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희년(2015년 12월 8일 ~ 2016년 11월 20일 ),교황께서 강조한,  

성녀 파우스티나Maria Faustina 수녀는 누구인가?

 [자비의 특별 희년, 무엇을 할 것인가] (1) 왜 자비인가?

 

 

성녀 파우스티나 축일10월 5일, 출생1905 - 사망1938

 

 

[폴란] 성녀 코발스카 파우스티나(1905~1938). 성현성(, vision)의 수녀. Congregation of the Blessed Mary of Mercy(자비의 동정 마리아 수녀회) 수녀. 세례명 Elena, 수도명 Maria Faustina(폴란드어: Faustyna). 하느님 자비의 사도로 알려져 있다. 파우스티나는 가난한 집의 10자녀 중 셋째, 2년의 교육을 받았는데도 그녀는 깊은 내용의 일기를 썼다. 7세에 세례를 받고(1912) 완덕을 향해 살라는 예수의 속삭임을 들었다. 1922년 수녀원에 들어갈 의사를 표했으나 부모들은 집안 살림에 그녀가 필요해서 반대했고, 파우스티나는 가정부로 일했다. 29세에 Warszawa에 있는 수녀원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을 본 다음 그녀는 자비의 동정 마리아 수녀회에 들어갔다(1925). 1928년 기한 서원, 1933년 종신서원, 주방일, 정원일, 문지기 등에 봉사했다.

1931년 파우스티나는 예수의 성현성(, vision)을 뵙고 부활 후 둘째 주일을 하느님 자비의 날로 지내고 이 신심을 온 세계에 전파하라고 했다. 정신병학적 검진을 받은 결과 파우스티나의 정신 상태는 건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의 영성 지도신부 Michael Sopocko는 미술가 Kazimierowski에게 부탁해 그녀가 본 자비의 구세주 예수 상을 그리게 하여 예수의 성심에서 붉은빛과 흰빛이 비쳐지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파우스티나는 신비로운 영성 체험의 하루를 지냈다. 그녀는 성현성, 계시, 성흔(), 도처 현존(, ubiquity) 은혜, 영혼을 읽는 능력, 예언 등의 은사를 나타냈고, 이것을 아는 사람은 수녀원의 몇몇 장상들, 고해신부, 영성 지도신부뿐이었다.

1958년 바티칸은 700쪽에 이르는 그녀의 일기가 잘못 번역되어 그 일기 출판을 금지했다. 파우스티나에 대한 일반 신자들의 공경은 계속되었고, 추기경 Karol Wojtyla는 이 일기를 다시 번역해 1978년 교황청 출판 금지령을 번복시켰다. 이것은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되기 6개월 전 일이었다. 성현성에 나타난 그리스도께서는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하느님 자비의 묵주기도를 전파하라고 부탁했고, “예수님,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쓴 하느님 자비의 상본을 전파하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매일 오후 3시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부탁도 했다.

파우스티나 수녀는 하느님 자비의 사도의 사명을 띠고 폐병에 걸려 세상을 하직했다. 하느님 자비 신심 운동은 신부들, 수도자들, 평신도들이 포함되어 29개국에 전파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7년 Krakówagiewniki에 있는 하느님의 자비 성지에 묻힌 파우스티나 무덤을 순례했다. 이곳은 성녀가 죽은 곳이며 Wojtyla가 교황이 되기 전 젊어서 Solvay 공장에 근무 전에 매일 들렀던 곳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93년 그녀를 시복(), 2000년 시성()했고, 2000년 4월 30일, 부활 후 둘째 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선포했다.[네이버 지식백과] Kowalska Faustina, St.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2007. 11. 25.,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38년도 파우스티나죽음의 의미,2차대전 발발하기 바로 직전!!

 

 

그 동안 파티마의 성모님께만 주목했던 나에게서 요즘,아아!!

탄성이 저절로 터져 버린 이 사건의 연속성이라니!!! 어떻게 이리도 치밀한 각본이란 말인가.신성의 존재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가 눈 시퍼렇게 뜨고,살아계신 존재임을 알려주신 사건,아예 작정을 하시고,그 무대가 폴란드가 될 것이며, 폴란드인들을 그 증인으로 쓸 것이라며 인류에게 신호를 보내 온 사건, 바로 파우스티나를 통해서 인류 앞에 보내주신 선물보따리야말로,빛의 신비와 자비주일이다!!!!

 

2천년 전에 팟모섬에서 귀양살이하던 요한에게 나타나셨던 우리의 주님,앞으로 바티칸에 세워질 당신의 교회와 신앙인들이 당할 십자가의 삶을 보여주시며,묵시록을 쓰도록 명령하시던 주님께서, 그렇게 요한에게서 나타나셨던 바로 그 모습(신성,인성을 모두 갖추고서,믿는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그 모습)으로,1934년 부터 파우스티나에게 나타나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1917년 부터 나타나신 파티마의 성모님의 역할이란,마치 그것은 세례자요한의 역할처럼, 앞으로 인류 앞에 나타나실 주님의 깜짝출현을 예고하는 메시지였다!!!!이 사건의 연속성은 콜베신부님의 역할에서도 나타난다.결코 우연일 수 없는 1938년도 파우스티나의 죽음,그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1941년 2월 ‘아우슈비츠’에 억류되었던 콜베신부님!!! 이 분의 존재야말로,특별하게 성모님으로부터 사랑받던 사제였으며,하느님의 자비를, 온 인류에게 증명한 카톨릭사제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콜베신부님은 1945년 8월15일 나카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그 장소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운명처럼 아우슈비츠에 들어간 것이다.이 일본의 원폭투하는 철저하게 하느님이 계산에 넣고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인 셈이다.나는 앞으로도 콜베신부님과 일본과의 관계도 파헤칠 생각이다.이렇게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란 장소는 하느님을 등진 인간들이 어느 경지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를 표본으로 보여줬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한다.이 수용소의 잔인함이 바로 솔제니친이 체험한 수용소와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렇게 3명의 어린 목동들(파우스티나와 거의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체험한 파티마의 사건은,유럽대륙의 끝에서 끝으로 돌아가서 폴란드의 한 시골마을에 살던 아이 파우스티나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해석시켜주기 위한 성모님의 활동이었다.마치 부숴진 퍼즐조각들처럼,그 의미없는 단편적 조각들을 하나씩 모아서 완성시킨 퍼즐판에,전체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 자신이 이미 각 성인들의 영성을 공부할 때,또는 파티마의 메시지를 공부할 때,따로따로 이해되던 사건들이, 그래서 지극히 단편적이었고,심오함을 느끼지 못한 사건들이였다가,갑자기 타임라인을 따라 다니며,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을 연결해가며 재구성하다보니,결국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 것이다.....

