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란 사회제도가 문제라기보다는,아무리 사회시스템이 잘돼 있어도 권력자가 지키지 않으면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이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제대로 이 시스템을 지켜낼 역량이 있는 교양인들-선거권자,주권자들을 양산해내야만 이것이 가능하다.그래야 그 교양인들 속에서 권력을,주권자들에게 유지시켜줄 민주적인 정치가선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한 사회의 민주적제도는 그 제도의 유무가 아니라,그 제도를 수호할 교양인들이 얼마나 존재하느냐에 달려있다.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특히 밥상머리의 아버지역할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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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스승)이란 무엇인가? ☞유교(군자)와 천주교의 만남 - 교육 (밥상머리 아버지와 스승)의 중요성

조선시대 교육은 철저한 가정교육-수신치기 교육이였다.클릭 ☞ 공자의 유학 儒學, 향교鄕校(향학 鄕學) 서당

 

 

 

 

유학儒學을,유교儒敎라 칭하며 종교라 부를 수 있는가?

 

 

 

공자는 왜 초월적 존재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려고 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 있겠지만 일단 문화적 풍토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예 문화는 은대의 전통을 이었지만 인본주의적 성향을 더 중시한다.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은 주대부터 내려온 전통의 하나다. 또한 공자 자신의 성향이 현실적인 인간세계를 더 중시했기 때문에 초월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마음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둘째로 유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 전 세계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지상에서의 삶이 끝이 아님을 강조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는 죽은 뒤에는 영원한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힌두교나 불교 등은 죽은 뒤에는 살아 있을 때의 업보에 따라 윤회한다고 주장한다. 도교의 세계관은 모호하다. 노자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 일체 말한 바가 없고 장자는 죽음이란 기가 흩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종교화되고 난 뒤에는 불교의 윤회설을 받아들여서 이것저것 뒤섞인 형태가 되고 말았다.

유교에서도 분명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은 틀림없다. 만약 죽음이 끝이라고 보았다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제사가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전통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다면 그냥 형식적으로 간단하게 지내면 될 것이지 그렇게 까다롭고도 복잡하게 절차를 따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실 전통의 상례와 제례는 현대인들이 볼 때는 지나치게 까다로운 면이 있어 어떤 사람은 유교를 죽음의 문화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단견이자 편견이다. 철학적으로 보았을 때 유교는 분명 죽음보다는 삶을 더 중시한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자로의 질문에 대해 "삶에 대해서도 아직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겠는가?"라고 답한 적이 있다. 공자는 분명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불가지론 또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현실의 삶에 대해서 더 치열하게 궁구하느라 죽음에 대해서는 궁구할 겨를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유교에서는 왜 상례와 제례가 그렇게 까다로운가? 그것은 죽음의 의미를 지나치게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면 삶의 의미 또한 지나치게 가벼워질 수 있을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게 되면 부모나 조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어지고 이것은 삶을 무책임하게 살아가는 부정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님을 강조해야 한다. 물론 그 속에는 가부장적 사회구조 속에서 죽은 조상의 힘을 이용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의도 또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지엽적인 문제고, 유교가 세계의 다른 종교에 비해 죽음보다는 삶을 훨씬 더 중시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교의 종교성 (중국문화 대교약졸, 2007. 9. 10., 도서출판 들녘)

 

 

 

제9장 유교

 


和光同塵  화광동진


 - 화광()은 빛을 늦추는 일이고, 동진()은 속세()의 티끌에 같이 한다는 뜻으로,  자기()의 지혜()를 자랑함 없이 오히려 그 지혜()를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동화()함을 말함




전 세계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성스러움을 강조하고 이 세상보다는 저세상을 더 중시한다. 불교와 힌두교는 물론이거니와 기독교와 이슬람교 또한 마찬가지다. 노자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도덕경』의 첫머리에서 우주의 근원인 도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자신의 도에 대한 체험과 자신이 체득한 도의 속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노자의 이야기를 흔히 현묘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일상의 삶에서 도저히 체험하기 어려운 깊고도 오묘한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는 화광동진을 이해했고 그것을 자신의 깨달음의 중요한 특징으로 삼았다. 화광동진의 기본 얼개는 범속함에서 성스러움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범속함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때의 범속함은 물론 단순한 범속함이 아니라 성스러움을 속으로 감추고 있는 범속함이라고 할 수 있다.

