존엄성의 부정에 있다. 인간은 불가시적 하느님의 가시적 모상이기 때문에, 그 본질에 있어서 권리의 주체이며 아무도 침해하면 안된다. 개인도, 집단도, 계급도, 국가도, 민족도 안된다. 사회 집단의 대다수는 소수를 반대하여 고립시키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제거하려고 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91)

 


전체주의적 국가에 장애물인 교회


    45. 전체주의의 문화와 실천은 교회를 부정하는 것도 포함한다. 역사 안에서 절대적으로 선을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모든 가치 위에 군림하는 국가나 당은 국가 통치자들의 의사 외에는, 일정한 상황에서 이들의 태도와 품행을 비판하는 선과 악에 대한 객관적 판단 기준을 인정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은 전체주의가 왜 교회를 없애려고 하는지, 또는 교회를 자기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삼으면서92) 적어도 교회를 자기에게 예속시키려고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게다가 국가는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조정하면서, 그 안에 민족, 사회, 가정, 종교 집단들 그리고 개인들을 흡수하고 점령하려고 한다. 따라서 교회는 자신의 자유를 옹호하면서,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사도 5,29 참조) 인간, 가정, 사회 조직들, 민족들의 자유를 역시 옹호하는데, 이들은 모두 자립과 주권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


    46. 교회는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는데, 이 체제는 확실히 시민들에게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중요한 권한을 부여하며, 피지배자들에게는 지배자들을 선택하거나 통제하거나 필요한 경우에는 평화적으로 대치할 가능성을 보장해 준다.93)  따라서 교회는 사적 이익이나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하여 국가 체제를 점령하고 폐쇄된 지배자들의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도와주면 안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법치 국가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올바른 인간관의 기초 위에 성립한다. 이것은 가장 완전한 교육과 양성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모든 사람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필요하거나, 참여와 공동 책임 구조의 설립을 통하여 사회의 주체성에 필요한 조건들이 채워지기를 요청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불가지론과 회의적 상대주의가 민주 국가 형태에서 발견되는 철학이며 기본 자세라고 생각하고, 진리를 알고 진리에 집착하는 이들은 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신뢰를 받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진리가 시민 대다수에 의하여 결정되거나 정치적 변천의 다양성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만일 정치적 활동을 이끌어가고 통제할 최후의 진리가 없다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이념과 확신을 도구처럼 쉽게 조작할 수 있다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끝으로, 원칙 없는 민주주의는 역사가 증명하듯이 쉽게 공개된 또는 위장된 전체주의로 변한다. 


    교회는 과학적이거나 종교적이라고 자처하는 어떤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진리와 선에 대한 자신들의 개념을 다른 이들에게 부과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광신과 근본주의의 위험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이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데올로기가 아니기 때문에 변화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현실들을 일정한 한계 내에 국한시키려고 하지 않으며, 인간의 생활은 역사 안에서 다양하며 항상 완전하지는 못한 조건하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의 초월적 존엄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 방식으로써 자유를 수호한다.94) 


    그러나 자유는 진리가 수락될 때만 충만하고 완전하게 평가될 수 있다. 진리가 없는 세상에서 자유는 그 중요성을 상실하며, 인간은 쾌락의 격정에 직면하며 노출되었거나 숨겨진 조건들에 얽매인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생활하고(요한 8,31-32 참조) 자유를 받들며, 자신의 소명의 선교적 본질에 따라 자신이 인식한 진리를 항상 증거한다. 그리스도인은 개인들과 민족들의 생활 경험과 문화에서 일어나는 진리의 모든 요소들에 대하여 주의 깊게 다른 이들과 대화하면서, 인간에 대하여 신앙과 올바른 이성이 가르친 것을95) 긍정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존중


    47. 마르크스주의적 전체주의와 다른 많은 압제 정권들 그리고 “국가 안보”라는 이름이 부여된 정권들의 몰락 후, 인권에 대한 열성적 관심이 연결되는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민주적 정부 형태를 찾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서는 법 제도를 개정할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그 인권을 인정하면서,96) 민주주의의 진정하고 견고한 기초를 세울 필요가 있다. 그 권리 중에는 생명이 잉태된 후부터 모체 내에서 발육할 수 있는 권리가 밀접하게 연결되는, 생명에 대한 제일 중요한 권리, 일치된 가정에서 그리고 인격의 발전에 적합한 장소에서 살 권리, 진리 추구와 인식에서 자신의 지성과 자유를 발전시킬 권리, 그 외에 지상의 물질적 재화를 올바르게 취득하여 자신과 식구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동할 권리, 끝으로 자유롭게 가정을 이루고 책임 있는 성생활을 함으로써 자녀를 낳고 기를 권리가 있다. 이러한 권리들의 원천과 종합적 이해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신앙의 진리 안에서 살, 그리고 인간으로 자신의 초월적 존엄성에 따라 살 권리로97) 이해되는 종교적 자유이다. 