 

 

그 분들이 비오12세 교황님이고,파우스티나수녀와 루치아수녀,콜베성인과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살해 당한 카톨릭신앙인들과 유태인들(특히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성녀),그리고 요한바오로2세의 삶이다!!

 

이렇게 타임라인에 의해서 제대로 나타난 그림으로 읽는,전례력에서의 자비주일의 의미!!!그 심오함의 도착지가 바로 파티마사건이 세례자요한의 역할이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이 글....

 

 앞으로(다음주), 4개의 신비로 이루어진 묵주기도에서 두번째 신비인 빛의 신비와 함께,그동안 숙제처럼 미루어두었던 삼위일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포스팅을 완성해나가며,연관포스팅으로서,견진성사와 성령의 존재에 관한 주제로 글을 써나갈 계획이다.한가지 고민은,내일부터는 주말인데 그냥 이대로 다음주까지는 포스팅을 올리지 않고 푹 쉬고 싶다,는 마음과 베드로와 바오로사도 대축일에 관한 전례해석을 해야될 거 같다는 마음의 줄당기기!!

 

 

굿뉴스 대축일공부 클릭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5560&gomonth=2013-06-28

 

 

<참고>아래의 글은 어제 부터 작성하던 글의 첫 시작이다.그렇게 오늘도 이 포스팅을 발행하려고 미처 끝마치지못한 자료들을 연구하다가.....이렇게 오늘에서야 새롭게 알게된 자비주일의 의미를 서두에 올린 이후라서,글이 두서가 없다....그걸,염두에 두고서 읽어주시라!!!

 

 

 

영성(신앙)과 이성(과학적사유)능력이 뛰어난 민족,폴란드인!! 동방예의민족이라 자부하는 한국인과 너무나 흡사하다!!! 나는,요즘, 폴란드인은 누구의 후손인가?란 주제로 자료찾기 하느라고 시간을 모두 허비하는 중이다.

 

러시아인들을 이루는 동슬라브족도 여러갈래가 나오지만 가장 큰 갈래는 몽골족의 피가섞인 카자크인과 유럽인의 피가 섞인 우크리나인으로 나뉘는게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 폴란드인의 뿌리인 서슬라브족혈통을 찾는 것은 대단히 어려워 보인다.한국어로 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결국 골치아프지만 영어자료를 뒤질 수 밖에 없다.그러기 까지는,시간이 많이 소요될거같다.비록 쉽지않은 작업이지만 또 그만큼 흥미진진한 작업이다.가진 것이라고는 시간 뿐인 나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취미가 또 어디 있으랴!!

 

마치 이 기분은 그 동안 이 리빙인텍사스 블로그에서, 내가 시도해왔던 미국체류시민기자로서의 사명감으로서,미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한국인들에게 진짜 미국을 알리고 싶어했던 흥분과 흡사하다......더구나 참신앙인들에게,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알리는 - 굿뉴스 중의 굿뉴스에 속하는 소식이니 이 아니 즐거우랴!!!

 

 

 

 

1,스타니슬라오(Stanislaus,축일 4월11일)- 폴란드 크라쿠프 교외 슈체파노프(Szczepanow)에서 출생한 성 스타니슬라우스(또는 스타니슬라오)는 그니에즈노(Gniezno)에서 수학한 뒤에 서품되었다. 그는 설교가로서 곧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려고 애썼고, 교회 개혁 의지를 강력히 표명하여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1072년 그는 크라쿠프의 주교가 되었는데, 국왕 볼레수아프 2세(Boleslaw II)의 잔학성과 불의를 고발함으로써 왕과 적대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국왕을 파문하고 대성당의 출입을 저지하자, 볼레수아프 왕은 크라쿠프 시외의 성 미카엘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그를 직접 끌어내어 살해하였다. 성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국민의 상징이다. 그는 1253년 9월 8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IV)에 의해 아시시(Assisi) 대성당에서 시성되었고,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2,헤드비지스(Hedwig,축일 7월17일) - 헝가리의 국왕 루도비쿠스 1세(Ludovicus I)의 딸이며, 폴란드의 국왕 카시미르 3세(Casimir III)의 조카인 성녀 헤드비지스(Hedwigis)는 1382년에 루도비쿠스 부왕이 운명함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였고, 13세 때에 리투아니아(Lithuania)의 요가일라(Jogaila) 대공과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의 평화를 거의 400년 동안이나 지속시켰다. 그리고 성녀 헤드비지스의 신심이 뛰어났기 때문에 크게 감동한 남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온 나라의 이교도 신전을 파괴하고는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였다. 그녀는 리투아니아의 그리스도교화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399년 7월 17일 맏딸을 분만하다 딸과 함께 사망한 그녀는 198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97년 6월 8일 폴란드의 크라쿠프(Krakow)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야드비가(Jadwiga)로도 불리는 그녀의 축일은 2월 28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3,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y Kolbe,축일 8월14일) - 1894-1941년 -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4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친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는 1895년 1월 6일 폴란드 ‘즈둔카볼라’에서 출생했다. 1919년 ‘파두아’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꼴베 신부는 매스콤을 통해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는 신심단체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했으며 1930년부터 36년까지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후 39년 귀국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폴란드가 나찌 독일에 점령 당한 직후 체포된 꼴베 신부는 41년 2월 ‘아우슈비츠’에 억류되었다. 그런데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도망병이 발생하자 수용소장은 이에 대한 대가로 닥치는 대로 10명을 지적, 아사형(餓死形)에 처하도록 명령 했는데 이때 꼴베 신부가 아내와 자식이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인 프란치스젝 가요브니젝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했다. 아사형 감옥에 감금돼 2주간을 보낸 후 살아남은 꼴베 신부 등 4명은 41년 8월 14일 석탄산의 주입으로 죽음을 당했다. 한편 꼴베 신부는 71년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다.