 

 

화광동진의 의미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크게 두 개의 차원이 있다. 하나는 감추기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서 깨달음의 빛을 밖으로 보내지 않고 다시 범속함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고, 또 하나는 성스러움과 범속함,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통합한다는 의미다. 전자는 쉽게 알 수 있지만 후자의 의미를 터득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노자 당시 수많은 은자들은 주로 감추기에 집착하고 있었지만 노자는 통합도 실천했다. 노자의 글 속에는 초월적인 도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천하를 어떻게 다스리고 백성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언급들이 많이 등장하고,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구절들도 많이 나온다. 이는 노자가 초월의 세계에만 치우치지 않고 현실 문명과 정치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양자를 통합하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하면 노자의 계승자인 장자는 초월의 세계에 치우쳐 있다. 『장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대붕(大鵬)의 이야기는 장자의 이런 성향을 잘 대변한다. 그는 구만 리 상공을 날아가는 대붕과 같이 자질구레한 일상의 현실을 뛰어넘어 절대 자유에서 소요하며 노니는 것을 추구했지 일상과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화광동진은 주로 자신의 지혜의 빛이나 재주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쪽으로만 이해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다가 벌목당하는 미목보다는 쓸모없는 잡목으로 구석에 틀어박혀 하늘이 준 생명을 온전히 보존하기를 원했다.

 

 

화광동진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불교의 선사들 또한 불교 안에서는 초월의 세계에 경도되기보다는 일상의 중요성을 더 많이 강조하면서 양자를 통합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 문명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대안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보면 미흡한 점이 있다. 선사들이 강조한 일상성이란 주로 밥 먹고 차 마시고 물 깃고 장작 패는 일들인데, 이런 것들은 분명 일상성임에는 틀림없지만 표피적이고 피상적이다. 일상성을 좀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정치·사회 구조와 문명이 깔려 있다. 정치·사회구조와 문명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그냥 밥 먹고 차 마시는 표피적인 일상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과 괴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선사들의 화광동진은 산중의 화광동진으로서 미완의 화광동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노자의 화광동진 또한 미진함이 있다. 그는 분명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실제적인 삶은 감추기에 치우쳐 있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머릿속으로는 분명 자신이 체험한 깊은 도의 관점에서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하려고 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천하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이상이나 꿈은 너무나 고원했지만 현실은 너무나 탁하고 혼란스러워 그 속으로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 두려움 때문에 고고하게 자신의 깨달음과 지혜를 감추고 그저 초야에 조용히 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년에는 결국 문명 세계를 등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의 모호한 생애가 후대에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전설과 뒤섞여 신선으로 추앙되고 심지어는 신의 대열에 들게 되었던 것은 바로 미완의 화광동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어떤 사상을 창출하여 그것을 개념화하고 언어화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지만 그 사상을 자신의 삶 속에 체화시키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사상을 창출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배워 창시자보다 더 훌륭하게 체득하고 실천하는 경우도 있다. 사상을 제창하는 사람과 그것을 구현하는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바로 그런 경우다. 공자는 노자에게서 화광동진을 배웠지만 노자보다 더 깊게 그것을 이해했다.

『사기』의 「노장신한열전」 가운데서 공자와 노자의 만남을 기록한 부분은 비중이 매우 크다. 노자 자체에 대한 기록만으로 볼 때 절반이 훨씬 넘고 여러 가지 이설을 포함한 전체 문장 가운데서도 3분의 1이나 되는 분량이다. 제1장에서 간략히 말했지만 여기서는 좀더 상세히 보도록 하자.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물었다. 노자는 말했다.