    민주주의가 성행하는 나라들에서도 그러한 권리들이 항상 완전하게 존중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는 낙태의 스캔들에 대해서만 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공동선을 위해서 결정할 능력을 상실한 것같이 보이는 민주주의 체제들의 위기의 다양한 면들에 대해서도 논한다. 사회로부터 요청되는 것은 정의와 윤리의 기준에 따라 검토되지 않고, 그 요구를 내세우는 집단들의 선거 영향과 재정적 계산을 위해서 검토된다. 이러한 정치적 행위의 일탈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불신과 무관심을 낳으며, 그렇기 때문에 당하고 속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참여가 감소되고 시민 정신이 쇠퇴한다. 이러한 이유로 개인적 이익들은 점점 더 어렵게 공동선의 적합한 개념에 적응하게 된다. 실제로는 공동선이 개인적 이익들의 합계가 아니라, 가치들의 공정한 질서에서 오는 평가와 조화를 찾으며, 결국은 존엄성과 인권의 확실한 이해를 요청한다.98) 


    교회는 민주적 질서의 적당한 합법적인 자립성을 존중하며, 법이나 제도의 어떤 형태를 앞에 내세울 권리가 없다. 여기에서 그 질서에 대한 교회의 공헌은, 육화된 말씀의 신비 안에서 명백하게 나타난99) 그 인간 존엄성이 이해되도록 하는 데 있다.


국가의 경제적 역할


    48. 위에서 고찰한 것은 경제적 영역에 있어서의 국가의 역할에도 적용된다. 경제적 활동, 특히 시장 경제의 활동은 법 제도와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규범 없이 전개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경제 활동은 통화 안정과 효과적 공공 서비스 외에도 개인들의 자유와 소유 재산에 대한 보증이 전제된다. 따라서 국가의 주요 임무는 노동자와 생산자가 동등하게 그들의 노동의 결실을 즐길 수 있고, 이렇게 효과적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노동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안전하게 보장해 주는 데 있다. 이 안전 보장이 결여되면, 공권력의 부패가 성행하고 부당한 재산 증액이 확산되고 이득이 쉽게 실현되는데, 이 모든 것은 부당하거나 또는 단순히 투기적 행동에 기인하는 것이며, 경제 질서 발전의 주요 장애물 중 하나이다. 


    국가는 또한 경제 분야에 있어서 인권의 행사를 감시하고 조정해야 하는데, 이 문제에 있어서 그러나 첫번째 책임은 국가에 있지 않고 개인들,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들과 단체들에 있다. 국가는 경제 생활 전체를 거의 군대식으로 다스리고, 개인들의 충동심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직접 노동의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경제 분야에는 아무런 법칙도 있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긍정하듯이, 국가가 이 영역에서 아무런 임무도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국가는 기업 활동이 부족하면 자극을 받고, 많은 어려움으로 위협에 처하면 지원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고용 기회들을 제공할 조건들을 만들어줌으로써 기업 활동들을 지원해야 한다. 


    국가는 독점들의 상황이 발전에 어떤 장애를 가져오거나 발전을 지연시킬 때, 자신의 권위로 개입할 권리도 있다. 그러나 국가는 발전을 조화시키고 이끌어갈 역할 외에 특별한 상황에서는, 사회의 어떤 집단들이나 산업 계층들이 약하거나 초기 단계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대리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공동선의 긴박한 사정으로 정당화되는 이 기능은 가능한 한, 사회 집단들과 산업 계층들의 고유한 임무를 계속해서 제거하지 않고, 국가의 개입 범위를 과도하게 확대하지 않으며, 이렇게 경제적이고 시민적 자유가 침해를 당하지 않도록 정해진 시간의 한계를 두어야 한다. 