 

.........한줄기 빛마저 차단되고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 암흑의 감방에서, 산송장처럼 굶어 죽어가야만 하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매일 로사리오 기도와 찬미가로 주님을 찬양하다 끝내는 독침 삽입으로 9명의 죄수들과 함께 장렬히 사제의 한평생을 미친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 인류를 구속코자 십자가의 죽음을 택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처자식을 거느린 한 가장을 대신해 스스로 죽기를 자원한 현대판 ‘골고타’의 시련 - 꼴베 신부가 지난 10월 10일 ‘바티깐’에서 온 세계 가톨릭인의 축복을 받으며 성인의 품에 올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된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 소속의 폴란드인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는 1894년 1월 폴란드 ‘즈둔카볼라’에서 라이몬드 꼴베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1907년 꼰벤뚜알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들어간 꼴베 신부는 그 후 이태리 ‘파두아’에 있는 프란치스칸 하우스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1919년 사제로 서품된 후 모국 폴란드로 돌아간 꼴베 신부는 그곳에서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신심을 앙양하는 신심단체인 성모의 군대를 창설했으며 ‘성모의 기사’라는 잡지를 펴내기도 했다.꼴베 신부가 창설한 성모의 군대는 현재 전 세계 2만여 회원을 가진 국제제적인 가톨릭 단체로 발전했다.

1930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꼴베 신부는 1939년 폴란드로 되돌아왔으나 제 2차 세계 대전의 초기인 독일의 폴란드 점령 직후 나찌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 후 풀려났으나 1941년 2월 다시 체포된 꼴베 신부는 마침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감금되었다.당시 나찌는 독일 점령군에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던 성직자들의 색출 검거에 나섰는데 꼴베 신부도 예의는 아니어서 2번째 검거되었을 때는 폴란드 레지스탕스의 지하 신문 인쇄를 도왔다는 협의로 체포되었다.

꼴베 신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있었을 때 죄수 탈출 사건이 발생, 수용소장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죄수 10명을 임의 추출하여 아사형에 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에 수인번호 16670번을 가슴에 단 꼴베 신부는 한 가족의 가장인 프란치스젝 가요와닉젝을 대신해 아사형을 자원하고 나섰다.이렇게 하여 창문도 없는 깜깜한 감방에 갇힌 꼴베 신부는 절망의 시련 속에서 굶어 죽어 가야 할 동료 죄수들의 영혼을 위로 하여 로사리오 기도를 비롯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당부하며 함께 기도했다.당시의 상황에 대해 꼴베 신부를 비롯한 10명의 죄수들이 갇혀 있던 감방의 통역관 겸 책임자였던 브루노 볼고빅 씨는 이렇게 묘사했다.

“10명의 죄수들이 외부와 차단된 감방으로부터 매일 큰소리로 암송하는 기도 소리와 함께 로사리오 기도와 성가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때로는 기도에 너무 열중하여 간수들이 일일점검을 취하려 들어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곤 했습니다. 꼴베 신부는 평온하고 고요한 모습으로, 선 채로 또는 무릎을 꿇은 채 우리들에게 인사를 보내곤 했습니다.”

이렇게 꼴베 신부와 3명의 죄수들은 마지막까지 남은 굶주림 속에서도 2주간을 연명한 후 결국 1941년 8월 14일 나찌의 독침 투입으로 세상을 떠났다.그 후 30년이 지난 1971년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 베드로 성당에서 복자로 시복됐다.꼴베 신부의 시성은 지난 3월 2일 교황청에서 공표됐는데 꼴베 신부에 의한 2가지 기적은 교황청 시성 성성에 의해 입증 됐었으며 더 필요한 기적 사실의 제출은 철회되었다.추기경으로서 여러 번 그리고 교황으로서는 한 번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곳의 집단 수용소를 ‘현대인의 골고타’라 칭하고 “증오의 회생물인 동시에 그의 사랑을 통한 승리자가 된 꼴베 신부에 의해 축복받은 고통과 영광의 장소”라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1982년 10월 17일]


 

 

4,파우스티나(Maria Faustina Kowalska,1905-1938)-축일은 10월 5일이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자료를 참조하시라.

