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찍은 사진 먼저,감상하고 공부를 시작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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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홍지서림에서 출발한 한옥마을 그 끝자락에 놓인 향교까지 걷다.

 

1,출발

 

 2,헌책방과 바로 옆의 홍지서림↑↑에서 책을 사들고 경기전의 끝자락의 한옥마을 골목↓↓을 찍다.

 

 3,오백살 넘은 은행나무가 있던 골목을 찍다

 4,오목대오르는 골목이야기길로 들어가는 초입, 11월중순으로 들어서는데 여전히 단풍이 이뻤던 골목↓↓

about God's mercy on human being,click ☞ http://tessinozona.tistory.com/251

 5,향교길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해서 다시 한옥마을 중간쯤의 길을 걷다.이 날은 책방에서 책만 구입하고 귀가할 계획이라서 지도도없이 이렇게 헤매고 다녔다.이게 거의 일주일 동안에 3일 간격의, 3번째 방문이었다.평일인데다,날도 흐리고(이즈음은 10월의 가뭄도 사라지고,거의 날마다 비가 내렸다.)

 

 관광객도 없는 이 호젓함!!! 너무 좋았다.

 6,드디어 향교길 -교동골목에 들어서다.

 7,동헌을 지나다가 카메라 방전!!!

 

 8,덕분에,일광부족으로,목표였던 향교 사진을 못 찍을뻔 했다.

9,아슬아슬하게 만화루에 오르다.

4대박해 역사는 여기 클릭해보세요 ☞  모방 신부와 기해박해 -차기진 신부님의 연재글 중에서

 

아래 자료 읽고 클릭해보세요 ☞유교(군자)와 천주교의 만남 - 교육 (밥상머리 아버지와 스승)의 중요성

 


 

성균관 成均館  -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관'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이다.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관'이라는 말로 바꾸면서부터이다. 1308년(충선왕 1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 때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

 

 

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제주()·악정()·직강()·박사()·학정()·학록()·학유()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을 상재생()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나 음서()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 원점()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의 생활은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자치적인 활동기구로 재회()가 있었다.

 

유생은 기숙사생활을 하는 동안 국가로부터 학전()과 외거노비() 등을 제공받았으며, 교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하였다. 유생은 또한 당대의 학문·정치현실에도 매우 민감하여 문묘종사()나 정부의 불교숭상 움직임에 대해 집단 상소를 올렸으며,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권당(:수업거부) 또는 공관()이라는 실력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학문의 전당으로서 관리의 모집단으로 주요한 기능을 한 성균관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교육재정이 궁핍화하고 과거제도가 불공정하게 운영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1894년의 갑오개혁은 성균관의 역사에서 중요한 굴절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면서 일정한 변모를 겪게 되었다.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태학지()》에는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 및 성균관 제도의 변천과정, 유생의 활동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성균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균관 [成均館] (두산백과)

 

전주향교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 있는 향교 주변일대. 사적 제379호. 본래 경기전 부근에서 현 위치로 옮겼고, 대성전을 비롯하여 만화루, 외삼문, 동무와 서무, 명륜당, 장판각, 계성문, 계성사 등 16동과 인근의 양사재가 포함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주향교 [全州鄕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려 말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당시의 위치는 현재 경기전(殿) 근처였으나 태조() 이성계의 수용()을 봉안하기 위하여 경기전이 준공되자 1410년(태종 10) 전주성의 서쪽 황화대() 아래로 이전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 순찰사 장만()이 좌사우묘지제()에 어긋난다 하여 조정에 보고, 왕의 재가를 받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654년(효종 5)·1832년(순조 32)·1879년(고종 16)·1904년에 중수하였고, 1922년에 명륜당을 보수하였다.

 

조선 후기의 경내 건물로는 3칸의 대성전, 각 10칸의 동무()와 서무(西), 신문(), 외문(), 만화루(), 5칸의 명륜당, 각 6칸의 동재()와 서재(西), 3칸의 계성사(), 신문(), 입덕문(), 4칸의 사마재(), 6칸의 양사재(), 2칸의 책판고(), 직원실, 제기고(), 수복실등 총 99칸인 대규모의 건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향교는 전라도 53관의 수도향교()라 칭하였다.