    최근에 와서는 국가 활동의 분야가 어떤 점에서는 새로운 국가 형태, “번영, 즉 복지 국가”가 존재할 만큼 확장되었다. 이러한 발전이 몇몇 나라에서는 점점 더 인간에게 합당치 않은 빈곤과 결핍의 형태를 시정하면서, 많은 필요성과 궁핍에 대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도와 남용은 특히 최근에 와서 “원조 국가”라고 불리는 “복지 국가”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원조 국가”의 결점과 결함은 국가 기능의 불완전한 이해에서 오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는 “보조성의 원리”를 존중해야 한다. 상위층의 사회는 하위층 사회의 내적 사안에 간섭하여 그 고유의 임무를 제거하면 안되고, 오히려 반대로 필요한 경우에는 공동선을 목표로 그 행동이 하위층 사회의 행동과 조화되도록 지원하고 도와주어야 한다.100) 


    원조 국가는 간섭하면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의미를 제거하면서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능력을 감소시키고, 흔히 시민들에게 해야 할 서비스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관료주의적인 이유로 다스리는 공공 기구를, 대단히 많은 비용을 지출하면서 확대하고 있다. 실제로는 더욱 곤궁에 가까운 이, 그러나 그보다는 곤궁에 처하여 있는 이에게 가장 가까운 이가 그 곤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더 잘 도울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종류의 욕구들은 단순히 물질적 보조로써만 충족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더욱 고차적인 인간 요청을 채워주어야 한다. 난민들, 이주민들과 동시에 버림받은 이들, 노인들 또는 병자들의 조건에 대하여 그리고 마약 중독자의 경우와 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모든 형태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약물 치료 외에도 실제로 제공되는 형제적 보호로써만 효과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연대성과 애덕


    49. 이 영역에서 자신의 창설자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에 충실한 교회는 그 업적을 통하여 항상 현존하며, 빈곤한 사람이 모욕을 당하지도 않고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이지도 않고 인간 존엄성의 발전을 통하여 자신의 상태에서 일어나도록, 교회는 그에게 도움을 제공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하느님께 무한히 감사드리면서, 관심 깊은 애덕은 교회 안에서 한번도 결여된 일이 없으며 오히려 오늘날에는 다양한 형태의 많은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고 긍정해야 한다. 특별히 자원 봉사에 대하여 논해야 하는데, 교회는 그것을 격려하며, 그것을 지지하고 발전시키도록 모든 이의 협조를 자극하고 촉구한다. 최근에 와서 만연된 이기주의적 사고 방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연대성과 애덕의 투신이 요청되는데, 이것은 가정에서 부부의 상조로부터 시작해서 후손들의 배려에 의하여 상호간에 실천되는 것이다. 이렇게 가정은 노동과 연대성의 공동체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정이 그 소명을 충분히 따르려고 결정할 때는, 국가의 필요한 원조에서 제외되므로, 이렇게 가정은 적당한 지원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전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가정과 사회에 대한 정책이 촉진되어야 하는데, 이 정책에 있어서 자녀들의 교육에 있어서나, 노인들을 가정으로부터 멀리 보내지 않고 세대간의 관계를 강화하여101) 이들을 보살핌에 있어서, 적합한 보조와 효과적 수단으로 지원받아야 하는 가정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가정과는 별도로 다른 중간 집단들은 연대성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기의 기능을 발휘하면서 이 모든 집단들은 인간 공동체처럼 성장하는데, 이 인간 공동체는 무명의 것에 빠지거나 익명의 대중과 혼동되지 않도록 하면서 사회 구조의 뼈대를 거의 다 만들려고 하지만, 오늘의 사회에서 그러한 일은 불행히도 너무 흔히 일어난다. 상호 관계의 교차점에서 인간이 살며 “사회의 주체성”이 강화된다. 오늘날 인간은 흔히 국가와 시장의 양쪽 사이에서 압축되어 있다. 때로는 인간이 물품의 생산자와 상품의 소비자처럼 또는 국가 행정의 종속인처럼 존재하는 것같이 보이는데, 이것은 다음의 것을 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공동 생활은 그 자체 안에 국가와 시장이 받들어야 할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장이나 국가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추구하며 진리를 따라 삶으로써 진리를 완성하려고 노력하고, 과거와 미래의 세대들과의 지속적 대화에서102) 더욱 깊이 진리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문화 유산


    50. 모든 세대에서 쇄신되는 진리의 개방적 추구가 민족의 문화와 인간성의 개념을 특징짓는다. 전해주고 물려받은 가치들의 유산은 언제나 젊은이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선입견으로 배척하거나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유산의 고유한 실존을 신중히 평가한다고 선언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평가로 가치들은 더욱 살아 있는 것이 되고 현재의 것이 되고 인간을 위한 것이 되도록, 전통 안에서 유효한 것을 거짓과 오류와 구분하고 묵은 형태를 제거하며 시대에 더 적합한 관습으로 대치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의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민족들의 복음화는 문화에 침투하여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그리고 그의 순화와 풍부화의 노력에서 그를 돕는다.103) 그러나 반대로 인간 문화가 인간의 진리에 대한 모든 교환과 토의를 거절하면서, 폐쇄하며 실효한 것을 반복이나 하려고 할 때, 인간 문화는 말라버리며 퇴폐하기 시작한다.