 

연관포스팅 클릭 ☞파우스티나수녀는 누구인가? St. Faustina -The Divine Mercy Image

 

 

5,교황요한바오로2세(Karol Józef Wojtyła,1920~2005)-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출 소식을 들은 소련에서는 공산주의 국가의 주민이 교황으로 선출된 배경에는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해체를 의도한 것이라고 보았다. 조국 폴란드에서 공산주의 압제에 시달렸던 탓에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던 교황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핫라인을 통해 긴밀히 협력했다. 그는 수차례의 고국 순방을 통해 레흐 바웬사 등 당시 연대노조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연대의 봉기를 촉발했다. 이어 교황은 폴란드 국민 70여만 명이 모여든 집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투쟁하라고 직접 촉구했다.

 

그는 “여러분은 인간입니다. 굴욕적으로 살지 마십시오.”라고 역설함으로써 공산주의 독재에 대한 저항의 불을 지폈다. 결국, 연대노조는 최초의 자유총선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고, 이러한 폴란드 공산 정부의 붕괴와 맞물려서 동유럽 공산 국가들에서 잇따른 민주화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또한, 1989년 당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접견은 냉전 시대의 종식을 앞당긴 것으로 평가된다.

 

 

6,퀴리부인(Maria Skłodowska-Curie,1867~1934) - 누구나 다 알고있는 분이라서 일단 자료생략.

 

 

 

7,[Lech Wałęsa] (레크 바웬사)와 폴란드 노동조합(Solidarity) -  1980년 9월에 창설되었으며, 이듬해 12월 폴란드 정부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으나 1989년 재등장하여 1940년대 이래 동구권 최초의 자유선거에 반정부세력으로 참가했다. 그결과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UWP : 공산당)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연대자유노조의 기원은 1976년 폴란드의 여러 도시에서 수천 명의 파업노동자들이 당국에 의해 진압·체포된 뒤 반정부 지식인집단이 노동자방어위원회(Komitet Obrony Robotnikow/KOR)를 결성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KOR은 구속자 가족을 돕고 법률자문 및 의료지원 활동을 벌이면서 지하조직망을 통해 투쟁소식을 널리 선전했으며, 1979년 노동자권리헌장을 발표했다.

 

1980년 식료품값 인상에 항의하는 새로운 파업 선풍이 일어나자 그다인스크는 정부의 포고령에 항의하는 투쟁의 온상지가 되었다. 이곳의 레닌 조선소에서 약 1만 7,000명의 노동자들이 전기공 레흐 바웬사의 지도 아래 파업을 벌이며 공장 안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1980년 8월 중순 그다인스크에서는 그다인스크 및 다른 지역으로 확산된 파업을 지도하기 위해 공장간 파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 위원회는 결성 1주일도 안 되어 대부분 KOR의 노동자권리헌장에 기초한 요구안을 정부 측에 제시했다.

 

8월 30일 정부와 그다인스크 파업노동자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어 파업권 및 대폭적인 종교적·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함께 자유로운 독립 노동조합이 인정되었다.연대자유노조는 공식적으로 1980년 9월 22일 그다인스크에 모인 36명의 지역노동조합 대표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동시에 KOR는 해체되고 기존의 활동가들은 연대노조에 흡수되었으며, 의장에는 바웬사가 선출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개인 소농들로 구성된 농민조합이 1980년 12월14일 바르샤바에서 창설되었다. 이 모임에서 거의 1,000여 명의 농민 지도자들이 대다수 폴란드 노동자를 대표하게 되었다. 1981년 내내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 정부는 세력을 강화하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연대자유노조와 대립해야 했다. 연대자유노조는 경제개혁, 자유선거, 노동조합의 주요정책결정 참여 등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지도부의 통제하에 일련의 파업을 벌였다.

 

호전적인 행동위원들이 온건노선의 바웬사에게 압력을 가한 결과 연대자유노조는 더욱 강경해졌다. 한편 야루젤스키 정부는 소련으로부터 연대자유노조를 탄압하라는 강한 압력을 받게 되었다. 1981년 12월 13일 야루젤스키가 계엄령을 선포한 뒤 연대자유노조는 불법화되었고, 그 지도자들은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1982년 10월 8일 의회가 연대자유노조 해산을 공식 선포했지만, 연대자유노조는 지하활동을 계속했다.

 

1988년 파업과 노동자들의 소요가 폴란드를 휩쓸 때 파업노동자들은 정부가 연대자유노조를 인정할 것을 가장 강력하게 요구했다. 야루젤스키가 정부와 연대자유노조 지도자 간의 회담을 승인했으며, 이에 따라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협상 끝에 1989년 4월 연대자유노조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폴란드 상하원 자유선거 참여를 허용하는 포괄적인 협정이 체결되었다. 같은 해 6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연대자유노조가 추천한 후보는 새로 구성된 상원에서 100석 중 99석을, 상하원의 총 460석 중 161석을 획득하여 하원에서 원내투쟁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공산당은 단독으로 의회 내 다수파를 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8월에 연대자유노조와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데 합의했으며 익숙하지 않은 연정 내 소수파 신세를 감수해야 했다. 야루젤스키는 오랫동안 연대자유노조의 고문을 지낸 타데우슈 마조비에츠키를 연대자유노조 출신자 및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내각의 총리로 지명했다. 1989년 8월 24일 마조비에츠키는 1940년대말 이래 폴란드 최초의 비공산계 총리로 취임했다.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 하느님의 자비를 새롭게 조명한 성녀


번역 송영웅 바오로 · 봉명학원 재단이사


새 천 년을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성녀로 시성된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Maria Faustina Kowalska, 1905-1938)는 폴란드의 글로고비에츠(Glogowiec)에서 신앙심이 깊은 소작농의 세 번째 딸로 태어났다. 그는 바르츠키에(Warckie)에 있는 스비니체(Swinice) 교구에서 헬레나(Helen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코발스카는 집안이 가난하여 정규 교육을 3년 받은 다음 중퇴하였고 16세가 되었을 때에는 우치(Lodzi) 근처의 알렉산드루프(Aleksandrow)에서 가정부로 일하였다.