 

그 뒤 만화루는 1886년(고종 23)에 홍수로 수몰되었고, 책판고는 관찰사 조한국()이 관고() 소유 책판을 전주향교로 이장하여 책판고 내에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1920년의 홍수와 1950년 6·25전쟁으로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5성()·10철()·송조 6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또 동무·서무에는 유약()·복불제()·복승()·동중서()·한유()·이통()과 우리 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대성전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 3칸에는 널문을 달았으며, 도리기둥에 맞배지붕이고, 양합각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좌우 1칸씩은 눈썹지붕을 이어 달아 꾸몄으며, 전면에는 모두 널문을 달았다. 따라서 눈썹지붕의 도리가 뺄목으로 되어 길게 뻗어 나와 있는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9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는 판본 67종 93책, 사본 32종 51책의 총 99종 144책이 있다.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 1명과 장의()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전주향교 [全州鄕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당 書堂

 

학당(學堂) ·사숙(私塾) ·학방(學房) 등이라고도 한다. 서당에 관한 기록은 한국 사기(史記)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구려에 경당(扃堂)이라는 부락단위의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초기부터 각처에서 성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서당의 기록은 1124년(인종 2)에 왔던 송나라 사신의 서장관(書狀官) 서긍(徐兢)이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마을 거리에는 경관(經館)과 서두(書杜)가 두 개, 세 개씩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민간의 미혼자제(未婚子弟)가 무리를 이루어 선생에게 경서를 배우고, 좀 성장하면 유(類)대로 벗을 택하여 사관(寺觀)으로 가서 강습(講習)하고 아래로 졸오(卒伍) ·동치(童稚)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에 서당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고려의 서당은 그대로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더욱 발전된 민중교육기관으로 신교육이 실시될 때까지 존속해온 가장 보편화된 교육기관이었다. 이 서당은 완전히 사적()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기본자산이나 인가()를 요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흥폐가 자유자재였으며 뜻있는 인사()는 누구나 설치할 수 있었다. 서당이라 불리는 사숙이 성립되는 데는 사족() 자제들을 자기 집에서 가르치는 경우,  가세가 풍족한 집안에서 독선생()을 앉혀놓고 약간명의 이웃 자제들을 무료로 동석시켜 수업하는 경우, 훈장() 자신이 교육취미나 소일()을 위하여, 또는 이웃이나 친구의 요청으로 학동을 받아 수업하는 경우, 향중()의 몇몇 유지 또는 한 마을 전체가 조합하여 훈장을 초빙하여 자제를 교육시키는 경우, 그리고 훈장 자신이 생계를 위하여 자기가 직접 설립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규모가 작은 서당에서는 훈장 한 사람이 가르쳤으나 비교적 큰 서당에서는 훈장 혼자 많은 학동을 가르칠 수 없었으므로 학도들 가운데서 나이가 들고 학력이 우위(優位)인 자를 접장으로 내세워 그보다 하급과정의 학동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접(接)’이란 곧 단체의 뜻으로 같은 서당에서 수업하는 동료를 ‘동접(同接)’이라 하고, 이 접의 우두머리 격이 곧 접장이었다. 서당에 입학하는 연령은 일정한 규정은 없었으나 대체로 아동의 나이가 7∼8세 전후가 되면 훈장에게 글을 배우는 것이 통례였다. 입학은 흔히 동짓날을 택하였는데, 그것은 동지가 바로 음(陰)의 극(極)이자 양(陽)이 초동(初動)하는 때이므로, 그 이후는 음이 점쇠(漸衰)하고 양은 점성(漸盛)한다는 데에 기인하였는데, 이는 존양사상(尊陽思想)의 일단에서 나온 습속이었다.

 

입학하는 날 훈장에게 나아갈 때는 흔히 술 ·닭 등의 예물을 갖추는 것이 하나의 예의였다. 학동이 맨 처음 대하는 책은 《천자문》이나 《유합(類合)》이다. 이 책을 통하여 단자(單字)에 대한 음훈의 의식을 깨우치고, 이 단자를 붙여 음독(音讀)하는 법을 배운 다음 《계몽편(啓蒙編)》이나 《동몽선습(童蒙先習)》 또는 《격몽요결(擊蒙要訣)》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통하여 초보적인 구두와 문장의 뜻을 해독하는 훈련을쌓는 한편 책 속의 교훈적인 내용을 터득하게 된다. 다음은 《십팔사략(十八史略)》 《통감(通鑑)》 《소학(小學)》 등을 배워 문리(文理)가 트이고 견식(見識)이 열리면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우게 된다. 옛날 선비들은 이 단계를 거쳐 향교(鄕校) 또는 사학(四學), 이어서 성균관으로 진학하였다. 서당은 근대식 학제가 시행된 후에도 보통교육의 보조기관으로 유지되다가 쇠퇴하였으나 지금도 산간 벽지에서 서당을 볼 수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서당 [書堂] (두산백과)

 


성균관 본문 이미지 1

 

 



Posted by T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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