 


교회의 문화적 공헌


    51.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일정한 문화 구조 내에서 전개되며, 거기에서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 적합한 문화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창의력, 지성 그리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키며, 거기에서 공동선의 촉진을 위하여 자제, 자기 희생, 연대성 그리고 의지를 제시하는 전인(全人)이 내포된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째 그리고 더욱 중요한 일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며, 미래를 건설하려고 하는 양식은 자신과 자신의 운명에 대한 평가에 의하여 좌우된다. 이 수준에 문화와 인류에 대한 교회의 고유하고 결정적인 공헌이 위치한다. 교회는 인간의 역할과 자유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대중과 혼동하고 인간의 위대성을 투쟁과 전쟁의 기술에 고착시키는 유형들을 반대하여, 평화의 문화를 애호하는 훌륭한 인간 태도를 지지한다. 교회는 세계 창조에 대한 진리를 선언하면서 봉사하는데, 이 세계를 결실 있게 그리고 노동으로써 더욱 완전하게 만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인간의 수중에 맡겨주신 것이며 교회는 또한 구원에 대한 진리를 선포하면서 봉사하는데, 이 구원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모든 사람들을 구해냈으며 사람들이 서로 책임을 지도록 그들을 일치시켰다. 성서는 형제를 위하여 요청되는 봉사에 대하여 계속 말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임에로 우리를 독촉한다. 


    이러한 요청은 가정이나 민족이나 국가의 한계 내에 국한되지 않으며, 아무도 인류의 어떤 성원의 운명에 대하여 생소하거나 무관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점차적으로 온 인류 가족을 포함한다. 아무도 자기 형제의 운명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창세 4,9; 루가 10,29-37; 마태 25,31-46 참조). 그 필요성이 현존하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주의 깊고도 열성적인 관심은, 오늘날에는 역시 사람들을 서로 더욱 가깝게 만든 새로운 매체들로써 쉬워지기는 했지만, 전쟁과는 달리 국제 분쟁이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을 감안한다면 특별히 중요성을 띠게 된다. 작은 나라들에게도 공급될 수 있는 파괴 수단의 가공할 위력과 전세계의 국민들간의 관계는, 점점 더 전쟁의 결과에 어떤 한계를 짓는 것을 더 어렵게 또는 거의 불가능하게 한다.

 


발전과 전쟁 반대


    52. 베네딕도 15세와 그의 후임자들은 그러한 위험을104) 명확하게 이해했다. 본인 자신도 페르시아만에서 발발한 비참한 전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외쳤다.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 무죄한 사람들의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방법을 가르치고 죽이는 이들의 생명을 격변 속에 몰아넣고 증오와 지속적 원한을 남기고 끝으로 전쟁이 발발한 바로 그 문제의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드는 전쟁은 다시 일어나면 안된다. 마치 각 나라 안에 사적 복수와 보복 체제가 법의 권위에 의하여 이미 대치되었듯이, 그렇게 국제 공동체에서도 그러한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시급히 요청할 때가 왔다. 그러나 전쟁은 흔히 심각하고 실제적인 원인으로 일어난다. 이것들은 인간들이 고통스럽게 당하는 불의, 정당한 요청의 좌절, 빈곤 그리고 평화적 수단으로 발전하고 향상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모든 희망에서 제외된 대중의 착취이다. 


    이러한 이유로 평화의 다른 이름은 발전이다.105) 마치 전쟁을 피하는 것이 모든 이의 책임이듯이,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도 모든 이의 책임이다. 마찬가지로, 한 나라 안에서 시장 자체가 공동선으로 향하는 사회 경제가 전개될 수 있으며 전개되어야 하듯이, 국제적으로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사람들 자신이 서로 이해하고 인식하려고 그리고 양심이 민감해지기 위하여 매우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기대되는 문화인데, 이러한 문화는 빈곤한 이의 인간적 능력에 대하여 또는 노동으로써 자신의 조건을 향상시키고 경제적 번영을 위하여 기여하기에 적합한 그의 준비에 대한 신뢰를 증가시킨다. 그러나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에게-개인들이나 국가나-진정한 계약 조건과 가능성이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을 제공하는 것은 발전을 위한 세계적 협력의 의무인데, 이 기능은 동시에 더욱 발전한 경제가 누리는 지배와 권력을 어느 정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다.106) 


    이러한 결정으로 기존 생활 양식이 크게 바뀔 수 있다. 즉, 인간 능력과 자연 능력의 낭비가 제한되고 이 세상의 인간들과 민족들이 그것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지금은 주변화된 민족들의 노동과 문화에서 오는 새로운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재화의 평가가 추가된다. 이렇게 민족들의 가족에 속하는 인간적 부의 보편적 확장이 이룩된다.