 

"그대가 하는 말은 그 말을 했던 사람과 뼈는 이미 썩었고 그 말만 남아 있는 것이오. 게다가 군자는 때를 얻으면 수레를 타고 때를 얻지 못하면 남루한 모습으로 다니는 법이오. 내가 듣기에 좋은 장사치는 깊게 감추어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이 해야 하고 군자는 큰 덕을 갖추고 있으나 용모는 마치 어리석은 듯이 해야 하오. 그대의 교만한 기운과 많은 욕심, 태를 내려는 기색과 넘쳐흐르는 뜻을 버리시오. 이들은 모두 그대 자신에게 무익할 뿐이오. 내가 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오."

 

공자는 물러나서 제자에게 말했다.

 

"새라면 나는 그것이 능히 날 수 있음을 알고, 물고기라면 헤엄칠 수 있음을 알며, 들짐승이라면 그것이 달릴 수 있음을 안다. 달리는 놈은 올가미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놈은 낚시로 잡을 수 있으며, 나는 놈은 주살로 잡을 수 있다. 용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과 같구나!"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역대 이래로 설이 분분하고 지금도 그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사적 진실성 여부를 떠나 사상적으로 의미 있는 부분이 많다.

 

 

먼저 공자가 노자에게 질문한 것은 '예'였다. 이때의 '예'는 물론 단순한 예의범절이 아니라 어지러운 천하를 구할 수 있는 사회·문화시스템으로서의 예다. 공자는 그것을 주공을 비롯한 옛 현인들의 기록에서 찾으려고 했다. 노자는 공자가 추구하는 그 예를 이야기한 사람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항상의 도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비추어보면 이미 죽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경전은 더욱 항상의 도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말이란 우리 마음의 그림자다. 말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그 윤곽만 보여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은 말의 그림자다. 말 속에는 현장감과 생동감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마음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전할 수 있다. 똑같은 사랑한다는 말이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말의 톤과 색깔에 따라 그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글로 표현할 때는 그것마저 사라지고 거친 윤곽만 남을 뿐이다. 물론 상상의 힘으로 그 윤곽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만약 그 글이 비슷한 느낌과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같은 시대 사람의 글이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옛 사람의 글이라면 어떨까? 거리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아마도 노자는 공자에게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예, 실체는 알 수 없고 껍질만 남아 있는 예, 그래서 항상의 도가 될 수 없는 예로는 당시 사회의 폐단을 구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리라. 그러나 공자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항상의 도이냐, 아니냐보다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실용성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의 관점에서는 주공의 예 문화야말로 중국인의 문화와 심성에 가장 적합한 것이고, 설령 껍질만 남아 있다고 해도 거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만 있다면 천하를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평생을 예를 탐구하면서 창조적 계승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노자는 군자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아서 처신해야 함을 말하고는 이어서 본격적으로 화광동진을 말하고 있다. 훌륭한 장사치가 천하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감추어 그 가치를 더 높이듯이 군자는 위대한 덕을 품고 있어도 겉으로는 어리석은 듯이 보여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물론 감추기에 초점을 맞춘 화광동진이다. 마지막으로 감추기의 관점에서 볼 때 공자의 세상에 대한 의욕과 야망이 지나침을 경계했다.

 

 

노자와 공자는 나아가고 물러날 때에 대해서도 관점을 달리했다. 노자는 자신이 살고 있던 그 시대를 물러나야 할 때라고 여겨 결국 은둔했지만 공자는 그 시대야말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보고 평생을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발분의 노력을 했다. 그러나 나아가고 물러남의 도 자체에 대해서는 공자도 공감했다고 본다. 맹자의 글에는 "군자는 영달할 때는 온 천하를 두로 구제해야 하고 궁할 때는 자신의 몸이라도 잘 닦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같은 취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유가와 도가가 서로 만날 수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후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이런 삶의 유형을 보여주는 사람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의 퇴계(退溪) 이황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계곡으로 물러난다는 말 자체가 은둔적이다.