코발스카는 어렸을 때부터 밤에 기도할 때면 밝은 빛을 보았다고 했는데, 이런 현상은 그녀가 가정부로 일하던 알렉산드루프에서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어느 날 오후 코발스카는 주인집 안뜰을 걷고 있다가 갑자기 그 집이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고 ‘불이야!’ 하고 비명을 질렀다. 비명에 놀란 그 집 안주인이 방에서 뛰어나왔지만, 어디에서도 불길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기절하여 쓰러져 있는 가정부 코발스카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의사를 불러 코발스카를 검진하게 하였는데, 의사는 그녀가 건강하다고 판정하였다. 그러나 주인집의 만류에도 코발스카는 가정부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부모님에게 수도원에 가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을 말하였다. 코발스카의 부모는 자기 딸이 어려서부터 영성적인 면에서 특별한 자질이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딸이 수도원에 입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몹시 낙담한 코발스카는 다시 가정부로 일하면서 자기 나이 또래의 젊은 여성과 같이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하였다. 어느 날 코발스카는 자신의 자매 중 한 사람과 춤을 추고 있었는데, 고통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갑자기 보게 되었다. 고통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녀가 결단을 내리는 데에 가장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그녀는 다음 날 바로 짐을 꾸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Warsaw)로 갔다.

코발스카는 1925년에 자비의 성모 수녀원(Congregation of the Sisters of Our Lady of Mercy) 입회를 허가받았다. 코발스카는 폴란드의 크라쿠프(Krakow)와 프오츠크(Plock)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빌뉴스(Vilnius)에 있는 수녀원에서 요리사, 정원사, 잡역부 그리고 현관 문지기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코발스카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한결같이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였고 자비심 가득한 마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였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의 심오한 영성이 가진 내적 은총을 알지 못하였다. 코발스카는 거룩한 환시를 여러 번 보았고 수많은 예언을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흔(聖痕)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었다.

1931년 2월 22일 저녁, 코발스카 수녀는 이제까지 보던 환시와는 전혀 다른 환시를 보게 되었다. 이날 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흰옷을 입으셨고 축복을 주시기 위해 한 손을 높이 올리셨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은 가슴 부위에 대고 계셨는데 가슴에서는 두 줄기 빛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코발스카 수녀에게 “너는 지금 네가 본 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라. 그리고 그 그림 밑에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라고 적어라” 하고 말씀을 건네시었다.

그러나 코발스카 수녀는 화가도 예술가도 아니었으므로 자신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자기 대신 그려줄 화가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라 무척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마침내 자신의 영성 지도 신부인 미하엘 소포츠코(Michael Sopocko) 신부가 화가를 수소문하여 ‘자비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고, 이 그림은 1935년 4월 28일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되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사람들의 신심은 코발스카 수녀가 자신을 그리스도와 일치하면서 사는 동안 점점 더 크게 퍼져 나갔다. 코발스카 수녀는 소포츠코 영성 지도 신부의 말씀에 순명하여 자신이 본 환시와 들은 예언들을 자신의 일기에 적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온 그녀의 신비스러운 일기는 수많은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코발스카 수녀는 심지어 자신이 33세에 폐결핵으로 죽을 것인데, 그 날짜는 언제라고 예언하기까지 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3년 4월 18일 코발스카 수녀를 시복하였고, 2000년 4월 30일 성녀로 선포하였다. 교황은 시성식에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

“오늘 본인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의 생애와 그녀의 증언을 하느님께서 우리 시대에 내려주신 은총으로 전 교회에 소개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섭리로 폴란드의 이 겸손한 딸의 전 생애는 20세기 격랑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였습니다. 우리는 몇 달 전 20세기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난 세기에 인류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끔찍한 참극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비참한 시기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비의 메시지를 코발스카 수녀에게 위탁하셨습니다. 그 시기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참전한 사람들과 수많은 사람을 끔찍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극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참상을 증언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비의 메시지가 우리 시대에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코발스카 수녀에게 “인류는 나의 자비를 온전히 신뢰하며 내게 돌아서지 않는다면, 결코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의 일기” 132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천 년대의 마지막이자 3천 년대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하는 20세기에, 폴란드의 이 수녀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 자비의 메시지는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코발스카 수녀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 자비의 메시지는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부활절의 복음을 보다 심도 있게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에게 커다란 빛을 주는 특별한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자비의 메시지는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큰 빛으로 드러납니다.”

2002년 8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크라쿠프에 세워진 하느님 자비의 묘지(Shrine of Divine Mercy) 봉헌식에 참석하기 위해 폴란드를 방문하였다. 교황은 이번 폴란드 방문의 목적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자비와 신자들이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2002년 8월 17일 교황은 이러한 말을 하였다.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도 없고 측량할 길도 없는 크신, 오 하느님의 자비하심이여! 누가 감히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의 덕을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오 전능하신 하느님의 위대하신 속성이여! 당신의 크신 자비에 힘입어 죄인들은 하느님, 당신께 감히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의 일기” 951쪽).”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본인은 성녀 코발스카 수녀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코발스카 수녀의 단순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이 말씀을 되풀이하면서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도 없고 측량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흠숭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코발스카 성녀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멀리 떨어져 있다면 인류는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큰 신뢰심을 가지고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여야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는 수많은 죄악과 부도덕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전능하신 사랑에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겠다는 이 고백, 즉 이 결단은 우리 시대에 특별히 필요합니다.”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의 축일은 10월 5일이다. [교회와역사, 2012년 7월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녀 야드비가 - 성녀가 된 폴란드의 여왕