 


제6장 인간은 교회의 길이다

인간 존재의 유일한 가치


    53. 프롤레타리아의 곤궁에 당면하여 레오 13세는 다음과 같이 긍정했다. “본인은 분명히 본인에게 속한 권한으로 확신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하며… 침묵을 지키는 것은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같이 보일 것이다.”107) 지난 백년 동안 교회는, 사회 문제의 지속적 변화를 가까이 지켜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반복해서 표명하였으나, 과거의 특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또는 본인 자신의 어떤 세계관을 부과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교회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위탁받은 인간에 대한 배려와 고유한 책임인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상기시키듯이 하느님께서 이 인간을 그 자체로서 원하신, 즉 영원한 구원에 참여하도록 한 유일한 피조물이다. ‘추상적’ 인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인간에 관한 것이다. 각자가 구원의 신비에 포함되며 같은 신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각 개인과 영원히 결합시키셨기 때문에 각 사람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다.108) 따라서 교회는 인간을 포기할 수 없으며, “이 인간이야말로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 걸어야 하는 첫째가는 길이고… 그리스도 친히 따라 걸으신 길이며, 변함 없이 강생과 구속의 신비 속을 거쳐가는 길이다.”109) 


    이것이 교회의 사회 교시를 조절하는 또 하나의 원리이다. 만일 교회가 단계적으로 그 원리를 체계적 양식으로 발전시켰다면, 이것은 교회의 전체적 교의의 재보를 정의하는 범위가, 죄인과 의인으로서의 전체 진리 안에 있는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중심에 있는 인간


    54. 오늘날 사회 교도권은 오히려 현대 사회의 관계 자체의 구조 안에 들어 있는 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보인다. 인문 과학과 철학은 사회 안에서의 인간의 중심 위치를 설명하는 데, 그리고 인간이 자신을 “사회적 존재”로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신앙만이 인간에게 진정하고도 고유한 정체성을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며, 과학과 철학의 공헌을 활용하여, 구원 도상에 있는 인간을 돕기 위하여 채택한 교회의 사회 교시는 오로지 그 신앙으로부터 출발한다.


    회칙 [새로운 사태]는 지난 19세기 말의 사회-경제적 분석을 위한 대단한 기여로서 이해될 수 있으나, 그 특별한 가치는 이 회칙이 교도권의 문헌이며 그러한 종류의 다른 많은 문헌들과 같이 교회의 복음 선교 사명에 일치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사회 교도권은 그 자체로써 복음 선교를 위한 어떤 도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된다. 이러한 성질의 것인 한, 교회의 사회 교도권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구원을 선포하며, 같은 이유로 인간을 인간 자신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와 조명으로만 나머지 문제가 취급된다:각자의 인권과 특히 “프롤레타리아”의 인권, 가정과 교육의 권리, 국가의 의무, 국가 사회와 국제 사회의 조직, 경제 생활, 문화, 전쟁과 평화, 그리고 잉태의 순간부터 시작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생명에 대한 존중.

 


하느님께서 인간을 설명하신다


    55. 교회는 “인간의 의미”를 신적 계시로부터 받는다. “우리가 인간을, 진정한 인간을, 전인(全人)을 깊이 인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고 바오로 6세는 말하면서, 계속해서 기도에서 같은 생각을 표현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인용했다. “영원하신 하느님이시여, 당신의 본질 안에서 나의 본질을 인식하겠나이다.”110) 


    따라서 그리스도교 인간학은 실제로 인간의 한 장이며, 이러한 이유로 교회의 사회 교시는 인간을 취급하고, 인간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서의 그의 행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므로 “신학의 영역에, 특히 윤리신학의 영역에 속한다.”111) 이러한 신학적 차원은 인간 공동체의 현대 문제들을 이해하며,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여기에 첨가할 필요가 있다-인간으로부터 그의 주요 차원의 하나인 정신적 차원을 제거하는 “무신론적” 해결에도 적용되며, 결국 인간을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이기주의 안에 가두면서 다양한 핑계를 내세워, 인간이 법과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설득시키려는, 최대로 관용적이고 소비적인 해결에도 적용된다. 