 

 

공자는 노자가 충고한 화광동진의 감추기에 대해서도 깊게 이해한 듯하다.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한 시기에 대해서는 17세부터 51세까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노자가 공자더러 의욕이 과다하고 기색이 너무 밖으로 뻗친다고 충고를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30대 정도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듯하다. 이후 공자는 노자의 화광동진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신의 덕성과 자질을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려고 했던 것 같다. 『논어』에는 공자의 감추기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자공(子貢)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인품과 능력을 고루 갖추었고 인물도 출중했다. 그래서 당시 어떤 사람들은 자공이 공자보다 뛰어나다고 찬미했다. 그러자 자공은 몸 둘 바를 모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집의 담에 비유하면 저의 담은 어깨 높이여서 방과 집이 좋음을 다 엿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서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부유함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로 보아 공자는 속으로 깊은 도와 덕을 지니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그것을 잘 드러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공자의 덕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오랫동안 공자를 접하고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만이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더 가까운 제자일수록 공자의 도와 덕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회는 "선생님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고 들어갈수록 더욱 견고하다. 앞에 있는 것을 본 것 같은데 어느새 뒤에 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자의 도와 덕의 경지에 대해 극찬을 했던 것이다. 자공 또한 사람이 생긴 이래로 공자만큼 훌륭한 인물을 보지 못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물론 이 말은 공자의 제자들이 했던 말이므로 공자의 도의 깊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적어도 공자의 화광동진의 경지를 설명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공자의 위대한 점은 화광동진을 감추기로만 파악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스러움과 범속함의 통합,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통합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공자가 노자에게서 직접적으로 배웠다기보다는 스스로 터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도와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정진하여 사십이 되었을 때는 그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어지러운 시대를 바로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공자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도가 계통의 은자들 가운데서는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바둥거리는 공자를 비웃고 공자더러 명리를 버리고 조용히 살아가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논어』에는 그런 인물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그런 충고를 들었을 때 공자는 "내가 이 백성들을 버리고 날짐승과 들짐승과 더불어 살란 말인가? 그들이 어찌 내 뜻을 알리요!"라는 말을 했다.

 

 

노자로부터 이미 화광동진의 충고를 받은 적이 있는 공자는 그들 은자들의 충고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지러운 난세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을 두고 산속에서 날짐승과 들짐승과 어울려서 홀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자가 볼 때 진정한 의미의 화광동진이 아니었다. 공자가 볼 때 진정한 의미의 화광동진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울고 웃으면서 현실의 모순과 질곡을 극복하기 위해서 같이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외쳤던 것이다. "그들이 어찌 내 뜻을 알리요!"라고……. 나는 이것이야말로 노자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바로 화광동진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화광동진은 찬란한 깨달음의 빛을 부드럽게 하여 안으로 감추고 다시 먼지 펄펄 나는 속세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실 깨달음을 감추는 화광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니지만 속세와 하나되는 동진은 더욱 어렵다. 나는 동진의 단계를 성숙도에 따라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누어 보고 싶다.

 

 

첫 번째 단계는 화광에 급급하여 그저 표피적인 동진에 머무르고 있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겉으로 볼 때는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서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실제 속으로는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지 않는 데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심리적인 거리를 둔다. 보통 사람들의 삶의 애환과 고통에 큰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이 경우 육신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홀로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입으로는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상생활을 이야기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초월의 세계, 깨달음에만 머물러 있다. 역대의 수많은 은둔자들이나 산중의 선승들은 이 단계에서 머물렀다.

 

 

동진이 깊어지게 되면 세상 사람들과 표피적인 관계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게 되며, 깨달은 자로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다. 물론 자신의 깨달음을 자랑하거나 우월한 관점에서 동정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진심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말 없는 가운데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준다.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간 동진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을 성취하고도 다시 중생 속으로 돌아와 중생의 아픔을 함께하는 보살도의 단계다.