번역 송영웅(바오로) · 봉명학원 재단이사


야드비가(Jadwiga, 1374-1399)는 1374년 헝가리의 부더(Buda)에서 폴란드 국왕 루드비크(Ludwik)의 딸로 태어났다. 야드비가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오스트리아 왕국의 공작 빌헬름(Wilhelm)과 약혼을 하게 되었고, 어린 소녀는 점점 빌헬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폴란드 왕실 의회는 그 결혼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야드비가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에 야드비가의 원의를 필수적인 요건으로 고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폴란드 왕실 의원들은 이 결혼을 반대하였고, 차후 결혼을 하였을 때 자연적으로 맺어지게 되는 오스트리아 왕국과의 동맹관계에도 반대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왕실 의회 의원들은 야드비가에게 개인적인 의사를 물어보거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이 약혼을 파기시켜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빌헬름 공작은 야드비가와 함께 폴란드 왕국에서 달아나려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나중에는 무력으로 왕실 의회 의원들을 복종시키려고 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1384년 10살이 된 야드비가는 아버지 루드비크 국왕의 뒤를 이어 폴란드의 여왕이 되었다. 야드비가는 여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빌헬름과 결혼하려던 생각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오로지 폴란드 백성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고 전적으로 그 뜻에 순명하기로 결심하였다. 1386년, 야드비가는 리투아니아(Lithuania)의 요가일라(Jogaila, 후에 부아디수아프 2세 야기에우오가 됨) 대공과 결혼하였다. 그리하여 두 나라는 정치적으로 동맹관계를 맺게 되었고 야드비가는 이 두 나라를 위하여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야드비가는 결혼식을 앞두고 두꺼운 검은 베일로 온몸을 감싼 뒤 크라쿠프(Krakow)에 있는 대성당으로 갔다고 한다. 그 대성당에서 폴란드의 이 어린 여왕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삶 안에서 여왕으로서의 직무에 온전히 충실할 수 있도록 은총과 용기 그리고 결단력을 주실 것을 하느님께 간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겠다는 상징으로 십자가로 온통 수놓은 검은 베일을 대성당에 벗어 놓았다고 한다. 야드비가는 어린 소녀였지만, 여왕으로서 그리고 많은 신하들이 모여 있는 궁중의 책임자로서 일생동안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의 무거움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야드비가가 크라쿠프 대성당에서 간절히 기도한 것은 바로 자신과 폴란드 백성 위에 세워진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하겠다는 표시였다.

야드비가와 요가일라 대공과의 결혼식은 당시 모든 세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최고의 예식이었다. 그러나 야드비가는 이 결혼을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위하여 새로우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헌신하는 큰 희생으로 여겼다. 1377년, 요가일라 대공은 리투아니아의 왕인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리투아니아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자기 사촌인 비타우타스(Vytautas) 공과 강력한 대결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함으로써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고, 폴란드의 국왕이 되었다. 또한, 리투아니아 왕위 계승자로서 그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 때까지 이교도였던 요가일라 대공은 자신이 만일 야드비가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자신과 전 리투아니아 백성이 세례를 받겠다는 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애초에 야드비가와 결혼하기로 하였던 오스트리아의 빌헴름 공작에게도 응분의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야드비가와 요가일라 대공은 그 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야드비가의 도움으로 요가일라 대공은 리투아니아의 전 백성과 함께 영세를 하였다. 그리하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양국을 공격하려던 튜턴 기사단(독일 기사단, Teutonic Knight)은 이교도인 왕과 이교국(異敎國)을 정벌하겠다는 명분을 잃어 버렸다. 왜냐하면 이교도였던 요가일라 대공과 리투아니아의 백성 모두 세례를 받았기에, 그들은 더 이상 이교도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리투아니아 왕국은 백성 전체가 영세를 한 후, 즉시 전 유럽에서 가장 신앙심이 깊은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조금의 흔들림 없이 신앙심을 확고하게 지켜 내려오고 있다. 야드비가 여왕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왕권과 재능 그리고 자신의 전 생애를 봉헌하였기 때문에 이에 감동한 교황 보니파시오 9세는 크라쿠프 대학교에 신학부를 신설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야드비가 여왕은 그리스도를 간절히 섬기려는 열정으로 많은 나라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야드비가 여왕은 1399년 7월 17일, 맏딸을 분만하다가 그 딸과 함께 크라쿠프에서 사망하였다. 1896년, 교황 레오 13세는 야드비가가 여왕으로서의 책무와 왕실 책임자로서 감당하여야 할 모든 업무들을 매우 헌신적으로 수행하였음을 기리면서 복녀로 선포하였다. 1997년 6월 8일, 크라쿠프의 블로니아 에스플라나데(Blonia Esplanade)에서 폴란드 국민 중 독실한 가톨릭 신자 150만 명 이상이 운집한 가운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야드비가 여왕을 성녀로 시성하였다. 교황은 성녀가 된 폴란드의 자랑스러운 여왕을 기리며, 시성식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어 주는 이 우대한 인물을 바라보면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울 수 있도록 특별한 은총을 주신 하느님의 크신 섭리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야드비가 여왕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와 사람들을 향한 사랑, 신앙과 지식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매일의 양식과 입을 옷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위대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모범적인 선행이 피어나 자유의 은사가 주는 기쁨이 완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성녀 야드비가의 축일은 2월 28일이다.

[교회와역사, 2012년 3월호]

 

 

HOMILY OF THE HOLY FATHER 
MASS IN ST PETER'S SQUARE FOR THE CANONIZATION 
OF SR MARY FAUSTINA KOWALSKA
Sunday, 30 April 2000
 
 
1. "Confitemini Domino quoniam bonus, quoniam in saeculum misericordia eius"; "Give thanks to the Lord for he is good; his steadfast love endures for ever" (Ps 118: 1). So the Church sings on the Octave of Easter, as if receiving from Christ's lips these words of the Psalm; from the lips of the risen Christ, who bears the great message of divine mercy and entrusts its ministry to the Apostles in the Upper Room:  "Peace be with you. As the Father has sent me, even so I sen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If you forgive the sins of any, they are forgiven; if you retain the sins of any, they are retained" (Jn 20: 21-23).
  