    교회가 인간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할 때, 교회가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 생명의 참여를 제공할 때, 교회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그의 생활을 이끌어갈 때, 교회는 인간 존엄성의 풍부화에 대단히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교회가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사명을 포기할 수 없듯이, 오늘날 자신의 활동에 많은 장애물과 어려움이 놓여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전체적 인간을 향상시키는 복음 선교에 항상 새로운 힘과 방법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자신이 존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과 함께 역사를 통하여 걸어오면서 그렇게 항상 노력했듯이, 교회는 삼천년대에 들어가기 직전에도 “인간의 초월성의 표지요 수호자”112)로 남아 있다. 회칙 [새로운 사태]가 바로 그러한 것의 뚜렷한 표본이다.

 


사회 교시에 대한 교회의 인식


    56. 그 회칙의 백주년을 맞이하여, 본인은 사회 교시를 배우고 연구하고 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지역 교회들의 협력이 필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백주년 기념이 그 교시를 여러 분야에서 연구하고 보급하고 적용하기 위한 새로운 열정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특별히 본인은 이 사회 교도권이 실제(로 존재한) 사회주의가 몰락한 후, 재건의 노력 자체에서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여러 나라들에 인식되고 적용되기를 원한다. 서방 국가들도 그러한 몰락에서 자신들의 경제 체제의 일방적 승리를 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들 체제에 필요한 수정을 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제3세계 국가들은 나날이 더 심각해지는 저개발의 극단적 상황에서 다른 어느 때보다도 늦어지고 있다. 


    노동자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윤리와 지침을 설명한 후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즉각 수행하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미 심각한 상태의 악이 지연으로 인해 치유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고 레오 13세는 결정적 발언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언했다.-“교회를 두고 말하자면, 교회는 모든 시대에 모든 방법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113)

 

 


교회의 사회 메시지


    57. 교회는 사회적 복음 메시지를 어떤 기술이나 단순한 이론처럼 보지 않고 사실은 무엇보다도 먼저 행동하는 기반과 기회로 생각한다. 이 메시지에 감화되어 초기 그리스도인들 중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그들이 다양한 사회 계층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로서 살 수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복음의 힘으로 여러 세기 동안 수도자들은 땅을 경작했으며, 수사들과 수녀들이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병원, 보호 시설 그리고 자선 협회를 세웠으며, 여러 계층의 남녀들은, “너희는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3,40)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경건한 원의로 남아 있으면 안되고 오히려 구체적 생활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궁핍하고 주변화된 이들을 위한 봉사에 투신했다. 
   

교회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사회적 메시지가 그 내적 일관성과 논리로서보다는, 업적의 증거에 있어서 권위와 신뢰를 얻는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으로부터 다른 집단들을 배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가난한 이들의 특별한 선호가 나오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빈곤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신적인 빈곤도 있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물질적 빈곤과 관련된 선호에 대해서만 논하는 것이 아니다. 대단히 중요하며 전통 안에서 항상 계속되어 온, 가난한 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교회로 하여금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빈곤이 지속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세계로 향하도록 촉구한다.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버림받은 이들, 노인들, 병자들, 소비주의에 희생된 이들의 계층의 여러 가지 형태의 가난이 있으며, 더한 것은 피난민들과 이주민들의 가난이다. 개발 도상국들에서는 구체적으로 적합한 조치들이 제때에 취해지지 않으면, 큰 위기가 예상된다.

 


정의의 촉진


    58. 인간에 대한, 특히 교회가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가난한 이에 대한 사랑은 정의의 촉진으로 이루어지지만,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청하는 빈곤한 이를 어떤 귀찮은 존재나 짐으로서가 아니라 선을 행하고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한 기회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완성되지 않는다. 이러한 의식만이, 인간을 도와주기 위한 모든 진정한 노력에 내포되는 위험과 정신의 변화에 과감하게 맞설 용기를 줄 것이다. 여유 있는 것에서 줄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 발전 체제 안에 진입하지 못한, 제외되거나 주변화된 모든 이들을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문제이다. 이것은 세계가 풍부하게 생산하는 잉여물에서 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생활 양식, 생산과 소비 양식 그리고 오늘날 사회를 다스리는, 이미 확립된 권력 구조의 변화를 요청한다. 지금까지 인정해 온 사회 조직의 제도를 제거하는 문제가 아니라, 온 인류 가족을 존중하면서 공동선에 일치하는 개념에로 그 제도를 이끌어가는 문제이다. 오늘날에는 “세계 경제 관리”라고 불리는 것을 당면하게 되는데, 이것은 비상한 번영의 기회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배척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세계 경제 관리에는, 국민들의 경제 정책 자체가 공동선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하여, 통제하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국제 기구가 일치해야 하는데, 이것은 세계 최대의 강국이라 할지라도 달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목적이 달성되려면, 국가들간에 더욱 강한 일치가 이루어져야 하며 최대 인류 가족의 이익이 국제 기구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한다. 그 외에 자신들의 결정에서 나올 결과를 평가하면서 국제 시장에서 덜 중요시되지만 가장 어렵고 심한 궁핍을 안고 있으며, 그래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민족들과 국가들이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확실히 이 분야에 있어서는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현존


