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특별 희년,프란치스코교황칙서 19항 내용중 일부.............

 

인생이 돈에 달려 있고 돈 앞에서는 그 무엇도 가치와 존엄이 없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덫에 빠지지 마십시오. 이는 단지 허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돈을 가져갈 수 없습니다. 피 묻은 돈을 긁어모으려고  폭력을 행사해 보아야 그 누구도 강해지거나 영원히 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아무도 이를 피할 수 없습니다.!!!!!!!

 

 

파우스티나와 자비주일 전례 ☞ 파우스티나수녀-자비주일이란 무엇인가?-세번째 이야기 (크리소스토모자료)

 

 

 

....특별히 우리 천주교인들에게는,이 자비의 특별희년인 2016년 사순시기는 자비를 몸소 생활에서 실천하는 한 해가 되어야만 합니다.장상들의 말을 하늘처럼 섬기는 천주교인들이 자기 성당의 신부님말씀에는 순종하며 사제들을 비판하는 목소리에는 목숨을 걸고 달려들며 변명하면서,막상 가장 높은 분인 교황님의 명령-거대한 부패권력과 싸우라는 그 지상과제만,유독, 거부하는 모순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재물과 하느님은 동시에 섬길수 없다고 주님께서 분명하게 못을 박았습니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라면,부자도 구원받는다고 꼬드기는 사악한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고,부디 올해부터라도 앞장서서 부패한 정권과 싸우는 진정한 신자로 거듭나시길 바랍니다.2016년 4월 총선에서는 부패한 정권을 심판해야 할 의무가 당신에게 짐으로 지어진 셈이지요.

 

특히 조중동읽기부터 중단하시고요.종편방송시청도 중단하십시오.여기서부터 부패세력과 싸우는 신자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그들은 당신에게 부패한 정권에게 투표하도록 거짓말하는 사악한 언론이기 때문입니다.이번 총선에서는 반드시 올바로 투표해야할 의무가 신자인 당신에게 남겨진겁니다.

 

부패한 정권과 싸울 진정한 야당을 선택해야할 이유란, 바로 올해가 자비의 해로 선포됐기 때문입니다.새누리는 완전히 악마의 정권임을 깨닫기 바랍니다.더 이상 죄악의 무리에 남아있지 마십시요.주님의 요구입니다.☞ 2016년 4월 총선-안철수경계경보는 여전히 유효하다(주류언론 거꾸로 읽기)

 

 

바로 그 이유를 교황께서 당신에게 설명하는 글입니다.사순시기,천주교신자라면 반드시 필독해야할 글입니다.

 

 

 

자비의 특별 희년(2015년 12월 8일 ~ 2016년 11월 20일)선포,교황 프란치스코 칙서란 무엇인가? 궁굼한 분이라면 가톨릭신문 기사읽기 참조, ☞[자비의 특별 희년, 무엇을 할 것인가] (1) 왜 자비인가? 기사중 일부 -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선출 2주년을 기념하는 지난 2015년 3월 13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주님을 위한 24시간’ 참회 예식 강론을 통해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했다. 한 달 뒤인 4월 11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전야에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을 반포했다.

이로써, 전 세계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성찰하고, ‘자비의 얼굴’이신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 모두가 스스로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뚜렷한 표지”가 되어 자비에 대한 “힘차고 효과적인 증언”을 하는 은총의 기간을 지내게 된다..........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은 어떤 내용인가? 중요한 부분만 발췌했네요,

원문전체읽기는 여기 클릭해 주세요 ☞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

 

 

 

 

하느님의 종들의 종

로마 주교 프란치스코가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이에게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빕니다.

 

 

 

 

 

........생략

 

19. 용서의 말씀이 모든 이에게 전해지고 자비를 경험하라는 부르심에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바랍니다. 저는 하느님의 은총과는 멀리 떨어진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더욱 간곡히 권유합니다. 저는 특히 모든 범죄 조직에 속한 이들을 생각합니다. 저는 그들이 자신을 위하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간절히 요청합니다. 저는 죄와 맞서 싸우시지만 죄인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으로 이를 요청합니다.

 

 

 인생이 돈에 달려 있고 돈 앞에서는 그 무엇도 가치와 존엄이 없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덫에 빠지지 마십시오. 이는 단지 허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돈을 가져갈 수 없습니다. 피 묻은 돈을 긁어모으려고  폭력을 행사해 보아야 그 누구도 강해지거나 영원히 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아무도 이를 피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부패를 저지르거나 그에 연루된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사회의 이러한 곪은 상처는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의 근간을 위협하기 때문에 하늘에까지 이르는 중대한 죄입니다. 부패는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부패의 무도한 탐욕은 약자의 미래 계획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가장 가난한 이들을 무참히 짓밟아 버립니다. 바로 이러한 죄악이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퍼져나가 공공연히 추문을 일으킵니다. 부패는 우리 마음을 죄로 완고하게 만들어 하느님을 멀리하고 돈이 곧 힘이라는 허상에 빠지게 합니다.