Before speaking these words, Jesus shows his hands and his side. He points, that is, to the wounds of the Passion, especially the wound in his heart, the source from which flows the great wave of mercy poured out on humanity. From that heart Sr Faustina Kowalska, the blessed whom from now on we will call a saint, will see two rays of light shining from that heart and illuminating the world:  "The two rays", Jesus himself explained to her one day, "represent blood and water" (Diary, Libreria Editrice Vaticana, p. 132).

2. Blood and water! We immediately think of the testimony given by the Evangelist John, who, when a solider on Calvary pierced Christ's side with his spear, sees blood and water flowing from it (cf. Jn 19: 34). Moreover, if the blood recalls the sacrifice of the Cross and the gift of the Eucharist, the water, in Johannine symbolism, represents not only Baptism but also the gift of the Holy Spirit (cf. Jn 3: 5; 4: 14; 7: 37-39).
 
Divine Mercy reaches human beings through the heart of Christ crucified:  "My daughter, say that I am love and mercy personified", Jesus will ask Sr Faustina (Diary, p. 374). Christ pours out this mercy on humanity though the sending of the Spirit who, in the Trinity, is the Person-Love. And is not mercy love's "second name" (cf. Dives in misericordia, n. 7), understood in its deepest and most tender aspect, in its ability to take upon itself the burden of any need and, especially, in its immense capacity for forgiveness?
  
Today my joy is truly great in presenting the life and witness of Sr Faustina Kowalska to the whole Church as a gift of God for our time. By divine Providence, the life of this humble daughter of Poland was completely linked with the history of the 20th century, the century we have just left behind. In fact, it was between the First and Second World Wars that Christ entrusted his message of mercy to her. Those who remember, who were witnesses and participants in the events of those years and the horrible sufferings they caused for millions of people, know well how necessary was the message of mercy.
  
Jesus told Sr Faustina:  "Humanity will not find peace until it turns trustfully to divine mercy" (Diary, p. 132). Through the work of the Polish religious, this message has become linked for ever to the 20th century, the last of the second millennium and the bridge to the third. It is not a new message but can be considered a gift of special enlightenment that helps us to relive the Gospel of Easter more intensely, to offer it as a ray of light to the men and women of our time. 
 
3. What will the years ahead bring us? What will man's future on earth be like? We are not given to know. However, it is certain that in addition to new progress there will unfortunately be no lack of painful experiences. But the light of divine mercy, which the Lord in a way wished to return to the world through Sr Faustina's charism, will illumine the way for the men and women of the third millennium. 
 
However, as the Apostles once did, today too humanity must welcome into the upper room of history the risen Christ, who shows the wounds of his Crucifixion and repeats:  Peace be with you! Humanity must let itself be touched and pervaded by the Spirit given to it by the risen Christ. It is the Spirit who heals the wounds of the heart, pulls down the barriers that separate us from God and divide us from one another, and at the same time, restores the joy of the Father's love and of fraternal unity.

4. It is important then that we accept the whole message that comes to us from the word of God on this Second Sunday of Easter, which from now on throughout the Church will be called "Divine Mercy Sunday". In the various readings, the liturgy seems to indicate the path of mercy which, while re-establishing the relationship of each person with God, also creates new relations of fraternal solidarity among human beings. Christ has taught us that "man not only receives and experiences the mercy of God, but is also called "to practise mercy' towards others: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Mt 5: 7)" (Dives et misericordia, n. 14). He also showed us the many paths of mercy, which not only forgives sins but reaches out to all human needs. Jesus bent over every kind of human poverty, material and spiritual.
 
His message of mercy continues to reach us through his hands held out to suffering man. This is how Sr Faustina saw him and proclaimed him to people on all the continents when, hidden in her convent at £agiewniki in Kraków, she made her life a hymn to mercy:  Misericordias Domini in aeternum cantabo. 
 
5. Sr Faustina's canonization has a particular eloquence:  by this act I intend today to pass this message on to the new millennium. I pass it on to all people, so that they will learn to know ever better the true face of God and the true face of their brethren. 
 
In fact, love of God and love of one's brothers and sisters are inseparable, as the First Letter of John has reminded us:  "By this we know that we love the children of God, when we love God and obey his commandments" (5: 2). Here the Apostle reminds us of the truth of love, showing us its measure and criterion in the observance of the commandments. 
 
It is not easy to love with a deep love, which lies in the authentic gift of self. This love can only be learned by penetrating the mystery of God's love. Looking at him, being one with his fatherly heart, we are able to look with new eyes at our brothers and sisters, with an attitude of unselfishness and solidarity, of generosity and forgiveness. All this is mercy! 
 
To the extent that humanity penetrates the mystery of this merciful gaze, it will seem possible to fulfil the ideal we heard in today's first reading:  "The community of believers were of one heart and one mind. None of them ever claimed anything as his own; rather everything was held in common" (Acts 4: 32). Here mercy gave form to human relations and community life; it constituted the basis for the sharing of goods. This led to the spiritual and corporal "works of mercy". Here mercy became a concrete way of being "neighbour" to one's neediest brothers and sisters.

6. Sr Faustina Kowalska wrote in her Diary:  "I feel tremendous pain when I see the sufferings of my neighbours. All my neighbours' sufferings reverberate in my own heart; I carry their anguish in my heart in such a way that it even physically destroys me. I would like all their sorrows to fall upon me, in order to relieve my neighbour" (Diary, p. 365). This is the degree of compassion to which love leads, when it takes the love of God as its measure!
 