    59. 그러므로 정의가 완전히 실현되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인간들의 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의 선물이 요청된다. 은총이 작용함과 동시에 인간의 자유가 부응하면서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신비적 현존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곧 섭리이다. 그리스도의 추종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것의 경험은 신앙의 빛으로 조명되고, 더 인간적이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어려움, 투쟁, 문제 그리고 도전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상호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은 사람들이 해결책을 발견하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상황까지 참을 수 있게 하여 그것으로 질식하거나 자신의 존엄성과 소명을 잊지 않도록 해준다. 


    그 외에 사회 교시는 제학문 분야에 속하는 중요한 차원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 대한 유일한 진리를 다양하고도 지속적으로 변하는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사건들 안에 더 잘 합체시키기 위하여, 그 교시는 인간을 연구하는 다양한 학문 분야들과 대화에 들어가며, 이 학문 분야들의 결실을 완성시키며, 자신의 소명의 완성 안에 인정받고 사랑받는 인간에 대한 봉사 분야에서 학문들이 발전하도록 보조한다. 다른 학문 분야와의 관계 외에, 이 사회 교시의 실천적 차원, 어떤 의미에서는 경험적 차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사회 교시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양심이 세계의 상황과 만나는 곳에 있으며, 신자 개인들, 가정,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 그리고 정치인들과 국가 통치자들이 수행하는 노력에서, 같은 교시의 일정한 형태와 적용을 역사 안에 부여하기 위하여 나타난다.

 


선의를 가진 모든 이의 협력


    60. 노동자 문제의 해결을 위한 원리들을 설명하면서, 레오 13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또한 이토록 어려운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활동과 노력을 요청한다.”114) 그는 산업 사회에 의하여 야기된 심각한 문제들은, 모든 세력들간의 협력 없이 해결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긍정은 그 후 교회의 사회 교도권의 영속적 요소가 되었으며, 교황 요한 23세는 모든 민족들의 평화에 관한 회칙을, 동시에 왜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라고 기록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레오 13세는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들, 특히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그러한 협력을 배척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지적했다. 그 후, 특히 최근에 와서는 많은 것이 변했다. 오늘의 세계는 어느 때보다도 국가 안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심각한 문제들의 해결이 경제적 생산이나 법률적 또는 사회적 조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도덕적이고 종교적 가치들 그리고 마음과 행동과 구조들의 변화를 요청한다. 교회는 자신이 수행할 역할의 특별한 책임을 느끼며-본인이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 설명했듯이-종교를 공언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사회 문제에 필요한 도덕적 기반을 놓는115)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확고한 희망이 비친다. 


    같은 회칙에서 본인은 하느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116) 공동 확신의 일치된 증거를 보여달라고 그리스도교 교회들과 세계 모든 종교에게 호소했다. 사실 본인은 종교들이 오늘과 내일에 평화를 유지하고 인간에게 합당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탁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다른 편으로는 대화와 협력을 위한 마음의 준비가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요청되는데, 특히 국가 수준이나 국제 수준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분야에서 그러한 책임을 지고 있는 개인들이나 집단들에게 요청된다.

 


새로운 도전


    61. 산업 사회 초기에 “거의 노예적 멍에”가 본인의 선임자로 하여금 인간 옹호에 대하여 발언하도록 움직였다. 과거 백년 동안 교회는 같은 임무에 충실하게 남아 있었다. 실제로 교회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계급 투쟁의 혼란한 시기에 경제적 착취와 전체주의적 체제의 폭정으로부터 인간을 옹호하기 위하여 개입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물질적 재화의 보편적 목적과 억압 없는 협조와 연대 관계의 정신에 기초하는 사회 질서를 주장하면서, 교회는 자신의 사회 메시지의 핵심에 인간의 존엄성을 둔다. 교회는 인간과 사회가 재산뿐 아니라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가치를 필요로 한다고 중단 없이 선언했다. 그뿐 아니라, 교회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서구 세계의 번영에서가 아니라, 개발 도상 국가들의 빈곤에서 살고 있으며 “거의 노예적 멍에”와 같은 운명을 참아 견딘다는 것을 항상 더 잘 파악하기 때문에, 교회의 호소가 항상 모든 이에 의해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라도, 그 실상을 아주 명확하고 솔직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느꼈고 또 느끼고 있다.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백년 후에 교회는 아직도 “새로운 것들”과 새로운 도전에 당면하고 있다. 따라서 백주년 기념은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특별히 신앙인들의 노력을 강화한다.