 

 

부패는 의혹과 음모로 조장되는 어둠의 활동입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최고의 부패는 최고의 악이다.”(Corruptio optimi pessima)라고 바르게 말하였습니다. 이는 그 누구도 부패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단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에서 이 부패를 척결하려면 현명함, 경계심, 정직성과 투명성 그리고 어떠한 부정행위라도 고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공개적으로 부패와 맞서 싸우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언젠가 부패에 가담하여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악행에 맞설 때, 심지어 중대한 범죄에 맞설 때가 바로 재산을 박탈당하고 존엄과 감정이 짓밟히며 생명마저도 빼앗긴 무고한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때입니다. 악의 길에 머무르면 결국 환멸과 비탄에 잠기게 될 뿐입니다. 참된 삶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귀 기울이실 준비가 되어 계신 것처럼 저도 저의 형제 주교님들과 신부님들과 함께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마련한 자비의 특별한 시기에 모두 회개하라는 초대를 받아들이고 정의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 2016년 4월 총선-안철수경계경보는 여전히 유효하다(주류언론 거꾸로 읽기)

 

 

20. 이러한 맥락에서 정의와 자비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정의와 자비는 두 가지 대립하는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한 실재의 두 가지 차원으로 충만한 사랑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법에 따라 법질서를 준수하는 시민 사회에서 정의는 근본 개념입니다. 또한 정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의 정의와 판관이신 하느님을 언급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정의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며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정직한 이스라엘인의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종종 정의의 본래 의미를 왜곡시키고 그 깊은 가치를 모호하게 만들어 율법주의에 이르게 합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관점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성경에서 정의가 하느님의 뜻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누이 율법의 준수보다 신앙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십니다. 마태오와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의문을 제기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단순히 의인들과 죄인들로 나누는 율법의 준수를 정의로 여기는 관점에 맞서시며, 죄인들을 찾아 그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는 자비의 위대한 은사를 보여 주시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해방 활동과 쇄신의 원천으로 여기셨기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거부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과 다른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준수한다면서 그저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가렸습니다. 율법 준수의 권유가 인간 존엄에 대한 배려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께서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호세 6,6)라는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을 언급하신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그 무엇보다도 자비가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시고 이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자비가 예수님 사명의 근본임이 드러납니다. 자비는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도전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뛰어넘으십니다. 율법에서 죄인으로 여겨지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그분의 깊은 자비를 깨닫게 됩니다.

 

의로움에 대한 바오로의 이해가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바오로는 이제 율법이 아니라 신앙을 앞세우게 됩니다.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는 자비로 구원을 가져다주십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죄와 그 결과에 예속되어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시편 51[50],11-16 참조).

 

 

21. 자비는 결코 정의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에게 참회하고 회개하여 믿도록 하는 많은 기회를 주십니다. 호세아 예언자의 경험은 자비가 정의를 뛰어넘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이 예언자가 살았던 시대는 유다인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붕괴 직전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선조들의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의 논리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불충한 이들을 배척하시려 한다는 것이 타당해 보일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겼으므로 그에 따른 형벌, 곧 유배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고 아시리아가 바로 그들의 임금이 되리니 그들이 나에게 돌아오기를 마다하였기 때문이다.”(호세 11,5)라고 예언자가 전한 말씀이 이를 증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의 정의로운 질책 바로 다음에, 예언자는 어조를 완전히 바꾸신 하느님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입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츠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호세 11,8-9).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치 이 예언자의 말씀에 주석을 다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보다 분노를 참으시는 일이 더욱 쉬우셨습니다.” 13) 바로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잠시이지만 그분의 자비는 영원합니다.

 

하느님께서 정의에만 머무르신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시고 단지 율법 준수만 요구하는 인간과 같게 되실 것입니다. 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정의만을 요구할 때 결국 정의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용서로 정의를 넘어서십니다. 그렇다고 정의를 깎아내리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일 뿐입니다. 용서의 온유함을 느끼고 회개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더 큰 차원 안에 두시고 이를 뛰어넘으십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참된 정의의 바탕이 되는 사랑을 체험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나무랐던 당대 유다인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사도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10,3-4). 하느님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은총으로 모두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모두와 세상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새로운 삶에 대한 확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22. 희년에는 대사도 수여됩니다. 자비의 성년에 대사는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에게 한없이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죄를 없애 주시는 당신의 사랑과 그 사랑의 힘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 보이십니다. 우리는 파스카의 신비와 교회의 중개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여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시고 또한 늘 새롭고 놀라운 방법으로 끊임없이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죄를 저지릅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죄의 무게를 무겁게 느낍니다(마태 5,48 참조). 우리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은총의 힘을 느끼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죄의 힘도 느낍니다.

 

 

우리는 용서를 받았지만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로 그에 맞갖은 삶을 살지 못합니다. 고해성사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며 그 죄를 완전히 없애 주십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의 행동과 생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훨씬 더 강하십니다. 그 자비가 하느님 아버지의 대사가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통하여 이미 용서받은 죄인에게 다가가시어 죄의 결과로 남은 모든 것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시어,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고 자비롭게 행동하며 사랑을 키울 수 있게 해 줍니다.  

 

교회는 성인의 통공으로 살아갑니다. 성찬례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인 이 통공은 우리를 성인들과 복자들과 영적인 결합을 이루게 합니다(묵시 7,4 참조). 성인과 복자들의 거룩함은 우리의 나약함에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어머니인 교회가 기도와 삶으로 거룩한 이들이 나약한 이들을 도울 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년의 대사는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가 믿는 이의 삶 전체에까지 이른다는 확신으로 우리가 당신의 자비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사는 교회의 거룩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구원의 열매를 모든 이에게 전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가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희년을 충실히 살아가며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당신의 자비로운 대사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기를 간청합시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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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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