It is this love which must inspire humanity today, if it is to face the crisis of the meaning of life, the challenges of the most diverse needs and, especially, the duty to defend the dignity of every human person. Thus the message of divine mercy is also implicitly a message about the value of every human being. Each person is precious in God's eyes; Christ gave his life for each one; to everyone the Father gives his Spirit and offers intimacy. 
 
7. This consoling message is addressed above all to those who, afflicted by a particularly harsh trial or crushed by the weight of the sins they committed, have lost all confidence in life and are tempted to give in to despair. To them the gentle face of Christ is offered; those rays from his heart touch them and shine upon them, warm them, show them the way and fill them with hope. How many souls have been consoled by the prayer "Jesus, I trust in you", which Providence intimated through Sr Faustina! This simple act of abandonment to Jesus dispels the thickest clouds and lets a ray of light penetrate every life. Jezu, ufam tobie. 
 
8. Misericordias Domini in aeternum cantabo (Ps 88 [89]: 2). Let us too, the pilgrim Church, join our voice to the voice of Mary most holy, "Mother of Mercy", to the voice of this new saint who sings of mercy with all God's friends in the heavenly Jerusalem. 
 
And you, Faustina, a gift of God to our time, a gift from the land of Poland to the whole Church, obtain for us an awareness of the depth of divine mercy; help us to have a living experience of it and to bear witness to it among our brothers and sisters. May your message of light and hope spread throughout the world, spurring sinners to conversion, calming rivalries and hatred and opening individuals and nations to the practice of brotherhood. Today, fixing our gaze with you on the face of the risen Christ, let us make our own your prayer of trusting abandonment and say with firm hope:  Christ Jesus, I trust in you! Jezu, ufam tobie!   
 

[네이버 지식백과] 슬라브족 [Slavs, ─族] (두산백과)

 

인도유럽어족(語族)의 슬라브어파(語派)에 속하는 민족의 총칭.
 

현재 동유럽과 북아시아의 주된 주민으로 러시아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의 기간민족이다. 인구는 1970년 약 2억 5450만으로, 이 중에서 동슬라브(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백러시아인)가 1억 8690만, 서슬라브(폴란드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등)가 4660만, 남슬라브(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마케도니아인 ·몬테네그로인 ·불가리아인)가 2100만, 이 밖에 약 1000만의 슬라브계 주민이 남 ·북 아메리카 등지에 살고 있다.

고고학 ·언어학 등에 의하면 슬라브족의 조상은 고대에 아시아로부터 이동하여 3세기까지 적어도 1000년 이상 카르파티아산맥 북방의 비스톨라강(江) 유역에서 드네프르강 유역에 걸치는 지방에서 살고 있었으나, 그 후 동서방향으로 거주지를 확대하고 이어 카르파티아산맥 주변으로 남하하였다. 6세기 도나우강에 이르렀으며 8세기까지는 연안부를 제외한 발칸의 전역으로 퍼졌다. 서방에서는 프랑크왕국에서 비롯되는 독일인의 정복 ·식민으로 엘베강 이북과 발트해 연안, 동알프스의 거주지를 잃었으나 도나우강 유역에서는 헝가리인과 루마니아인의 진출을 허용하였고 동방에서는 유럽 러시아의 전역과 태평양 연안까지의 북아시아, 일부는 중앙아시아에까지 진출하였다.

동유럽으로의 확산시기에 슬라브민족과 그 언어의 분화가 진행되었으나 언어는 근대에도 여전히 강력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슬라브민족은 고전고대 세계와의 접촉이 적었기 때문에 게르만민족 등에 비하여 문화 ·사회의 발전이 늦어 그리스도교화(化)나 국가형성이 대개 9세기 이후에 이루어졌다. 동슬라브와 남슬라브 일부(불가리아인과 세르비아인)는 비잔틴동방정교회의 권내(圈內)에 들어가 키릴문자를 사용하였고, 나머지 남슬라브(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 ·서슬라브는 신성로마제국가톨릭교 세력권 내에서 라틴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 슬라브족은 각기 봉건국가를 세우고 흥망을 되풀이하였으나 서슬라브족은 유럽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남슬라브족은 투르크인에게 정복되었다. 단지 동슬라브족만은 9세기 키예프공국을 세워 외적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국토를 유지하면서 중앙집권적인 러시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18∼19세기 슬라브 제민족의 민족 해방운동이 일어났고, 특히 남슬라브족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쇠퇴를 계기로 독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로 서슬라브족이나 남슬라브족은 몇 개의 독립국가를 이루었고, 동슬라브족은 혁명을 통하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창건하였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슬라브계 민족의 반(反)나치스 운동이 일어나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을 비롯하여 많은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되었다. 인류학적으로 백색인종에 속하고 단두형(短頭型)이지만 용모는 일률적으로 규정하기가 어려우며, 머리털의 빛깔도 남유럽형의 블루네트에서 북유럽형의 블론드까지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남슬라브족은 남유럽형, 동슬라브족과 서슬라브족은 북유럽형과 유사하다. 전통적으로 호밀 ·보리 ·밀을 재배하고 소 ·말 ·양 등을 사육한다. 종교는 동슬라브족과 남슬라브족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의 일파인 동방정교회이고, 서슬라브족이 로마가톨릭교회이지만 남슬라브족의 일부는 이슬람교도이다. 9세기 그리스도교가 전파됨과 동시에 키릴문자가 전해져 현재 폴란드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슬라브족이 사용하고 있다.

 

 

 

 



Posted by T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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