 

 

동진이 더욱 무르익게 되면 사회와 문명을 깊이 이해하고 사회변혁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세 번째 단계다. 현실 세계의 일상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회구조와 문명의 성격과 무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가 모순에 빠지고 문명이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보통 사람의 일상성은 망가지고 피폐해진다. 우리의 일상성을 제대로 바로 보려면 결국 그 배후에 있는 사회와 문명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변의 몇몇 사람들에게 묵묵한 사랑과 자비를 펼치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사회와 문명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현실 개혁의 대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화광동진의 지극한 경지라고 본다.

 

 

나의 관점으로는 노자는 관념적으로는 동진의 마지막 단계까지 나아갔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피상적인 동진의 단계에 머물렀다. 미완의 화광동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화광동진을 제대로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화광동진이란 깨달음을 얻은 뒤에 그 빛을 안으로 감추고 다시 속세로 돌아오는 것인데 과연 공자는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깨달음 없이 그저 현실에 급급한 사람이었을까 하는 문제다. 만약 깨달음이 없다면 아무리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역사와 문명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해도 화광동진과는 별 상관이 없다.

 

 

공자가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이며 교육자인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의 깨달음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의 가르침에는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일상의 평범한 정치 사회적인 윤리나 사람으로서의 도리에 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불교의 승려 가운데서는 공자를 폄하한 사람도 많다. 심지어 어느 선사는 공자 같은 속인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는데 하물며 출가한 승려가 수도를 게을리 해서 되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공자의 경지를 일개 출가자보다 못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공자를 위대한 대각자로 본다.

공자가 왜 위대한 대각자이고

그는 과연 무엇을 깨쳤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공자는 자기 스스로를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아니라 학이지지(學而知之)라고 했다. 생이지지란 태어나면서 안다는 뜻으로 타고난 천재 또는 성인을 말한다. 예수나 석가가 그 대표적인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학이지지란 꾸준히 노력해서 안다는 뜻으로 공자같은 사람이 바로 그 대표적인 성인이다. 공자가 얼마나 배움을 좋아했는가는 『논어』의 첫머리가 "배우고 때로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호학(好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공자의 배움은 단순한 지식습득이 아니었다. 『논어』에 나오는 '호학'을 살펴보면 주로 인격도야에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단순한 인격도야라기보다는 바로 구도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눈을 감기 얼마 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삼십에 바로 서고, 사십에 불혹하고, 오십에 천명을 알고, 육십에 귀가 순하고, 칠십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철이 막 들기 시작한 열다섯 살부터 눈을 감기 직전까지 그의 삶은 치열한 구도의 삶이었다. 그는 실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도를 구했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한 순간에 천지가 뒤바뀌는 극적인 장면은 없다. 실로 점진적인 깨달음이 있었을 뿐이다.

 

 

공자는 아마도 오십 정도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천명(天命)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인격도야만으로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중국에서도 하늘이란 초월적인 존재, 인생과 우주의 주재자가 거하는 곳으로 여겼고,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여겼다. 중국문명의 특징상 하늘은 창조주나 절대자가 거하는 곳이 아니라 그냥 우주의 섭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모되었지만, 그래도 하늘의 명을 안다고 하는 것은 깊은 깨달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 뒤 육십에 이순(耳順)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이 경지는 많은 주석가들이 귀가 순통하게 되어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아마도 지천명(知天命)의 다음 단계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들으면 다 이해하게 되는 경지라고 이해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순통(順通)이라는 말은 듣는 대로 다 이해한다는 의미보다는 다시 겸허하게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천명을 알게 되면 내부에서 엄청나게 강한 확신이 밀려오기 때문에 외부의 소리는 귀에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기 신념에 도취되어 세상과의 소통이 막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다시 다른 사람의 비판과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고 세상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이순의 경지가 바로 화광동진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지고한 깨달음의 빛을 감추고 다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귀를 열어놓는 경지인 것이다.