 


삼천년대의 초입에서


    62. 이 회칙은 과거를 돌아보았으나 미래로 향하고 있다. 그 때의 회칙 [새로운 사태]와 같이 이 회칙은 신세기의 초입에 와 있으며,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 도래의 길을 준비하려고 한다.시대마다 참된 그리고 영속적인 “사물들의 새로움”은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고 긍정하신 신적 능력으로부터 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왕국을 바칠”(1고린 15,24.28) 때 이루어지는 역사의 완성을 지적해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기대하는 “새로움”은 이미 세상의 창조부터 있으며, 특히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람이 되셨고 그와 함께 그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2고린 5,17)이 되신 것을 알고 있다. 

 

    이 회칙을 마치면서, 본인은 영원한 운명을 향한 여정에서 인간을 동반할 빛과 힘을 자신의 교회에 주신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삼천년대에서도 교회는 혼자서가 아니라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것을 알면서, 인간의 길을 자신의 길로 만듦으로써 충실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길을 자신의 길로 삼으셨으며, 인간은 자기가 인도됨을 알지 못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를 인도하신다. 


    인간을 향하여 인간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여정에서 그의 곁에 계시며, 신앙의 순례 도상에서 교회의 앞장을 서시는, 구원자의 모친이신 마리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히브 13,8)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가장 충실한 협조자로서 다음 천년대를 향하는 인류를 자모적 전구로 수반하여 주소서. 본인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강복을 비는 바이다.


로마 성 베드로좌에서,
교황 재위 제13년,
1991년 5월 1일,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Posted by T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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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kokoeun.tistory.com BlogIcon Tessie. 2009.12.19 0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유입경로를 따라 다니며 알라딘TTB 광고를 집어넣으며 저절로 드는 생각 하나가....그 동안 ...비록 그게 푼돈 수준이라해도...사실 한푼두푼이 티끌 같아도 이게 모여야 태산이되는 단위다.

    돈을 길에다가 버리고 살았단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좋은 책소개 하면서 광고를 했더라면...아깝다...9월에 시험 삼아 꼴랑 포스팅 2개 던져넣은 알라딘 내서재에선 관리도 안했건만...한 30분 투자해놓고 잊어버렸는데도 수익금이 생겼더라는...구글애드센스는 언제 수익금 한 푼이라도 건질래나..쩝!!! 알라딘 TTB 광고야말로 딱 내 스타일이네.

    • Favicon of https://naturis.kr BlogIcon Naturis 2009.12.19 04: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ㅎㅎ 그런가요. 이제 광고수익에 관심을 가지시는 건가요? 나두 빨랑 알라딘 광고 달아야 되는데 승인이 안나네 ㅋㅋ 그나저나 저는 방문객 숫자가 정체 아니 오히려 줄어서 걱정이예요. 애드센스는 지금까지 번돈이 꼴랑 3만원 ㅋㅎㅎ

    • Favicon of https://kokoeun.tistory.com BlogIcon Tessie. 2009.12.19 05: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에...잘 아시면서..왜 이러실까.ㅋㅋ
      오랫동안 저 광고에 눈독 들이고 있다고 고백한거같은데.

  2. Favicon of https://befreepark.tistory.com BlogIcon 비프리박 2009.12.22 2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인 거죠.
    구글 애드센스에 비하면 알라딘 ttb 광고는 정말 '티끌' 수준의 수익을 낸다는 것이
    좀 안습이긴 합니다만. 쿨럭. ^^
    일단 티끌 모아 태산인 점에 주목하자구요. 크흣.

    • Favicon of https://kokoeun.tistory.com BlogIcon Tessie. 2009.12.22 2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진짜 티끌 수준..ㅋ..근데 그 티글로도 한달에 5만원가량 수익이 나오는 분도 있더군요.전 그 정도도 충분해요.그걸로 책 구입할거거든요..근데 비프리박님은 구글로도 돈을 엄청 벌어드립디다..저 사실 비프리박님보고 구글광고 눈독들인건데..ㅋㅋ그거 진짜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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