 

 

다음에 칠십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안과 밖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룬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도를 깨친 사람은 있는 그대로 성스럽다. 내면의 본성을 완전히 자각하고 어떤 통제도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의 법도와 부딪힐 때는 아무래도 충돌을 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세속의 관점에서 볼 때 도를 깨친 사람의 행동은 때로는 파격적이어서 세상 사람들의 이해 범주를 넘어서 있기도 한다. 이것은 아직은 화광동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진정으로 화광동진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공자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 하나하나가 세상의 법도에 별로 어긋남이 없다. 이것은 개아(個我)의 행위가 사회 전체의 행위규범과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이것은 사실 부분과 전체의 아름다운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자의 깨달음은 노자의 깨달음보다 훨씬 아름답다. 노자의 깨달음은 설령 그것이 깊다고 해도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고 세상과의 소통이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은둔의 삶으로 끝났다. 이에 비해 공자는 처음의 자질은 노자보다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끝없는 배움으로 평생을 일관했으며 만년에는 안과 밖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경지까지 이를 수 있었다.

 

 

사실 근대 이전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사상은 유교였고, 동아시아의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은 성인은 바로 공자였다. 그러나 서구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유교는 봉건 지배계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 낙인이 찍혔고 동아시아의 낙후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다. 이에 따라 공자의 성스러움이나 권위 또한 형편없이 추락하여 위대한 성인에서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사상가로 인식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공자가 절대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봉건 지배계층이 자기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공자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했고 공자를 신격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볼 때 공자가 성인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제창했던 예 문화가 대성약범을 추구하는 중국문명의 원형에 가장 근접했기 때문이고, 그의 삶이 대성약범의 미학을 지향하는 중국인의 미적 안목으로 보았을 때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며, 그의 깨달음이 중국인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대성약범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깊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서구화 이후 공자의 권위가 급격하게 떨어진 것도 바로 대성약범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구화의 거센 파도가 전 세계 비서구 지역의 전통문화에 급격한 충격을 주었을 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큰 변화가 일어났지만 사실 종교 영역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수백 년을 보냈지만 인도 내의 기독교인은 그다지 많지 않다. 스리랑카나 미얀마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근대 이후 유럽의 세력이 한창 팽창할 때 기독교는 전통의 고등 종교가 없는 남미 지역 등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지만 고유의 전통종교를 가지고 있는 아시아에서는 유일한 예외인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많이 전파되지 못했다. 어차피 이들 종교사상들은 모두 현실세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부분은 서구화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교는 달랐다. 대성약범을 지향한 유교는 다른 전통사상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의 삶, 현실적인 정치윤리에 직접적으로 밀착되어 있었고 그래서 서구화의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 중국인들은 새선생(賽先生)과 덕선생(德先生)을 받아들여 중국을 탈바꿈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賽'는 'Science'의 음역어인 '새은사(賽恩斯)'의 첫 글자고 '德'는 'Democracy'의 음역어인 '덕모극납서(德謨克拉西)'의 첫 글자다. 새선생과 덕선생은 서구의 과학과 민주를 의인화해 만든 단어다. 유교의 상대는 기독교가 아니라 그들의 민주주의와 과학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훨씬 불리한 싸움이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결국 서구의 과학과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그들의 산업구조와 정치구조를 좇아갈 수밖에 없었고, 전통적인 산업구조나 정치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된 유교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만약 유교 속에 현실적인 윤리만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강렬한 신앙, 사후세계에 대한 확고한 신념체계, 세속을 초월하는 성스러움의 아우라 등이 있었다면 그렇게 급속도로 몰락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바로 이 대성약범 때문에 유교는 새롭게 각광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종교 또한 문명의 한 부분이고 시대에 따라 변천하기 마련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류의식의 발달 단계로 보았을 때 앞으로는 대성약범의 종교가 훨씬 더 호소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봉건시대의 유교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시대의 사회와 종교 상황에 맞는 새로운 유교를 창출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유교의 역사 속에는 그런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송명대의 신유학이 바로 그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본 노자와 공자 (중국문화 대교약졸, 2007. 9. 10., 도서출판 들녘)

 

 

 



Posted by T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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